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12-28 그 사사이신 여호와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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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르앗의 머리가 된 입다는 칼보다 먼저 사자를 보내 왜 내 땅을 치러 왔느냐고 묻고, 암몬 왕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아르논에서 압복과 요단까지 자기 땅을 점령했으니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요구합니다(12-13절). 입다는 다시 사자를 보내 이스라엘이 에돔과 모압 땅을 돌아서 갔고, 먼저 싸움을 걸어온 아모리 왕 시혼의 땅만 여호와께서 넘겨주셨다고 옛길을 되짚습니다(14-22절). 이어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네가 얻으려는 것이 옳으냐, 발락도 다투지 않았고 너희는 삼백 년 동안 찾지 않았다고 논박합니다(23-26절). 그는 심판하시는 여호와께 판결을 맡기지만 암몬 왕은 끝내 듣지 않습니다(27-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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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입다는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고 길르앗의 머리와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된 그가 처음 한 일은 군대를 모으는 일이 아니라 사자를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사사기에 수많은 싸움이 나오지만, 칼을 들기 전에 이렇게 길게 말로 따지는 장면은 여기 한 곳뿐입니다. 쫓겨난 용사가 뜻밖에 외교관의 얼굴로 등장합니다.
# 다툼의 대상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 땅입니다. 남쪽으로는 아르논 골짜기, 북쪽으로는 압복 강, 서쪽으로는 요단, 동쪽으로는 광야가 그 경계였습니다. 이 땅은 본래 아모리 왕 시혼이 다스리던 곳으로, 출애굽 세대가 광야 끝에서 차지하여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준 땅입니다(민 21:21-35). 암몬은 그 동쪽, 압복 상류의 랍바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에 앞서 사신을 주고받으며 상대의 잘못을 따지고 자기 쪽의 명분을 세우는 일이 흔했습니다. 이 논쟁은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제 편의 사기를 높이고 싸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또 땅의 참 주인은 신이며, 신이 준 땅이라야 소유가 보장된다고 여겼습니다. 입다의 논박은 이런 세계 안에서 오갑니다.
# 입다가 되짚는 역사는 민수기 20-21장과 신명기 2장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따릅니다. 가데스에서 머문 일부터 야하스 싸움까지 순서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에돔과 모압과 암몬의 땅은 기업으로 주지 않으셨으니 다투지 말라고 분명히 이르셨습니다(신 2:5, 9, 19). 입다가 그 오래된 길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본문의 첫 번째 놀라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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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3절 누구의 땅인가
하나님은 사람들이 서로 내 땅이라 부르며 다투는 그 땅의 참 주인이시며, 우리를 잠시 머무는 거류민으로 그 위에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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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압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삿 1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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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된 입다의 첫 문장은 물음입니다.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원문은 네게와 내게 사이에 무엇이 있느냐는 짧은 관용구로, 우리 사이에 다툴 일이 무엇이냐는 뜻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께서 어머니께 하신 말씀에도 같은 꼴의 표현이 쓰였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다음입니다. 입다는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고 말합니다. 그는 왕이 아니었지만 왕과 같은 자리에서 말을 시작하고, 길르앗을 내 땅이라 부르며 암몬의 공격을 자기에 대한 공격으로 받습니다. 어제까지 돕 땅의 변방에 살던 사람이 오늘은 한 나라의 주인처럼 말합니다.
암몬 왕의 대답도 똑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아르논에서부터 압복과 요단까지, 내 땅이다. 한 땅을 두고 두 사람이 모두 내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내세운 근거는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그 땅을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점령으로 옮긴 라카흐는 힘으로 붙잡아 가져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덧붙입니다. 평화라는 말이 칼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싸움을 걸어 놓고 평화를 요구하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날 선 위협입니다. 잘못 기억된 역사가 힘을 얻으면 이렇게 남의 땅을 제 땅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입다도 암몬 왕도 내 땅이라 말하지만 성경은 그 땅의 주인이 따로 계시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길르앗에 산 것은 그 땅을 붙잡아서가 아니라 주인께서 머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하나님의 백성도 암몬 왕과 같은 말투를 배웁니다. 예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마 5:5). 땅은 움켜쥔 사람이 아니라 주인께 맡긴 사람에게 머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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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오래 내 교회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애정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 말이 소유의 말이 되는 순간 다툼이 시작됩니다. 예배당과 부지와 재산을 두고 법정에 선 교회들의 이름을 우리는 적지 않게 기억합니다. 모두가 자기 몫이라고 말했고, 모두가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들 위에 조용히 한 문장을 올려 둡니다. 땅은 다 내 것이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지금 누리는 예배의 자리와 모임의 공간도 우리가 붙잡은 것이 아니라 주인께서 잠시 맡기신 것입니다. 개인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직장의 자리, 가정 안의 몫, 교회 안의 역할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라는 말이 먼저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이 입에 오르기 전에 이렇게 여쭈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것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 물음을 품은 사람은 자기 자리를 지키되 움켜쥐지 않고, 내어 주어야 할 때 덜 아파합니다. 거류민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땅 위에서 참으로 평화롭게 머뭅니다. 암몬 왕이 요구한 평화는 빼앗는 평화였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내려놓는 데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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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2절 되짚어 간 광야 길
