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9:20-36 온 백성의 찬양과 기쁨
무너진 일상과 깨어진 관계의 회복은 우리의 결단이 아닌, 우리를 위해 이미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자발적 기쁨과 찬양에서 시작된다.
오래도록 방치된 고택의 툇마루에 앉아본 적 있으신지요. 먼지가 켜켜이 쌓인 기둥, 색 바랜 단청, 그리고 거미줄 내려앉은 추녀 끝을 바라보노라면 시간의 퇴적층 아래 희미해진 옛 주인의 숨결을 느끼게 됩니다. 한때는 생기로 가득했을 그 공간에 깃든 적막과 스산함은 어쩌면 오늘 우리 마음의 풍경과도 닮아있습니다. 분주한 일상에 치여 영혼의 성소(聖所)를 돌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네 삶. 어느덧 마음의 등불은 꺼지고, 찬양의 문은 굳게 닫히고, 하나님을 향한 소통의 길은 잡초만 무성한 폐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절을 보냈던 아하스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 유다의 영적 상태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성전 문은 굳게 닫혔고, 등불은 꺼졌으며, 분향과 제사는 멈춘 지 오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백성의 삶은 황폐했고, 나라는 위태로웠습니다.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히스기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에게 무작정 기뻐하고 찬양하라고, 다시 제사를 시작하자고 독려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행한 일은 바로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회복은 우리의 의지적 결단이나 종교적 열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허물과 죄악으로 더럽혀진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히스기야는 자신과 온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수송아지와 숫양, 어린 양과 숫염소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는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정결해질 수 없다는 처절한 자기 인식이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겸허한 고백입니다. 마치 오디세우스가 20년의 유랑 끝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왔을 때,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늙은 개 아르고스처럼, 우리는 죄의 먼지를 뒤집어쓴 냄새나는 존재일지라도, 우리를 먼저 알아보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은 바로 그 속죄의 제물이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질 때 일어났습니다. 역대하 29장 27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번제를 드리기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찬양과 감사는 속죄를 위한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베풀어진 용서와 은혜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쏟아져 들어오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터져 나온 자발적인 기쁨의 함성이었습니다. 억지로 쥐어짜 낸 감사가 아니라,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는 환희였습니다. 왕과 백성, 제사장과 레위인,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한마음으로 엎드려 경배하고 노래했습니다. 그 모든 일이 “갑자기 되었으므로” 왕이 백성과 더불어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계획된 행사가 아니라, 은혜가 임할 때 폭포수처럼 터져 나온 거룩한 즉흥곡이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무게에 눌려 신앙의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서 있는 길벗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이 기쁨보다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지는 않으신지요.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찬양의 입술을 열지만, 마음은 여전히 굳어 있지는 않으신지요.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회복의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메마른 영혼에 다시 기쁨의 노래가 울려 퍼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큰 결심이나 노력이 아닙니다. 그저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잠잠히 묵상할 때, 우리의 닫혔던 마음 문이 열리고, 꺼졌던 영혼의 등불이 다시 타오르며, 우리의 삶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기쁨과 감사의 찬양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 모든 변화의 시작이며, 유일한 이유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