로마서 15:01-13 새 인류의 삶_사랑으로 행해야 할 이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인류(새 백성, 새 이스라엘)된 이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약한 자를 잘 받아들이고(14:1-12) 비판하는 대신 사랑으로 행해야(14:13-23) 할 이유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시하고 그에 대한 근거로 성경을 인용하여 설명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 한 줄 묵상 : 공동체의 분쟁을 해결하는 기초는 사랑이며, 그 사랑의 원형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를 돌보시고 사랑하시며 용납하셨습니다.
# 12:01-15:13의 문맥 흐름 - 실제 :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인류의 삶
A. 12:1-2 새 백성의 마땅한 삶 : 영적 예배
B. 12:3-15:13 새 백성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
1. 12:3-21 원리 제시 : 새 백성의 삶의 원리 제시 - 개별적, 공동체적인면 함께 생각하라
1) 12:3-8 공동체 측면 : 지체의 원리
2) 12:9-21 개별적 측면 : 사랑의 원리
2. 13:1-15:13 새 백성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
1) 13:1-14 로마 사회에서 사는 문제
2) 14:1-15:13 로마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문제 :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
# 14:1-15:13의 문맥 흐름 -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 말고 사랑으로 받으라
1. 14:1-23 -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고 사랑으로 받으라
1) 14:01-12 이론적 권면 : 연약한 자를 받고 비판하지 말라
2) 14:13-23 실제적 권면 : 사랑으로 하라
2. 15:01-13 우리가 그렇게 사랑으로 해야 하는 신학적 이유와 모델(예수) 제시, 권면
1) 15:01-06 1차 권면과 설명 : 그리스도처럼 타인을 기쁘게 하라
2) 15:07-13 2차 권면과 설명 : 그리스도처럼 서로 받으라
# 15:1-13 문맥 흐름 - 그리스도께서 하셨기에 우리도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1. 1차 권면과 설명 : 그리스도처럼 타인을 기쁘게 하라 – 강한 자를 중심으로(15:1-6)
(1) 요지 : 강한 자가 자신을 기쁘게 말고 타인을 기쁘게 하라(15:1-2)
(2) 그 근거 :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셨음(15:3-4)
1)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음 (15:3a)
2) 성경 근거 : 인, 시69:9, (15:3b-4)
(3) 정리 기원 : 너희가 서로 뜻이 같아 하나님께 영광을(15:5-6)
2. 2차 권면과 설명 : 그리스도처럼 서로 받으라 - 강한 자를 중심으로 하되 양쪽 다(15:7-13)
(1) 요지 : 그리스도처럼 너희도 서로 받으라 (15:7)
(2) 그 근거 : 이유에 대해 구체적 설명과 증거를 제시 (15:8-12)
1)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5:8-9a)
2) 성경 근거 : 인용 삼하 22:50, 시 18:49; 신32:43; 시17:1; 사11:10 (15:9b-12)
(3) 정리, 기원 : 소망의 하나님이 -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15:13)
1-2절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웃을 기쁘게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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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은사와 힘과 능력은 군림하고 이기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쓰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선), 덕을 세워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한 몸 공동체의 지체로 부르신 것은 각자의 기능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서로의 부족함들을 채워주기 위함입니다. 부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관계입니다. 서로의 약점을 발견하거든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약점을 쥐고 갑질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한 이가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그 부족함을 채우라는 뜻으로 알고서 돕는 일도 덕을 세우면서 도움을 받는 이가 자존심이 상하거나 무시당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도와야 합니다. 도움을 주는 일도 받는 일도 모두 그렇게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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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 살아갈 때에 끊임없이 강자와 약자 사이에 갑을관계의 부정적 미혹이 있고, 그것이 세상의 흐름 속에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자행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자신의 힘과 재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소위 갑질하는 문화도 문제이고, 더불어 을의 입장에서도 갑을 비난하고 혹여 진행되는 호의를 후에는 권리마냥 주장하는 것도 역시 문제입니다. 상호 덕을 세우는 일은 무엇인지 잘 살펴 봐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고 갑을의 관계에 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약함이 악함과 부정함으로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하고, 강함이 선과 진리 혹은 성공으로 착각하지 말아야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나, 힘에는 그에 따른 책임이 있음을 늘 기억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의 저변에는 역시나 사랑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3-4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기에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용된 시편(69:9)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비난과 채찍을 기꺼이 감당하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전에 기록된 말씀들 곧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면서 약속된 위로와 소망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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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를 새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따라 신실하게 순종하셔서 모든 고난과 핍박을 감내하시고 마침내 자신을 기쁘시게하지 않고 아버지를 기쁘시게하고 연약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마침내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새 백성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었기에, 주님은 다시금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이웃을 사랑하기 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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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따르라 말씀하신 길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우리 주위의 뭇 영혼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그들도 우리처럼 그리스도를 통해서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새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이를 안다면 결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에 머물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은 바울사도는 동일하게 가기 위함이고, 이제 바울사도도 이방인의 사도로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이후로도 로마교회 통해서 서바나까지 이 일을 위해서 그간의 선교여정을 감내했고 예루살렘에서의 생명의 위협속에서도 로마로 가는 풍랑 속에서도 끝까지 위로와 소망을 가지고 주의 뜻을 따라 주님이 가신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 바울사도가 갔던 그 삶의 여정, 그리고 우리 이전의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이 갔던 그 길은 오늘 우리도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그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올곧게 가기 위함이요, 더불어 그 여정에서 당하는 많은 미혹과 유혹들을 물리치고 바른 길 가기 위한 인도를 받기 위함입니다.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일에 기꺼이 자기 부인의 길을 가는 것이 오늘 우리가 변함없이 가야 할 길입니다.