하나님은 당신이 백성을 위해 하신 일을 역사 속에 또렷이 새겨 두시고, 그 기억으로 백성의 오늘을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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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당신의 땅으로 지나 우리의 곳에 이르게 하라 하였으나 시혼이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의 지역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을 모아 야하스에 진 치고 이스라엘을 치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매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그 땅 주민 아모리 족속의 온 땅을 점령하되"(삿 1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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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는 다시 사자를 보내며 입다가 이같이 말하노라고 운을 뗍니다. 이 말투는 예언자들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노라고 선포할 때의 형식을 빌린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 말에 무게를 싣습니다. 그리고 긴 역사를 풀어 놓습니다. 애굽에서 올라와 광야를 지나 가데스에 이른 일, 에돔 왕에게 길을 청했으나 거절당한 일, 모압 왕도 허락하지 않아 가데스에 머문 일, 두 나라의 땅을 돌아 아르논 저쪽에 진 친 일, 헤스본 왕 시혼에게 길을 청한 일까지 차례대로 짚습니다. 민수기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따르는 정확한 기억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 변방에서 살던 사람이 이스라엘의 옛이야기를 이토록 품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 이야기의 뼈대는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은 빼앗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5절은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21-22절은 아모리 족속의 온 땅을 점령하였다고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같은 점령이지만 원문은 다른 낱말입니다. 15절의 점령은 암몬 왕이 쓴 라카흐, 곧 힘으로 빼앗았다는 말이고, 21-22절의 점령은 야라쉬, 곧 차지하다, 기업으로 얻다는 말입니다. 입다는 낱말 하나로 역사의 결을 바로잡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돔과 모압을 칠 수 있었지만 돌아서 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지 않으신 땅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시혼과의 싸움은 시혼이 먼저 야하스에 진을 치고 걸어온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긴 서술의 주어가 바뀌는 한 곳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매. 이스라엘이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전리품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신명기는 거듭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에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 8:2).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일을 백성이 잊지 않도록 이야기로 남기시고, 그 이야기가 훗날 백성의 땅을 지키는 방패가 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떡을 떼시며 나를 기념하라 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교회는 기억하는 공동체이고, 바르게 기억하는 동안 흔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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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는 되짚어야 할 옛길이 많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받은 은혜가 있고, 가난한 이웃과 함께 울던 시절이 있습니다. 동시에 부끄럽게 되짚어야 할 길도 있습니다. 은혜만 기억하고 잘못은 지우는 기억은 암몬 왕의 기억처럼 제 편에 유리한 이야기만 남깁니다. 입다가 거절당한 일과 돌아간 길까지 빠짐없이 말했듯이, 우리도 받은 은혜와 저지른 잘못을 함께 기억할 때 바른 역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 잠시 멈추어 내가 걸어온 광야 길을 되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돌아서 가야 했던 길, 막혔던 문, 뜻밖에 열린 땅이 있을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명절에 가족이 모이거든 하나님이 우리 집안에 행하신 일을 한 가지씩 이야기해 보십시오. 자녀와 손주들이 그 이야기를 한 번 들으면 남의 이야기로 듣지만, 해마다 들으면 자기 이야기로 듣게 됩니다. 되짚어 들려준 옛길은 다음 세대가 걸어갈 새 길이 됩니다. 이야기를 잃은 공동체는 암몬 왕의 억지 앞에서도 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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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6절 주신 땅, 기다린 삼백 년
하나님은 선물로 주신 것을 끝까지 선물로 지키시며,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시는 유일하신 주권자로서 우리의 좁은 이해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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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삿 11: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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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절에서 입다의 논박은 역사에서 신학으로 넘어갑니다. 여호와께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 여기서 얻고자 한다는 말이 앞에서 본 야라쉬입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네가 기업으로 삼으려 하느냐는 물음입니다. 원문은 네가라는 말을 앞세워 감히 네가라는 어감을 살립니다. 땅의 소유가 싸움의 승패나 먼저 산 사람의 권리로 정해지지 않고, 주신 분의 뜻으로 정해진다는 고백입니다. 입다는 암몬 왕이 알아듣는 말로 이것을 풀어 갑니다. 네 신이 준 땅은 네가 차지하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이 주신 땅은 우리가 차지하겠다.
