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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09:46-57 언약의 신 신전에 숨다, 손에 익은 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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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겜이 헐렸다는 소식을 들은 세겜 망대 사람들이 언약의 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숨어듭니다(46-47절). 아비멜렉은 살몬 산에 올라 도끼로 나뭇가지를 찍어 어깨에 메고 자기를 따라 하라 명하고, 백성이 그대로 행하여 보루 위에 나뭇가지를 쌓고 불을 놓으니 남녀 약 천 명이 다 죽습니다(48-49절). 여세를 몰아 데베스로 간 그는 성읍 중앙 견고한 망대의 문을 불사르려 다가섭니다(50-52절). 그때 망대 꼭대기에 있던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고, 그는 여자에게 죽었다는 말을 피하려 무기 든 청년의 칼을 청해 숨을 거둡니다(53-55절). 화자는 이 모두가 하나님이 갚으신 일이요 요담의 저주가 응한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56-5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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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아비멜렉은 종일토록 세겜을 쳐서 점령하고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이야기가 거기서 끝났다면 악인이 이긴 장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하루의 다음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요담이 그리심 산에서 외친 두 마디,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을 사르고 세겜에서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르리라 한 말이 차례로 이루어집니다. 앞의 절반은 사람의 손이 이루고, 뒤의 절반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손이 이룹니다.

# 세겜 망대는 세겜과 이어진 별도의 거점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세겜 성은 이미 헐렸기 때문입니다. 그곳 사람들이 숨어든 보루는 히브리 말 츠리아흐를 옮긴 것으로, 사무엘상 열세 장에서는 은밀한 곳으로, 새번역에서는 지하 동굴로 옮겼습니다. 엘브릿은 언약의 신이라는 뜻이며 바알브릿 신전과 같은 곳으로 봅니다. 그들이 포도주를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 사사기는 예언서가 아니라 내러티브입니다. 화자는 설명 대신 장면과 낱말을 놓아 우리가 판단하게 합니다. 아홉 장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처음 시도된 왕정의 기록이며 그 결말이 오늘 본문입니다. 다른 사사들의 이야기 끝에 붙던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는 문장이 아비멜렉에게는 없습니다. 왕이라 불렸어도 참된 사사인 적이 없었다는 화자의 판결입니다.

# 오늘 본문의 맷돌은 우리가 아는 둥근 두 짝 맷돌이 아닙니다. 그 시절 이스라엘의 맷돌은 넓고 길쭉한 아래짝 위에 밀대 모양의 위짝을 굴려 곡식을 빻는 것이었습니다. 아래짝은 사십오 킬로그램에 이르기도 했으나 위짝은 이삼 킬로그램 정도였고, 일하는 사람의 손에 맞는 모양으로 다듬어졌습니다. 여인이 망대 꼭대기까지 들고 올라갈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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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47절 언약의 신 신전의 보루

