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9:01-06 골육이라 부른 입, 한 바위 위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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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이 죽자 세겜 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어머니의 고향으로 내려가 외조부의 온 가족을 모읍니다(1절). 그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스리는 것과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 가운데 무엇이 낫겠느냐 물으며 자기가 그들의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2절). 외가 사람들이 그 말을 옮기자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기울어 그는 우리 형제라 합니다(3절). 그들이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주자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자들을 사서 오브라로 가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입니다(4-5절). 막내 요담만 스스로 숨어 살아남았고, 세겜과 밀로 사람들은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그를 왕으로 삼습니다(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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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의 마지막 줄들을 기억하십시오.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은 곧 바알브릿을 섬겼고 여호와도 기드온의 은혜도 기억하지 않았다고 화자는 적었습니다. 그 앞에는 기드온이 세겜의 첩에게서 얻은 아들의 이름이 아비멜렉이라는 한 줄이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두 줄이 통째로 일어서서 걸어 나온 이야기입니다. 9장은 8장 다음에 새로 시작하는 장이 아니라 8장이 낳은 장입니다.
# 역사의 결로 보면, 새 왕이 자리를 굳히려고 형제들을 죽이는 일은 고대 근동에서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필요할 때마다 사사를 세우시는 곳이었고 지도력은 물려받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형제끼리 다툴 자리 자체가 없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의 방식을 버리고 이방의 방식을 그대로 들여옵니다. 첩의 아들이라 아버지의 몫을 정식으로 물려받기 어려웠던 그는 아버지의 성읍 오브라가 아니라 어머니의 성읍 세겜에서 발판을 찾습니다.
# 세겜은 아무 성읍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제단을 쌓은 곳이고, 요셉의 뼈가 묻힌 곳이며, 여호수아가 죽기 전 온 지파를 모아 언약을 갱신하고 큰 돌을 세워 둔 곳입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놓여 축복과 저주가 선포되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언약이 다시 맺어지던 그 자리가 오늘은 피로 세워진 왕권의 무대가 됩니다.
# 문학의 결도 눈여겨보십시오. 화자는 아홉 장 내내 기드온을 이름 대신 여룹바알이라 부릅니다. 바알과 다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별명을 되풀이하면서, 바알과 싸우던 사람의 아들이 바알 신전의 돈으로 사람을 사는 장면을 나란히 놓습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고 낱말을 반복해 판단을 만드는 것이 내러티브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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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외가를 먼저 찾아간 사람
하나님은 지도자를 세우는 권한을 사람의 야심과 셈법에 넘기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사람이 만들어 낸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왕으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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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삿 9:1). 그는 세겜 사람들 앞에 곧바로 서지 않습니다. 먼저 외가를 찾아가 사람을 모으고, 그들의 입을 빌려 성읍에 말이 퍼지게 합니다. 그리고 두 마디를 남깁니다.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삿 9:2). 자기 이름을 자기 입으로 내세우지 않고 남의 귀에 먼저 심어 두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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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이 내민 것은 셈법과 혈연, 두 가지입니다. 먼저 셈법을 보십시오. 칠십이 낫겠느냐 하나가 낫겠느냐. 언뜻 합리적인 물음처럼 들리지만 이 물음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사는 세습되는 자리가 아니었고, 기드온의 아들 칠십 명이 나란히 이스라엘을 다스릴 일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위협을 크고 선명하게 그려 놓고 자기를 그 유일한 해답으로 내미는 것, 이것이 선동이 늘 쓰는 오래된 얼개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선택지를 둘로 좁혀 주는 말에 유난히 약합니다.