그런데 여기 걸리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모스는 모압의 신이고, 암몬의 신은 밀곰이었습니다(왕상 11:5, 7). 입다가 몰라서 틀렸는지, 모압과 암몬을 한데 묶어 일부러 비꼬았는지는 의견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이 문장에는 입다의 신앙이 가진 틈이 드러납니다. 그는 여호와를 여러 민족의 신들 가운데 하나처럼 나란히 세워 말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노래는 다르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 32:8). 경계를 정하시는 분은 한 분뿐입니다. 이 틈은 곧 이어지는 서원에서 더 크게 벌어져, 그모스의 방식으로 여호와께 무언가를 바치려는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25-26절에서 입다는 선례와 세월을 들어 마무리합니다.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도 이스라엘과 다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발락은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지만 오히려 축복을 들어야 했습니다(민 22-24장).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산 지 삼백 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왜 찾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이 수는 사사기의 연대를 대략 합한 둥근 수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셈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긴 세월을 지켜 오신 분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넘어지고 부르짖기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주신 땅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받는 이의 신실함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신실함에 기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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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오래 쥐고 있으면 소유처럼 느껴집니다. 한국교회가 받은 부흥도, 한 사람이 받은 은사도, 한 가정이 누리는 평안도 처음에는 감사의 제목이었다가 어느새 당연한 권리가 되곤 합니다. 그러다 누가 그것을 건드리면 우리는 내 땅을 지키는 사람처럼 날을 세웁니다. 오늘 본문은 선물을 지키는 가장 좋은 길이 그것을 주신 분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우리도 입다처럼 하나님을 여러 가치들 가운데 하나로 말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돈과 성공과 건강과 나란히 하나님을 한 칸에 세워 두고, 필요할 때마다 그 칸을 여는 신앙은 그모스를 섬기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받은 것들을 소유가 아닌 선물로 여길 때,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내 손에 있는 것 하나를 들고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이것은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 고백이 입술에 익은 사람은 잃을 때도 원망보다 감사를 먼저 찾습니다. 삼백 년을 지켜 주신 신실하심이 오늘 내 손의 작은 것도 지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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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28절 그 사사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말이 다 끝나 더는 설득할 길이 없는 자리에서도 공의로 판결하시는 유일한 참 사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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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였으나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삿 11: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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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논박의 끝에서 입다는 두 사람을 맞세웁니다.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문은 나와 너를 가리키는 말을 각각 앞세워 대조를 또렷하게 합니다. 여기서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은 이웃 나라 사이의 약속과 관례를 어긴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다툼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판결하시옵소서. 이 문장을 원문대로 옮기면 그 사사이신 여호와께서 사사로 다스리소서가 됩니다. 사사라는 말에 정관사가 붙어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참된 사사이심을 드러냅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사사라는 칭호가 하나님께 붙는 곳은 여기뿐입니다.
이 고백은 사사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을 담고 있습니다. 옷니엘과 에훗과 드보라와 기드온이 차례로 일어났다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을 참으로 다스리고 판결하신 분은 여호와 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옳은 고백이 하필 입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싸움에서 이기면 길르앗의 머리가 되기로 약속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판결을 맡긴다는 말은 이기면 하나님이 내 손을 들어 주신 것이 된다는 계산과도 겹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옳은 말을, 그것도 가장 신앙적인 말을 자기 목적에 쓸 수 있는 존재입니다. 판결을 맡긴 이 사람이 곧 서원으로 판결을 사려 한다는 사실이 이 고백 위에 그늘을 드리웁니다.
28절은 짧고 차갑습니다. 암몬 왕은 듣지 아니하였더라. 그 정확한 역사와 날카로운 논리가 한 사람의 마음도 돌리지 못했습니다. 말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입다가 한 말의 참됨을 지우지는 않습니다. 참 사사이신 분은 논쟁에서 이긴 사람의 편이 아니라 공의의 편에 서십니다. 그 공의가 가장 깊이 드러난 곳은 십자가입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께서는 옳은 말로 이기려 하지 않으시고 판결을 아버지께 맡기셨고, 그렇게 참 사사의 판결이 부활로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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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옳음을 두고 다투는 시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누가 옳은지를 가리는 싸움이 길어지고, 말은 날카로워지는데 듣는 귀는 점점 닫힙니다. 한국교회가 세상 앞에서 잃은 것도 논리가 아니라 듣게 하는 삶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함께 가르칩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해야 합니다. 입다처럼 사실을 바로 세우고 억지에는 바른 지식으로 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이 다 끝난 자리에서는 판결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요즘 억울한 일로 마음이 끓는 분이 계시다면 할 말을 다 하시되, 마지막 한 문장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십시오. 주님, 판결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판결을 내 계산대로 앞당기려 하지 마십시오. 또 우리가 아는 가장 옳은 말이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무기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판결을 맡긴 사람은 상대가 듣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참 사사께서 그 사이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판결은 늦어 보여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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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사람마다 내 땅이라 부르며 다투는
이 세상의 모든 땅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거류민으로 세우셔서
주님과 함께 머물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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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길을 걷게 하신 날들을
토씨 하나 흐리지 않고 기억하게 하소서.
받은 은혜와 저지른 잘못을
함께 되짚는 정직을 주소서.
명절에 모인 식탁마다
주님이 행하신 이야기가 오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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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로 받은 것을
내 것이라 움켜쥐지 않게 하소서.
주님을 여러 가치 가운데 하나로
한 칸에 세워 두지 않게 하소서.
경계를 정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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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말을 하되
무기로 삼지 않게 하소서.
말이 다 끝난 자리에서
판결을 주님께 맡기게 하소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자신을 부탁하신
예수를 따라 오늘을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