하나님은 이름에만 언약을 새긴 것들 뒤에 사람을 숨겨 주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참으로 피할 곳은 장소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심을 끝내 벗겨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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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삿 9: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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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들이 숨은 자리의 이름을 보아야 합니다. 보루로 옮긴 츠리아흐는 적의 공격을 막으려 튼튼히 쌓은 구조물을 뜻하지만, 같은 말이 사무엘상 열세 장에서는 은밀한 곳으로 옮겨졌고 새번역은 지하 동굴로 풀었습니다. 신전 안의 은밀한 내실쯤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장면은 성벽 위에 올라가 싸우려는 사람들의 그림이 아닙니다. 가장 깊고 어두운 데로 파고드는 사람들의 그림입니다. 더 눈에 걸리는 것은 신의 이름입니다. 엘브릿, 곧 언약의 신입니다. 세겜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이 곧 안전보장이었습니다. 언약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 지켜 주시리라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전은 그들이 얼마 전 잔치를 벌인 자리였습니다. 밭에서 포도를 거두어다 밟아 짜서 그 신당에 들어가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했던 곳입니다. 저주를 쏟아 놓았던 방으로 저주받은 자를 피해 들어간 셈입니다. 화자가 두 번 연달아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라고 적은 것도 그냥 지나칠 대목이 아닙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들어갔다는 말이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알려졌다는 말입니다. 숨는다는 것이 얼마나 얇은 일인지를 두 절 안에서 보여 줍니다. 그들이 택한 신은 그들을 가려 주지 못했고, 그들이 세운 왕은 그들을 찾아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이름만 언약인 것들 뒤에 사람을 숨겨 주지 않으십니다. 언약이라는 낱말을 간판으로 걸었어도 그 안에 언약의 하나님이 안 계시면 그것은 벽이 아니라 종이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라 노래하고, 잠언은 여호와의 이름이 견고한 망대라 하여 의인이 그리로 달려가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피난처가 장소가 아니라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벽은 두꺼울수록 안전해 보이지만, 안에 계신 분이 없으면 두께가 곧 관이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은 광야에서도 지붕 아래 있는 것처럼 잠이 듭니다. 훗날 그 한 분은 스스로 피할 곳이 없는 자리로 나아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아 우리의 영원한 은신처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숨겨 주려고 자기를 드러내 놓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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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오랫동안 튼튼한 것을 많이 세웠습니다. 건물과 제도와 조직이 촘촘해졌고 그 위에 언약과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흔들리는 때가 오면 우리가 달려가는 곳이 어디인지를 정직하게 보아야 합니다. 이름은 언약인데 실상은 사람의 세력이고, 이름은 복음인데 실상은 여론이었던 자리가 없었는지 물어야 합니다. 세겜 사람들의 비극은 신을 안 믿은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신을 좋은 이름으로 불렀다는 데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한 가지만 헤아려 보십시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내 마음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통장입니까, 사람입니까, 내 경력입니까, 아니면 무릎입니까. 그 첫 방향이 내 실제 피난처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피난처와 발이 먼저 달려가는 피난처가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신앙의 자라남입니다. 그리고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은밀한 내실에서 끌어내시는 일까지 하십니다. 그것은 벌이 아니라 진짜 피난처로 옮겨 주시려는 손길입니다. 무너져 본 자리에서만 보이는 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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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49절 나와 같이 행하라

하나님은 지도자의 한 몸짓이 백성의 손으로 번져 가는 것을 다 보고 계시는 분이시며, 따라 하게 만드는 그 힘이 사람을 살리는 쪽인지 죽이는 쪽인지 반드시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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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그것을 들어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그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삿 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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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읽다가 멈추어야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두 장 앞에서 똑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진영을 치러 내려가던 밤에 기드온은 삼백 명에게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문장을 그대로 씁니다. 몸짓까지 닮았습니다. 기드온은 항아리와 횃불을 들었고 아비멜렉은 도끼와 나뭇가지를 들었습니다. 기드온은 불을 들어 백성을 구하려 했고 아비멜렉은 불을 놓아 백성을 죽이려 합니다. 명령은 같고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화자는 한 줄의 평가도 붙이지 않고 두 장면을 나란히 놓아 우리가 보게 합니다.