다음은 혈연입니다. 골육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너희의 뼈요 너희의 살'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했던 바로 그 표현입니다. 사람이 쓸 수 있는 가장 깊은 연합의 언어가 여기서는 성읍 하나를 자기편으로 묶는 연장이 됩니다. 기억하라는 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낱말은 마음에 담아 곱씹으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어제 본문의 마지막 대목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삿 8:34) 살았습니다. 화자는 같은 낱말을 한 절 건너 다시 꺼내 놓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자리는 결코 빈 채로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른 것이 들어와 기억되기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 두 마디가 보여 주는 것은 아비멜렉의 영리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미 얼마나 비어 있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고백이 살아 있었다면 칠십이냐 하나냐 하는 물음 자체가 우스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원래 사람 왕이 없었고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기드온이 왕좌만 없는 왕처럼 살면서 그 빈자리를 자기 집으로 옮겨 놓았고, 아들은 그 옮겨진 자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랐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셈법에 다스림을 내어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셈법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이야기 끝에서 낱낱이 드러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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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오래 아파 온 자리도 여기와 멀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울 때 하나님 앞에서 묻는 물음보다 어느 편인가가 먼저 오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이 아니면 교회가 위태롭다는 식의 둘 중 하나 논법이 자주 쓰였습니다. 위협을 크게 그릴수록 검증은 작아집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다그치거든 잠깐 멈추어 셋째 길이 정말 없는지 물어 주십시오. 급하게 좁혀 놓은 선택지는 대개 누군가에게 유리하도록 좁혀진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마음이 들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하루만 두고 기도한 뒤에 다시 보면, 처음에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은 서두르는 사람보다 여쭙는 사람에게 길을 보여 주십니다. 서두르는 마음은 대개 남의 셈법 위에서 뜁니다. 오늘 하루 한 가지 결정 앞에서만이라도 잠깐 숨을 고르고,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정말 없는지 물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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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절 그는 우리 형제라
하나님은 혈연과 지연을 분별의 자리에 앉히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참으로 우리의 골육이 되시려고 몸을 입고 오신 형제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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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삿 9:3). 한 절 안에서 말이 퍼지고 마음이 기울고 결론이 납니다. 그 결론을 이루는 것은 단 한 마디, 그는 우리 형제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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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기울었다는 표현을 히브리어 그대로 옮기면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의 뒤쪽으로 쏠렸다'에 가깝습니다. 뻗어 나간다, 기울어진다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무엇에 설득되었다기보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듯 마음이 쏠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쏠림을 만든 것은 논증이 아니라 호칭이었습니다. 우리 형제. 이 한 마디 앞에서 물어야 할 물음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세우셨는가, 이스라엘에 사람 왕을 두는 것이 옳은가,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는가. 세겜 사람들은 그중 어느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호칭이 판단을 대신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우리 사람이라는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그 말이 붙는 순간 그 사람이 한 일과 하려는 일이 흐릿해집니다. 세겜 사람들이 그를 형제라 부른 것도 사실은 애정이 아니라 계산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쪽 사람이 왕이 되면 우리가 덕을 보리라는 셈이 그 호칭 아래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두 겹의 속임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혈연을 내세워 사람을 얻었고, 세겜 사람들은 혈연을 핑계 삼아 자기 이익을 얻으려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구로 쓰면서 형제라는 낱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형제가 되신 분은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골육을 내세워 사람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골육이 되시려고 하늘 자리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히 2:14) 이라고 성경은 적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의 골육은 형제를 죽이는 데 쓰였고, 그리스도의 골육은 형제를 살리는 데 쓰였습니다. 같은 낱말이 이렇게 반대편 끝에 놓입니다. 하나님의 형제 됨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 내려는 형제 됨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기를 내어 주시는 형제 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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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날마다 호칭으로 사람을 나눕니다. 우리 교회 사람, 우리 부서 사람, 우리 학교 사람, 우리 지역 사람. 그 나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사람은 원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호칭이 분별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공동체는 그 순간부터 조용히 병이 듭니다. 한국교회에서 벌어진 여러 아픈 일들도 대개 우리 사람이니까 하는 말이 검증을 밀어낸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누군가를 편들거나 감싸야 할 일이 생기거든 순서를 한 번만 바꾸어 보십시오. 이 사람이 내 편인가를 묻기 전에 이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가를 먼저 물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음에서 밀어낸 사람이 있다면 오늘 그 사람의 이름을 놓고 한 번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신 것은 우리가 그분 편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분이 먼저 우리 쪽으로 건너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건너옴을 오늘 우리도 한 걸음만 흉내 내어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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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절 신전에서 나온 은과 한 바위
