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6:01-14 성문을 멘 어깨가 베틀에 묶이기까지, 한 올씩 내어 준 구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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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성문을 뽑아 멜 만큼 강한 사람이 어떻게 한 걸음씩 무너져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삼손은 블레셋 가장 깊숙한 성읍 가사에서 한 기생에게 들어가고, 매복한 가사 사람들을 비웃듯 한밤중에 성 문짝과 문설주와 빗장을 뽑아 헤브론 앞 산꼭대기로 메고 갑니다(1-3절). 그 뒤 그는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를 사랑하게 되고, 블레셋 방백들은 그 여인에게 은 천백 개씩을 약속하며 삼손의 힘의 비밀을 캐내라고 합니다(4-5절). 삼손은 마르지 않은 새 활줄 일곱, 쓰지 않은 새 밧줄로 둘러대며 결박을 끊어 냅니다(6-12절). 그러나 세 번째 대답에서 그는 마침내 머리털을 입에 올리고, 베틀에 짜인 머리털을 뽑아내면서도 자기가 비밀의 문턱까지 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13-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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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때에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다는 요약으로 끝났습니다. 그 요약은 16장 마지막 절에서 한 번 더 되풀이됩니다. 그래서 16장은 이미 닫힌 생애 뒤에 덧붙은, 그의 몰락을 따로 들려주는 결말부처럼 읽힙니다. 14장에서 삼손은 딤나의 여인을 보고 좋아했고, 16장에서는 가사의 기생을 보고 들어간 뒤 들릴라를 사랑합니다. 세 여인을 따라 이어지는 이야기는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갑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소생했던 사람이 다시 스스로 위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갑니다.
# 가사는 블레셋 다섯 성읍 가운데 가장 남쪽, 애굽으로 내려가는 해안 길목에 자리한 성읍이었습니다. 삼손의 고향 소라에서 멀리 떨어진, 블레셋의 가장 깊숙한 땅입니다. 고대 성읍의 성문은 출입구가 아니라 성의 방어력 전체를 상징했고, 재판과 거래가 열리는 광장이기도 했습니다. 소렉 골짜기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경계를 따라 서쪽 평야로 흘러내립니다. 소렉이라는 이름은 좋은 포도나무를 가리키는 말과 닿아 있어, 포도나무 소산을 멀리해야 할 나실인이 포도의 골짜기에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 자체가 묘한 울림을 남깁니다.
# 민수기 6장의 나실인 규례는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포도나무 소산을 먹지 말 것,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 것,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 것입니다. 삼손은 앞선 장들에서 이미 포도원 길을 지났고 죽은 사자의 몸에서 꿀을 떠냈으므로, 남은 표지는 머리털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 표지 쪽으로 좁혀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곧 이어질 사사기의 부록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후렴으로 시대 전체를 요약할 것입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살아온 삼손은 그 후렴을 한 사람의 몸으로 미리 살아 낸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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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가사의 밤, 성문을 멘 어깨
성부 하나님은 부끄러운 밤을 지나는 자녀에게서도 맡기신 은사를 곧바로 거두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돌이킬 시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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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 산꼭대기로 가니라"(삿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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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아무 설명 없이 삼손을 가사에 세웁니다. 왜 그곳에 갔는지는 말하지 않고, 무엇을 보았는지만 말합니다. 14장이 삼손이 딤나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는 말로 시작했듯이, 16장도 같은 동사로 시작합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늘 눈에서 시작합니다. 개역개정이 기생으로 옮긴 말은 문맥상 창녀를 가리키며, 그에게로 들어갔다는 표현은 성적 관계를 뜻하는 구약의 관용어입니다. 14장과 15장의 일은 그래도 그가 좋아한 여인과 얽힌 사건이었지만, 이번 걸음은 그저 욕망을 채우려는 걸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장소는 블레셋의 가장 깊숙한 성읍이었습니다. 원수가 된 뒤에도 여전히 원수의 도시를 즐기려 찾아가는 그 지리가, 그의 영적 자리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가사 사람들은 조용히 성문에 매복하고 새벽을 기다립니다. 밤새 삼손이 지쳐 잠든 틈을 노린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통째로 뽑아 어깨에 멥니다. 가사에서 헤브론까지는 육십 킬로미터가 넘고, 그 길에는 해발 구백 미터가 넘는 산지가 놓여 있습니다. 동쪽으로 내내 오르막인 그 길을 성문을 지고 올라갔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일이 결코 아닙니다. 왜 하필 헤브론이었을까요. 