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3:01-14 부르짖음이 빠진 사십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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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사십 년 동안 블레셋의 손에 넘겨집니다. 사사기 내내 되풀이된 자리이지만 이번에는 부르짖음이 없습니다(1절). 그 침묵 속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소라 땅 마노아의 아내를 찾아와, 태에서부터 나실인이 될 아들의 출생과 그가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을 알립니다(2-5절). 남편에게 그 말을 전한 아내의 전갈에 마노아는 우리에게 다시 오셔서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은 그 목소리를 들으시되 사자를 다시 밭에 있는 아내에게 보내십니다(6-10절). 사자는 아내가 지킬 규례를 한 번 더 일러 줍니다(1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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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본문은 나루턱에서 형제를 검문하던 이야기로 끝났습니다. 입다 뒤에 온 세 사사는 자녀와 나귀의 수만 남기고 지나갔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말은 한 번도 적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뒤를 이어 마지막 사사의 이야기를 엽니다. 그런데 시작이 낯섭니다. 앞선 순환마다 나왔던 부르짖음이 이번에는 없습니다. 압제는 가장 길고 백성의 입은 가장 조용한 자리에서 삼손 이야기가 열립니다.
블레셋은 에게 해 쪽에서 건너온 해양 민족으로, 가나안 남서쪽 해안의 다섯 성읍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철기를 다루는 기술과 조직된 군사력을 가진 강한 이웃이었습니다. 마노아가 살던 소라는 소렉 골짜기에 있던 성읍으로, 블레셋 평야와 맞닿은 접경지였습니다. 단 지파는 분배받은 기업을 끝내 다 차지하지 못했고(1:34), 이 가정은 압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겪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에게 하늘의 전갈이 찾아와 아들을 약속받는 이야기는 성경이 되풀이하는 틀입니다. 사라와 리브가와 한나가 그러했고, 뒷날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그 자리에 섭니다. 다만 이 본문에는 다른 이야기들과 뚜렷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른 여인들은 울며 간구한 끝에 응답을 받았으나, 소라 땅의 이 여인은 구한 적이 없습니다. 같은 틀 안에서 기도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표지입니다.
나실인은 일정 기간 자신을 구별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이름의 뿌리가 되는 히브리 말은 성별과 헌신을 뜻하고, 규례는 민수기 6장에 있습니다. 포도와 관련된 것을 먹지 않고, 머리를 자르지 않고, 주검에 닿지 않는 세 가지입니다. 본래는 기간이 끝나면 풀리는 서원이었으나,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그 신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스스로 택한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정하신 구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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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조용해진 사십 년
성부 하나님은 부르짖는 소리에 값을 매겨 구원을 파시는 분이 아니라, 부르짖는 법조차 잊은 백성을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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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삿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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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로 옮긴 말은 사사기가 되풀이해 쓰는 낱말입니다. 같은 죄를 또 지었다는 뜻이고, 같은 순환이 또 돌기 시작했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번 압제는 사십 년입니다. 사사기에 나온 압제 가운데 가장 깁니다. 메소보다미아는 여덟 해, 모압과 암몬은 열여덟 해, 미디안은 일곱 해였습니다. 기간의 길이가 그대로 죄의 깊이를 재는 자가 됩니다. 더 눈에 걸리는 것은 사십 년이라는 수가 이 책에서 지금까지 좋은 쪽에 붙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옷니엘 뒤에도(3:11), 드보라의 노래 뒤에도(5:31), 기드온의 날 동안에도(8:28) 그 땅은 사십 년을 잠잠했습니다. 평온을 재던 수가 이제 압제를 잽니다. 광야 사십 년이 한 세대가 바뀌는 길이였음을 떠올리면, 이 사십 년도 한 세대가 통째로 종살이 아래에서 자라났다는 뜻입니다. 압제를 겪은 세대가 아니라 압제만 알고 자란 세대가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환에는 빠진 것이 있습니다. 부르짖음입니다. 앞선 모든 순환에는 그 소리가 있었습니다(3:9, 15; 6:6; 10:10). 대개 훌륭한 회개는 아니었고 아파서 지르는 소리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향한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앞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뒷날 유다 사람들이 삼손에게 블레셋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하는 대목이 그 까닭을 알려 줍니다(15:11). 그들은 이 지배를 이미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통이 오래되면 질서가 되고, 질서가 된 고통에는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화자는 백성을 꾸짖지 않고 다만 부르짖음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비워 둡니다. 그 빈자리가 어떤 책망보다 날카롭습니다.