백성의 반응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모든 백성들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놓았습니다. 각각이라는 말이 무섭습니다. 명령을 내린 손은 하나였지만 나뭇가지를 얹은 손은 수백이었습니다. 불을 놓은 것은 아비멜렉이나, 불이 붙을 만큼 땔감을 쌓아 올린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손이었습니다. 그렇게 남녀 약 천 명이 죽었습니다. 화자가 숫자를 적어 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천 명은 셀 수 있는 숫자이면서 한 사람씩 세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입니다. 악이 가장 크게 자라는 자리는 한 사람의 광기가 여러 사람의 손을 얻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선명해집니다. 요담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들을 사르리라 했던 그 말이 여기서 글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저주가 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악을 악의 성질 그대로 자라게 놓아두시면 악은 반드시 자기를 세운 손까지 태운다는 것이 드러나서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말투와 몸짓은 물려받았으나 그 말의 속뜻은 물려받지 못한 아들이 여기 있습니다. 신앙의 어법은 세습되지만 신앙은 세습되지 않습니다. 참된 목자는 나를 따라 하라고 하신 뒤 십자가로 먼저 가신 분입니다. 그 뒤를 따르는 손에는 도끼가 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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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하게 만드는 힘은 지도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있고 선배에게 있고 먼저 믿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다음 세대 앞에서 가장 아프게 물어야 할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따라 하게 했습니까. 기도하는 자리를 따라 하게 했다면 다행이고, 이기는 법과 셈하는 법을 먼저 보여 주었다면 그것이 그대로 번졌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설교를 기억하지 않고 어른의 손을 기억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는 내 손이 무엇을 들고 있는지 한 번 보아 주십시오. 집에서 아이가 보고 있고 일터에서 후배가 보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어깨에 메고 앞서 걷고 있습니까. 그리고 반대쪽도 살펴 주십시오. 지금 내가 누군가를 따라 나뭇가지를 얹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모두가 하는 일이라서, 분위기가 그래서, 나 하나쯤이야 하면서 얹은 가지가 불이 됩니다. 각각 얹었다는 말에서 나를 빼지 말아야 합니다. 따르는 일에도 분별이 필요하고, 멈추는 것도 순종입니다. 여럿이 가는 길에서 혼자 손을 내려놓는 용기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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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53절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를 무기고에서 새로 꺼내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이미 누군가의 손에 익은 하루치 살림살이로 교만한 머리를 꺾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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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삿 9:51).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삿 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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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베스는 아비멜렉을 배반한 적이 없는 성읍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거기로 갑니다. 경계를 넓히려는 것입니다. 목적을 이룬 뒤에도 멈추지 못하는 손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화자가 보여 줍니다. 그리고 세겜에서 통했던 방법을 그대로 반복합니다. 망대 문에 다가가 불을 지르려는 것입니다. 히브리 원문은 성읍 중앙에라는 말을 문장 맨 앞에 놓아 망대의 위치를 먼저 세워 둡니다. 견고한 망대, 잠긴 문, 꼭대기로 올라간 남녀. 무대가 위와 아래로 갈립니다. 아비멜렉은 아래에 있고 사람들은 위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위에 있는 쪽이 이기는 장면은 대개 사람의 힘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맷돌을 알아야 이 장면이 보입니다. 그 시절 이스라엘의 맷돌은 넓고 길쭉한 아래짝 위에 밀대 모양의 위짝을 앞뒤로 굴려 곡식을 빻는 것이었습니다. 아래짝은 사십오 킬로그램에 이르기도 했지만 위짝은 이삼 킬로그램 정도였고,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의 손에 맞는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날마다 식구의 끼니를 위해 잡던 그 돌입니다. 그것이 망대 꼭대기까지 올라온 까닭은 피난하면서 살림 도구를 챙겨 올라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챙기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먹을 것을 만드는 도구입니다. 그 하루치 살림살이가 그날 성읍을 살렸습니다.

낱말 둘이 이 장면에 도장을 찍습니다. 깨뜨리다로 옮긴 라차츠는 약한 이를 짓누르는 압제자의 폭력을 그릴 때 쓰이는 말입니다. 사사기 열 장과 아모스 네 장이 그렇게 씁니다. 압제자가 사람들에게 하던 그 동작이 그의 두개골에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 여인은 이샤 아하트입니다. 이샤만으로도 한 여인인데 하나를 뜻하는 아하트를 덧붙였습니다. 아홉 장 앞머리에서 아비멜렉이 형제 칠십 명을 죽인 곳이 한 바위 위, 에벤 아하트였습니다. 한 바위에서 시작한 일이 한 돌로 끝납니다. 야엘이 장막 말뚝을 들었듯 이 여인은 맷돌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엌의 것으로 왕의 머리를 꺾으시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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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우리 손에 있는 것을 다시 보게 합니다. 한국교회는 큰 것을 준비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오래 배웠습니다. 사람이 모여야 하고 예산이 있어야 하고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신 것은 무기고의 칼이 아니라 한 여인의 맷돌이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십시오. 밥을 짓는 손, 운전대를 잡는 손, 장부를 적는 손, 환자를 씻기는 손, 아이의 숙제를 봐 주는 손입니다.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그 하루치 도구가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한 성읍을 살립니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다음에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숙한 것을 그분 앞에 내어 드릴 때 쓰임받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이름이 성경에 없다는 것도 함께 새겨 주십시오. 아버지도 남편도 적히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남기려고 던진 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귀한 일들은 대개 이름이 남지 않습니다. 남지 않아도 하늘의 장부에는 적힙니다. 이름 없이 던진 돌 하나가 역사를 바꾸는 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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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57절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하나님은 사람이 감추려 애쓴 수치까지 역사에 고스란히 남기시는 분이시며, 주동자와 동조자를 함께 세워 각자의 머리에 그 값을 돌려주시는 공의의 재판장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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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삿 9:54).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삿 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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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네 절은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참 정직하게 적습니다. 두개골이 깨진 사람이 급히 불러서 한 말이 살려 달라가 아닙니다. 소문이 어떻게 날지에 대한 말입니다. 그가 끝까지 지키려 한 것은 목숨이 아니라 체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자기 입으로 하는 순간, 그는 자기 죽음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를 스스로 밝히고 맙니다. 화자는 이 말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더 뼈아픈 것은 뒷날의 기억입니다. 다윗 시대에 성벽 아래 서지 말라는 교훈을 전하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인이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의 위에 던지므로 그가 죽었다고. 감추려 한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이름표가 되었습니다.