박유미 교수는 헤브론이 유다 지파의 중심 성읍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지난번 자기를 묶어 넘긴 유다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무언가를 말하려 한 행동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번에도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이 장면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22:17). 그 약속이 기이하게도 기생의 집에서 나온 한 사람의 어깨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은사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하나님은 부끄러운 밤에도 그 힘을 곧바로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삼손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대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삼손을 향한 오래 참으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으심은 무한한 허락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뒤에 올 일을 미리 보여 줍니다. 가사에서 다시 매복이 있을 것인데, 그때 붙잡힐 것은 성문이 아니라 그 성문을 가져간 사람입니다. 실제로 삼손은 이 장 끝에서 두 눈을 잃은 채 바로 이 가사로 끌려옵니다. 성문을 메고 떠난 길이 끌려서 돌아오는 길이 됩니다. 참된 승리는 뒷날 다른 방식으로 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욕망의 밤이 아니라 순종의 밤을 지나 십자가를 지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마 16:18). 그분이 부수신 문은 사망의 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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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은사가 살아 있는 것을 하나님이 내 삶을 기뻐하신다는 표시로 여깁니다. 설교가 여전히 은혜롭고, 찬양이 여전히 뜨겁고, 일이 여전히 잘 풀리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은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지 면죄부가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겪어 온 여러 아픔 가운데는 은사가 뛰어난 지도자의 사생활이 무너진 이야기가 적지 않습니다. 성문을 뽑을 만큼 큰 힘이 부끄러운 밤을 덮어 주지는 못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드러난 능력보다 보이지 않는 밤의 걸음을 더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가사가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리라 여기며 들어가는 곳, 문제가 생겨도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리입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의 은밀한 방, 일터의 작은 부정, 가정 밖에서 키우는 마음이 그런 곳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문을 뽑을 힘이 아니라 그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릴 힘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직 은사를 거두지 않으신 지금이 바로 돌이킬 때입니다. 오래 참으심이 끝나는 날은 예고 없이 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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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절 사랑의 값으로 매겨진 은 천백 개
성자 하나님은 사랑한 제자에게 은 몇 푼에 팔리셨으나, 그 배신 앞에서도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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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네게 주리라 하니"(삿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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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의 이야기에서 사랑한다는 동사가 쓰인 것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딤나의 여인은 그의 눈에 좋았고, 가사의 여인은 그가 보고 들어간 사람이었지만, 들릴라는 그가 사랑한 사람입니다. 부부도 아니고 기생과 손님도 아닌, 성경에서 거의 유일하게 애인 관계로 그려진 사이입니다. 삼손의 사랑은 일방적이었지만 진실했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이 이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예고합니다.
들릴라가 누구인지도 본문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전성민 교수는 들릴라가 셈족의 이름이고 소렉 골짜기가 삼손의 마을에서 가까운 이스라엘 쪽 땅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이스라엘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삼손은 유다 사람들에게 묶여 넘겨진 데 이어 또 한 번 동족에게 팔리는 셈입니다. 들릴라라는 이름을 밤의 여인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삼손이라는 이름이 작은 태양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면, 가사의 밤을 벗어났던 작은 해가 이제 밤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해가 스스로 밤의 품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이번에는 협박 대신 돈을 내밉니다. 딤나의 여인에게는 불사르겠다는 협박을 썼고 들릴라에게는 거액을 내밀었으니, 방법은 달라도 삼손의 여인을 통로로 삼는 전략은 한결같았습니다.