그 조용한 땅에 한 집이 소개됩니다. 소라 땅 단 지파의 마노아입니다. 이 이름에는 안식, 쉴 자리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이라는 이름의 집에 대를 이을 아이가 없습니다. 이름과 형편이 어긋난 그 집은 그대로 이스라엘의 초상입니다. 게다가 이 부부도 부르짖지 않습니다. 실로에서 아이를 달라고 통곡했던 한나와는 다릅니다(삼상 1:10-11). 땅도 조용하고 그 집도 조용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구원은 부르짖음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 긍휼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이 이 순서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롬 5:8). 사사기는 여기서 자기 안의 논리를 스스로 깨뜨립니다. 부르짖으면 구원자가 온다는 공식이 아니라, 부르짖지 않아도 오시는 분이 계시다는 고백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크기가 아니라 당신의 약속에 맞추어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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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신앙의 상태는 죄를 짓는 상태가 아니라 죄를 짓고도 아프지 않은 상태입니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여러 문제를 지적받아 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지적에 무감각해졌습니다. 세상의 비판에 익숙해지고, 교회 안의 상처에 익숙해지고, 응답 없는 기도에 익숙해졌습니다. 익숙해진 것을 우리는 종종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견딜 만해졌다는 말이 실은 포기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때가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부르짖음은 믿음이 좋은 사람의 특별한 기도가 아니라, 아직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기도 목록을 한번 꺼내 보십시오. 언제부터 올리지 않게 된 항목이 있습니까. 그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대를 접었기 때문인지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래된 갈등은 어느새 그 집의 공기가 되어 아무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일터에서도 부당한 일이 오래 반복되면 문제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 무감각을 깨는 첫걸음이 소리 내어 아뢰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세련된 기도보다 살아 있는 신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붙들면 좋겠습니다. 내 입이 닫혀 있던 세월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십 년 동안 조용했던 그 땅에서도 하나님은 한 가정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오래 기도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다시 기도하기를 미루는 분이 있다면, 그 미룸을 오늘 끝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입을 열기 전부터 이미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중 한 번은, 잘 다듬은 문장이 아니어도 좋으니 마음에 걸린 그 한 가지를 소리 내어 아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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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절 태에서부터 구별된 아이
성령 하나님은 사람이 청하기 전에 먼저 오셔서, 닫힌 자리에 새 생명과 구별된 삶의 길을 함께 두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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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삿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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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가 찾아간 사람은 마노아가 아니라 그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끝까지 이름이 적히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 이름 없이 등장하는 여인들은 대개 희생당하는 자리에 놓이지만, 이 여인은 말씀을 가장 먼저 받고 가장 정확하게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사자의 첫마디는 그녀의 형편을 그대로 부릅니다. 본래 임신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먼저 하고 이제 임신하리라는 말을 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막힌 자리를 덮지 않으시고 먼저 정확히 이름 부르신 뒤에 그 위에 약속을 놓으십니다. 부르짖음이 없던 땅에서 먼저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이 오셨는데 그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 심히 두려웠다고 남편에게 말합니다(13:6). 두려워할 자리에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정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자기가 누구 앞에 섰는지는 알았습니다.
명령의 순서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어머니가 먼저 포도주와 독주와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 하고, 그다음에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이 옵니다. 태에서 나옴으로부터라고 옮긴 말은 태중에서부터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가 아니라 어머니의 몸 안에 있을 때부터 구별된 자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식탁이 곧 아이의 첫 훈련이 됩니다. 포도주를 금하고 머리를 자르지 못하게 한 것은 금욕이 아니라 가나안의 잔치 문화와 풍속을 닮지 않겠다는 표지였습니다. 구원의 도구로 쓰일 사람에게 먼저 요구된 것은 힘이 아니라 세상과 다른 결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절제가 아이의 거룩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 둘을 한 문장 안에 굳이 이어 놓으셨습니다. 한 사람을 향한 계획은 그 사람 혼자가 아니라 그를 품은 가정과 함께 움직입니다.