하나님은 사람의 욕망을 채워 주는 도구가 되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값으로 산 힘과 피로 세운 자리를 끝내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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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삿 9:4). 그는 그 사람들을 데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갑니다.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삿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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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를 나란히 놓아 보십시오. 신전에서 나온 은이 칠십 개이고 그 은으로 죽인 형제가 칠십 명입니다. 사람 하나에 은 한 개. 화자는 그 셈을 굳이 맞추어 적어 둡니다.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그냥 욕이 아닙니다. 앞의 낱말은 '텅 빈' 또는 '가치 없는'이라는 뜻을 품고 있고, 뒤의 낱말은 '끓어 넘치는' 또는 '제멋대로인'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속은 비었는데 겉으로는 들끓는 사람들,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따르게 했다는 구절은 직역하면 '그들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인데, 이 표현은 구약에서 우상을 좇는 일을 가리킬 때 자주 쓰이는 말투입니다.
이 장면의 역설을 놓치면 본문의 절반을 잃습니다. 바알브릿은 언약의 바알이라는 뜻이고, 은을 내어 준 곳은 그 신의 신전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받는 사람은 여룹바알의 아들입니다. 여룹바알은 바알과 다투는 자라는 별명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밤중에 헐어 버린 바알의 제단이, 아들의 손에서 형제들을 처형하는 바위로 되살아난 것처럼 읽힙니다. 한 바위 위에서 칠십 명을 죽였다는 말은 그것이 우발적인 살육이 아니라 제의를 닮은 절차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은 대개 무질서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정연한 모양을 갖추고 옵니다.
그러나 화자는 한 사람을 남겨 둡니다. 요담이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았다고 짧게 적습니다. 그 한 줄이 이 장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살아남은 막내가 그리심산에 올라 나무들의 우화를 외칠 것이고, 그 우화대로 아비멜렉과 세겜은 서로를 불사르게 됩니다. 이 장 끝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악행을 이같이 갚으셨고 세겜 사람들의 악행도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갚으심은 늦을 수는 있어도 빠뜨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함께 놓으면 이 본문은 더 깊어집니다. 한 바위 위에서 칠십 명이 죽어 한 사람이 왕이 되었지만, 한 나무 위에서 한 사람이 죽어 수많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사람의 왕은 남을 죽여 자리에 오르고, 하나님의 왕은 자기를 내어 주어 자리에 오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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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사람을 사는 일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힘은 값을 치르고 모을 수 있고, 값으로 모은 힘은 값이 끊기는 순간 등을 돌립니다. 한국교회가 사람을 세우는 일에서 자주 실패한 까닭도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함께 걸어온 사람이 아니라 당장 쓸 수 있는 사람을 급하게 붙였고, 급하게 붙인 자리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일터와 가정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이익으로 움직이게 하고 있습니까, 신뢰로 움직이게 하고 있습니까. 이익으로 얻은 마음은 더 큰 이익 앞에서 반드시 떠납니다. 그리고 손에 들어온 것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도 물어 주십시오. 은 칠십 개는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사는 데 쓰였는지가 그 은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시간과 돈과 말이 무엇을 사고 있는지 그 한 가지만 정직하게 들여다보아도 하루가 달라집니다. 작은 것 하나를 값이 아니라 사랑으로 건네 보십시오. 값을 치러 얻은 것은 값이 끊기면 사라지지만, 사랑으로 건넨 것은 값이 없어도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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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절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언약을 세우신 자리를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사람이 그 자리를 빼앗아 자기 왕좌로 삼을 때에도 끝내 참된 왕을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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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삿 9:6). 한 절짜리 대관식입니다. 기름 부음도 없고 하나님께 여쭈는 일도 없고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도 없습니다. 모인 사람들과 한 그루 나무가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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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 기둥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자리를 떠올려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과 언약을 세운 뒤 큰 돌 하나를 가져다 여호와의 성소 곁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웠습니다. 그 돌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한 말을 들은 증거였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오늘 모여 선 자리가 바로 그 근방입니다. 언약을 기억하라고 세워 둔 나무 곁에서 언약과 아무 상관 없는 대관식이 치러집니다. 거룩한 자리는 저절로 거룩함을 지켜 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 자리를 무엇에 쓰느냐가 그 자리의 이름을 바꾸어 놓습니다.