7-9a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우리를 대속하시고 용납하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받은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도 서로 용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할례를 받으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하게하고, 이방인들도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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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용납함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용납하시면서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용납하실 때에 우리의 자격을 따지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형제를 용납할 때에 용서하고 사랑할 때에 자격을 논해서는 안됩니다. 먼저 사랑하고 용납한 후에야 그의 변화와 성숙을 기대하고 인내로 경주하며 기다려 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할례를 행하신 것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이 모든 열방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새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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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이와 같이 성육신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진실 하심을 위해서 약속을 이루고 마침내 모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시는 일을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그 안에 우리를 용납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일만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고 받아 들이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9b-12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열방 중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인용된 말씀들은(삼하 22:50, 시 18:49; 신32:43; 시17:1; 사11:10 (15:9b-12)) 모두다 ‘열방들’이 들어갑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새 백성으로 부르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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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참 이스라엘은 약속과 선택으로 된 것이며,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 그가 할례 이전에 택함을 받은 것을 통해서 참 이스라엘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 이후의 족보에도 이방인이 포함되었으며, 출애굽 백성의 구성에 있어서도,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오셔서 신약에 바울 사도가 이방인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새 백성의 구성원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열방들 중에서 부르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약속과 선택에 의한 구성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놀라우신 긍휼과 사랑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요납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서로 용납하는 것이 새백성으로서, 주님의 용납하심을 경험한 이들로서 마땅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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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일부 소외된 약자들을 향하여 교회가 폭력적으로 그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일에 혈안이 된 것을 봅니다. 우리도 못지 않은 죄인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이 자격을 묻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통해서 새 백성으로 만드셨기에 이전의 악한 죄에서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부 기독교인들이 불신자들 중에서 소외된 이들을 향하여 요구하는것은 그들의 죄악을 정리하고 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서 전도의 대상을 선별하고 자격을 논하는 격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각한 일입니다. 주님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이게도, 의인 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죄인을 제한하고 가로막고 정죄하면서 용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시고 살리신 이들을 넘어지게 하는 심각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하셨 듯이 용납하고 사랑하고 품고 인내하며 기다려주고 희생하고 나누면서 그렇게 참사랑을 받은 자답게 우리도 그 사랑의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주가 필요하고, 그들 모두 주님의 새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6, 13절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영광을 돌리도록, 소망의 하나님께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길 원합니다.
바울사도는 기원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게 해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안에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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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시고, 서로 뜻을 같게 하시고, 한 마음과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우리의 것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고, 소망하며, 사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며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으려하고, 우리가 소망을 가지려하고, 우리가 사랑하려고 하면 할 수록 우리는 한계에 봉착합니다. 그리고 설령 그러한 일들을 억지로 이루는 일이 연륜이 쌓이게 되면 어느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마치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처럼 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교만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약한 이들을 향하여서 정죄하게 되고 후에는 잘 된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될 것으로 착각하면서 급기야 교만해지고 마음이 완악해져서 넘어지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 이와 반대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믿게하시고 소망이 되어 주시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시는 원천이시고 주권자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이들은 시간이 갈 수록 더더욱 겸손해 지고 온유해집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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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1장에서 그토록 하나님께서 믿음의 법을 통해서 우리를 새백성을 만드셨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신실함(믿음, 예수 사건)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는 것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강조한 신앙은 결국 하나님이 주권도 무시하고, 우리의 잘못된 지식에 기반한 하나님을 향한 열심만 남아서 믿음과 삶이 분리된 성도를 양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새백성에 합당한 사랑의 성도로 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거룩한 삶을 선택사항으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신앙을 양산한 것입니다. 우리가 새백성으로 살아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적 선택으로 되어진 것을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우리는 더욱 겸손히 감사하면서 주님의 뜻에 합당한 선을 이루는 일을 즐거이 감당해 가는 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바르고 온전한 이해에 기반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합당한 예배자 사랑의 성도 온전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복음과 신앙을 바르게 정립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믿음과 삶이 분리된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맛을 잃은 소금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개혁되기 위해서 우리는 왜곡된 전통적 복음에 대한 바른 재정립과 우리 신앙의 내용들과 신학들을 바르게 성경적으로 바르게 정립해야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세워지고 완성되어가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소망이 넘치게 되길 기도합니다.
# 기도
인내와 위로 그리고 소망의 하나님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뜻을 같게하여 주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기쁨과 평강과 믿음 안에서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하신 것처럼 강하고 약한 자 사이에 서로 용납하게 하시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자도 그렇게 이웃을 기쁘게 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자 되기 원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열방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우리 스스로 정죄와 판단의 자리에 서지 않게 하옵시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붙잡고
긍휼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게 하옵소서.
복음과 믿음과 사랑과 묵상의 능력을 잃어버려
믿음과 삶이 분리된 교회가
다시 바른 복음, 바른 신학, 바른 신앙을 정립하여
주님이 꿈꾸시고 성령님이 춤추시는 교회들로
바르게 세워지는 역사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