그리고 사자는 놀라운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이 아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는 것입니다. 완성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 사십 년은 삼손이 사사로 지낸 스무 해에도 끝나지 않았고,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이 온전히 벗어난 것은 여러 세대 뒤 다윗의 날이었습니다(삼하 8:1). 하나님은 사십 년의 침묵을 단번에 지우지 않으시고 한 아기의 울음으로 실마리를 여십니다. 구원의 역사는 대개 이렇게 작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태에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이 아이의 이야기는, 뒷날 나사렛의 한 처녀에게 찾아온 수태고지에서 완성됩니다(눅 1:31-33). 시작하는 구원자 뒤에 끝내시는 구원자가 오십니다. 삼손은 태에서부터 구별되었으나 그 구별을 여러 번 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 실마리를 여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됨됨이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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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을 준비하시는 방식은 늘 우리 예상보다 이릅니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기도 전에, 문제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손을 대고 계십니다. 한국교회는 다음 세대가 줄어든다는 말을 오래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숫자를 세는 대신 한 가정의 식탁을 보게 합니다. 자녀를 위한 가장 중요한 교육은 훌륭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부모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게 사는 일이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가정마다 그 구별이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아이에게 무엇을 시킬지 고민하기 전에 내가 무엇을 내려놓을지를 먼저 정하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는 부모의 말보다 부모가 멀리하는 것을 보고 배웁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에 시간을 쓰는지가 그 집의 신앙을 만듭니다. 또한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결말을 보지 못하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시작하는 일은 하나님 손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작은 섬김, 오래 붙든 중보, 아직 열매가 보이지 않는 전도가 다 그렇습니다. 시작을 맡기신 분이 완성도 맡으실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께 한 가지 더 권합니다. 아이의 진로와 성적을 위한 기도만큼, 아이가 세상과 다른 결로 살아갈 힘을 구하십시오. 구별은 아이를 세상에서 떼어 놓는 일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없는 가정, 자녀를 기다리는 가정, 자녀를 먼저 보낸 가정의 마음도 이 본문 앞에서 함께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소라 땅의 조용한 한 집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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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4절 우리에게 가르쳐 달라던 기도
성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통제하려는 손을 내밀 때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이미 주신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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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삿 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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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의 기도에는 '우리'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행할지,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입니다. 아내가 전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도 그 자리에 있고 싶은 마음이 묻어납니다. 아내의 전갈이 이미 충분했는데도 그는 확인을 원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겹쳐 있습니다. 아내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한 의심과, 하나님의 일에서 밀려나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뒤쪽은 나쁜 마음이 아닙니다. 다만 그 바람이 자기를 크게 보는 데서 나온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그가 기도하는 동안 아내는 이미 말씀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하나님이 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어설픈 동기가 섞인 기도라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다만 들으시는 것과 우리가 원한 방식으로 주시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원한 방식으로 응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사자는 다시 왔지만 이번에도 밭에 있는 아내에게 먼저 임합니다. 화자는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하였다고 굳이 적어 둡니다. 마노아는 아내가 달려와 알려 주어야 비로소 그 자리를 알고, 아내를 '따라가서' 사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사자의 대답은 한 낱말입니다. "내가 그로다"(삿 13:11). 짧고 단호합니다. 하나님은 확인을 구하는 손을 꺾지 않으시고, 필요한 한마디로 의심을 끝내 주십니다. 응답은 왔지만 순서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마노아는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어떻게 행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원문은 그 아이가 지켜야 할 규례와 그가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문장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사자의 대답은 아이가 아니라 다시 아내를 향합니다.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삿 13:13-14).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문장의 주어는 모두 여성입니다. 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주신 말씀을 다시 들려주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을 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이미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참된 순종의 자리를 끝까지 보여 주신 분은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온전히 맡기신 그리스도이십니다(요 4:34). 그분은 이름을 묻는 자리에서도 자기를 설명하려 애쓰지 않으셨고, 다만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자기를 드러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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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자주 마노아처럼 기도합니다. 이미 분명히 아는 말씀 앞에서 새로운 표적을 구하고, 확실한 응답을 한 번 더 달라고 청합니다. 그 기도가 나쁘지는 않지만, 대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이미 들은 한 문장에 대한 순종입니다. 한국교회가 방향을 몰라 흔들리는 일은 드뭅니다. 알면서 하지 않는 데서 흔들립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새로운 방법을 찾기 전에 이미 받은 말씀을 지키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노아의 또 한 가지 모습도 함께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내를 통해 일하셨고 그 순서를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에서 내가 중심이 아닐 때 서운해지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교회의 좋은 일이 내 손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질 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헌신으로 열매가 맺힐 때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성숙입니다. 직분을 맡은 이들이 특히 이 대목에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배우자를 통해 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말을 따라가야 사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보다 먼저 듣고 있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내 곁에서 나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본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려 보고, 그 사람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시오. 어린 성도의 말, 새로 온 이의 질문, 오래 침묵하던 이의 한마디가 하나님의 전갈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인을 구하는 기도를 부끄러워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마노아의 어설픈 기도도 들으셨습니다. 다만 그 기도가 끝난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 표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이미 전해 준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이미 아는 한 문장을 실제로 살아 내는 것이 이 본문이 주는 가장 정직한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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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사십 년이나 눌려 살면서도
부르짖는 법을 잊어버린
우리의 무딘 입술을 불쌍히 보옵소서.
익숙해진 것을 성숙이라 부르며
아픈 것을 아프다 말하지 않았던
우리의 게으른 체념을 깨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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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
아무도 청하지 않았을 때
닫힌 태에 말씀을 두시고
안식 없는 집에 안식을 약속하신
그 앞서 오시는 사랑을 찬송합니다.
우리 가정의 식탁과 하루가
세상을 닮지 않는 구별된 자리가 되게 하시고
아이들이 부모의 뒷모습에서
주님을 먼저 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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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맡기시는 하나님,
우리가 완성을 보지 못하여도
오늘 맡은 한 걸음을 성실히 걷게 하시고
새로운 표적을 구하기 전에
이미 들은 말씀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나보다 먼저 들은 이의 뒤를
겸손히 따라가는 귀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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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