쉰여섯 절과 쉰일곱 절에서 화자는 처음으로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꿉니다. 갚으셨다로 옮긴 말은 돌려주셨다에 가깝습니다. 아비멜렉의 악행을 그에게 돌리시고,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그들의 머리에 돌리셨습니다. 두 번 되풀이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칼을 든 사람만이 아니라 칼값을 댄 사람도 셈에 들어 있습니다. 세겜 사람들의 죄를 화자는 특정한 한 가지 행동으로 적지 않고 모든 악행이라고 뭉쳐 적습니다. 골육이라는 이유로 부적격자를 왕으로 세우고, 사람을 죽여 가며 그 일에 손을 빌려주고, 얼마 뒤 새 사람에게 마음을 옮기던 일련의 행동이 모두 악으로 계산된 것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요담의 저주가 응했다고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순서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갚으셨다는 말이 먼저 오고 저주가 응했다는 말이 뒤에 옵니다. 사람의 말이 힘이 있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셨기에 그 말이 참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아비멜렉 이야기에는 다른 사사들의 이야기에 꼭 붙던 한 문장이 없습니다.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는 말입니다. 왕이라 불렸어도 그는 한 번도 참된 사사인 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정 실험은 이렇게 완전한 실패로 끝납니다. 참 왕은 제 머리를 지키려 남을 죽인 이가 아니라, 남을 살리려 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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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갚으신다는 말은 무서운 말이면서 가장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억울한 사람에게는 위로이고 손에 무엇을 묻힌 사람에게는 두려움입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세월 겪은 일들 앞에서 우리는 자주 셈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멀쩡하고 상한 사람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셈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재고 계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억울한 일이 있으시면 그것을 내 손으로 갚으려 하지 말고 그분 앞에 그대로 놓아 두십시오. 갚으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갚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반대쪽도 함께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감추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아비멜렉이 마지막까지 붙든 것은 남들이 뭐라 할까였습니다. 사람의 평판을 하나님의 판결보다 무겁게 여길 때 우리는 그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감추는 데 쓰는 힘을 고백하는 데 쓰면 훨씬 가벼워집니다. 오늘 하루 우리 집과 우리 일터에서 셈은 하나님께 맡기고 정직은 내 몫으로 삼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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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이름만 언약인 것들 뒤에 우리를 숨기지 않으시니 감사합니다.

무너져 본 자리에서만 보이는 그 문을 오늘 찾게 하소서.

피난처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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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하게 하는 힘을 주셨거든 살리는 쪽으로만 쓰게 하소서.

아이가 보고 있고 후배가 보고 있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여럿이 가는 길에서도 손을 내려놓을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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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고를 열지 않으시고 부엌의 것을 쓰시는 주님,

오늘 제 손에 익은 것을 그대로 받아 주소서.

이름이 남지 않는 일을 기꺼이 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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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으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갚지 않아도 됩니다.

억울한 셈을 주님께 맡기고 감추는 데 쓰던 힘을

고백하는 데 쓰게 하소서.

가시관을 쓰신 참 왕을 따라 낮은 자리에서 섬기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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