그 액수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노동자의 한 해 삯이 은 열 세겔쯤이었다면 천백 세겔은 연봉의 백 배를 넘는 돈이고, 그것도 방백마다 각각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다섯 방백의 약속을 모두 합하면 은 오천오백 개, 오늘날로 치면 백억 원이 넘습니다. 본문이 들릴라를 블레셋 사람이라고 밝히지 않는 것은 그의 동기가 애국심이 아니라 돈이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삼손의 사랑에 값이 매겨졌습니다. 이 장면은 신약의 한 밤으로 곧장 이어집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은 삼십을 달아 주었습니다(마 26:15). 삼손은 자기가 사랑한 여인에게 팔렸고, 예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여 곁에 두신 제자에게 팔리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끝내 자기가 팔린 줄도 모르고 무너졌고, 예수께서는 팔리실 것을 다 아시고도 그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요한은 그 장면을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요 13:1). 값에 팔린 사랑이 무너진 자리에서, 값을 매길 수 없는 사랑이 우리를 붙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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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사회는 모든 것에 값을 매깁니다. 관계도 시간도 신념도 얼마짜리인지를 따집니다. 그 셈법은 교회 안으로도 조용히 들어옵니다. 신앙의 원칙이 손해를 부르면 슬그머니 접고, 공동체의 약속보다 개인의 이익을 먼저 계산합니다. 들릴라에게 건네진 은 천백 개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날마다 제시되는 거래 조건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무엇이든 값으로 환산하는 세상 속에서 값으로 살 수 없는 사랑을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삼손의 비극은 사랑했다는 데 있지 않고, 사랑할 대상을 분별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하는 관계가 나를 하나님께로 이끄는지, 일터에서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나의 구별됨을 지켜 주는지 살펴보십시오. 나를 향한 누군가의 친절 뒤에 어떤 값이 매겨져 있는지 분별하는 지혜와, 그럼에도 사람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는 넉넉함을 함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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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절 새 활줄 일곱, 장난처럼 시작된 시험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위험을 장난처럼 가볍게 다룰 때에도 흔들어 깨우시며, 아직 늦지 않았다고 경고의 줄을 끊어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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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삿 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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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릴라의 질문은 놀랄 만큼 솔직합니다. 유도 질문이 아닙니다. 당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어떻게 하면 당신을 묶어 굴복시킬 수 있는지 그대로 묻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이 한 말을 거의 그대로 옮긴 질문입니다. 다만 그 질문이 청하건대로 시작하는 부드러운 청유형이라는 점에서, 조심스럽고 영리한 태도가 함께 드러납니다. 삼손이 일방적으로 속았다고만 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질문의 뜻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분명했습니다.
삼손의 첫 대답은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입니다. 이 줄은 짐승의 힘줄이나 내장으로 만든 매우 질긴 줄이며, 마르지 않았다는 말은 막 만든 새 줄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아직 마르지 않은 짐승의 힘줄이라면, 삼손은 또다시 죽은 짐승의 몸과 닿게 됩니다. 그는 거짓말 속에서도 나실인의 규례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일곱이라는 완전수를 곁들인 것도 믿을 만하게 이야기를 꾸며 낸 수사입니다. 비밀은 지키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질문을 외면하지 못해 그럴듯한 거짓을 지어낸 것입니다. 들릴라는 곧바로 방백들에게 새 활줄을 받아 삼손을 묶고, 이미 사람을 방 안에 매복시켜 둡니다. 삼손은 그 줄들을 불탄 삼실을 끊음 같이 끊어 버립니다(삿 16:9).
8절에는 14절과 달리 삼손이 잠을 깨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처음 두 번은 깨어 있는 채로 장난처럼 스스로 묶였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주고받는 놀이처럼 시작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방에는 칼을 든 사람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알고 삼손은 모르는 이 정보의 차이가 장면마다 등골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화자는 이 장면을 그의 힘의 근원은 알아내지 못하니라는 말로 닫습니다. 결박이 끊어진 사실보다 비밀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 힘의 근원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끊어지는 활줄은 삼손에게 보내진 첫 번째 경고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이렇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넘어지기 전에 작은 줄이 먼저 끊어지게 하셔서,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물었습니다(고전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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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은 대개 장난의 얼굴로 옵니다. 이 정도 농담쯤이야, 이 정도 구경쯤이야, 이 정도 타협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도 경계선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지 않습니다. 작은 편법을 웃으며 넘기고, 불편한 질문을 가볍게 받아넘기는 사이에 조금씩 허물어집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서로에게 이 방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물어 줄 수 있는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위험한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정죄가 아니라 사랑으로 그 이름을 불러 주는 형제자매가 곁에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첫 번째 끊어진 줄을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가정에서 배우자가 조심스럽게 건넨 한마디, 일터에서 동료가 던진 우려, 묵상 중에 마음을 찌르는 말씀 한 구절이 모두 성령께서 보내시는 경고일 수 있습니다. 결박을 끊었다는 안도감에 취해 다음 질문을 기다리지 말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설 용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도 괜찮았다는 경험이 쌓일수록 다음 경고는 더 작게 들리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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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4절 머리털 일곱 가닥, 베틀에 짜인 구별됨
삼위 하나님은 우리가 비밀의 문턱까지 한 걸음씩 다가갈 때에도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고, 끝내 우리의 구별됨을 지키시려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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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하는지라 들릴라가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내니라"(삿 16: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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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릴라는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라고 따집니다(삿 16:10). 희롱하다로 옮긴 말은 기본적으로 속이다라는 뜻이며, 야곱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꾼 라반의 속임을 말할 때 쓰인 낱말과 같습니다(창 31:7). 가벼운 장난이 아니라 중대한 속임을 가리킵니다. 들릴라는 속은 사람의 목소리를 내지만, 실은 자신이 가장 큰 속임을 꾸미고 있습니다. 삼손은 두 번째로 쓰지 아니한 새 밧줄을 말하고, 그 줄을 실을 끊음 같이 끊어 냅니다. 그 밧줄은 레히에서 유다 사람들이 그를 묶었던 새 밧줄을 떠올리게 합니다. 삼손은 이미 한 번 자기 편이라 여긴 이들에게 묶였던 사람입니다.
비슷한 장면이 세 번 되풀이되는 가운데 네 가지가 점점 짙어집니다. 첫째, 들릴라의 재촉이 청하건대에서 이제는으로, 다시 이 때까지로 강해집니다. 둘째, 거짓말에 대한 불평도 한 번 속았다에서 계속 속였다로 무거워집니다. 셋째, 삼손이 입에 올리는 결박 도구가 점점 위험해져 마침내 머리털에 이릅니다. 넷째, 세 번째에는 삼손이 잠이 듭니다. 경계심이 흐려지고 위험에 더 깊이 노출된 것입니다. 타락은 한 번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 속에서 조금씩 빠져듭니다. 삼손은 들릴라를 속이며 자기 힘을 뽐내는 아슬아슬함을 은근히 즐겼고, 더 강한 자극을 찾아 자기를 무력하게 할 방법의 문턱까지 스스로 걸어갔습니다.
14절의 장면에는 사사기 독자에게 익숙한 그림자가 겹칩니다. 바디로 옮긴 말은 말뚝이나 핀을 뜻하며, 야엘이 잠든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은 장막 말뚝과 같은 낱말입니다(삿 4:21). 마이클 윌코크는 이 장면이 믿고 잠든 시스라를 배신해 죽인 야엘을 기분 나쁘게 떠올리게 한다고 말합니다. 잠든 장수와 말뚝을 든 여인, 그 구도가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사사를 향해 다시 그려집니다. 한때 이스라엘을 구원하던 장면이 이제는 구원자를 무너뜨리는 장면으로 뒤집히는 것입니다. 삼손은 잠에서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내고 일어납니다. 힘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는 왜 이런 질문을 계속하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습니다. 머리털이 원수의 도구에 짜여 들어갔는데도 아무 위기감이 없습니다. 이것이 한 걸음씩 들어오는 유혹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각 단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경고했습니다(약 1:14-15). 그러나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우리 주님은 매번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첫 걸음에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마 4:4). 그분 안에서 우리도 문턱 앞에서 돌아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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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신앙이 무너지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 번의 큰 배교보다 수많은 작은 양보가 더 많은 사람을 넘어뜨립니다. 주일 예배를 한 번 거르고, 기도를 하루 미루고, 양심이 불편한 일에 한 번 눈감는 사이에 우리의 머리털은 조금씩 세상의 베틀에 짜여 들어갑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힘을 얻는 길도 거창한 개혁 구호보다 이런 작은 문턱에서 돌아서는 성도들이 많아지는 데 있을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작은 순종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교회, 첫 걸음에서 멈추는 법을 함께 배우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나에게 들릴라의 질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고 날마다 부드럽게 묻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가정의 경제 문제에서, 자녀 교육의 욕심에서, 일터의 성과 경쟁에서 그 목소리는 조금씩 더 깊은 것을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엡 4:27). 틈은 처음에는 머리털 한 가닥만큼 작습니다. 그 작은 틈을 오늘 성령께 맡기고, 내가 누구의 사람인지 다시 기억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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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성문을 뽑을 만큼 큰 힘을 주셨어도
그 힘이 부끄러운 밤을 덮지 못함을
오늘 저희가 깨닫습니다.
은사를 곧바로 거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면죄부로 삼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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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삼십에 팔리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신 주 예수님,
모든 것에 값을 매기는 세상에서
저희의 구별됨을 흥정하지 않게 하시고
값으로 살 수 없는 그 사랑을
삶으로 증언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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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처럼 시작된 유혹 앞에서
경고의 줄을 끊어 보이시는
성령 하나님,
방 안에 숨은 위험을 보게 하시고
첫 번째 끊어진 줄 앞에서
일어나 그 방을 나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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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문턱으로 다가가는
저희의 발걸음을 멈추어 주시고
세상의 베틀에 짜여 들어가던
작은 믿음의 머리털 한 가닥까지
주님의 손으로 거두어 지켜 주옵소서.
광야에서 말씀으로 이기신 주님처럼
첫 걸음에서 돌아서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