낱말 하나를 더 보십시오. 왕으로 삼다라는 동사는 사사기 전체에서 오직 아홉 장에만 나옵니다. 사사기는 이 낱말을 오래 아껴 두었다가 가장 어두운 장면에 한꺼번에 씁니다. 그러면서 화자는 왕이 된 범위도 정확히 적어 둡니다. 세겜과 밀로, 곧 한 성읍과 그 요새뿐입니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이라 불렸지만 사사가 된 적이 없고,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말도 한 번 나오지 않습니다. 사사기가 되풀이하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탄식은 사람 왕이 없어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참된 왕이 계신데도 그분을 왕으로 모시지 않았기에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이 한 절은 우리를 다른 대관식으로 데려갑니다. 참 왕은 사람들이 모여 세운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보내셨고, 상수리나무 기둥 곁이 아니라 성 밖 나무 위에서 즉위하셨습니다. 그 머리 위에 붙은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조롱하려고 쓴 글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한쪽은 형제의 피로 자리를 사고 삼 년을 다스리다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끝났고, 다른 한쪽은 자기 피로 백성을 사고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빼앗긴 자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때가 차매 마침내 그 자리에 참된 왕을 세우셨습니다. 사사기의 어둠은 이 왕을 기다리게 하려고 이토록 정직하게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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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도 언약의 자리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던 자리, 처음 헌신을 결심하던 자리, 부부가 서로에게 약속하던 자리, 자녀를 품에 안고 기도하던 자리입니다. 그 자리들이 지금 무엇에 쓰이고 있는지 오늘 한 번 살펴보십시오. 예배의 자리가 사람을 평가하는 자리로 바뀌지는 않았는지, 봉사의 자리가 인정을 받는 자리로 바뀌지는 않았는지 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거룩한 이름이 붙은 자리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이름이 그 자리를 지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한 자리만 제자리로 돌려놓아 보십시오. 식탁이든 일터의 책상이든 잠들기 전 잠깐이든 좋습니다. 거기서 한 문장만 소리 내어 고백해 보십시오. 주님이 제 왕이십니다. 그 한 문장이 상수리나무 곁에 세워 둔 돌처럼 하루를 붙들어 줍니다. 자리는 고백으로 지켜지고, 고백은 날마다 되풀이될 때 비로소 자리를 이깁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키는 자리가 우리를 지킵니다. 오늘 그 한 자리에서 드린 짧은 고백이 내일의 여러분을 붙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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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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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형제라 부르면서 형제를 죽인 손을 봅니다.
가장 따뜻한 말이 가장 차가운 일에 쓰일 수 있음을 배웁니다.
저희 입술을 지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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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는 말을 저희가 먼저 듣게 하소서.
주님을 기억하지 않은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와 저희를 다스리려 합니다.
그 자리를 비워 두지 말고 주님으로 채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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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으로 얻은 것을 힘이라 부르지 않게 하소서.
피로 세운 자리에 오래 앉을 수 없음을 오늘 똑똑히 보았습니다.
저희가 쥔 것이 무엇을 사는지 아침마다 물어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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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세우던 나무 곁을 잊지 않게 하소서.
처음 무릎 꿇던 자리, 처음 약속하던 자리를
다른 이름으로 바꾸지 않게 하소서.
왕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나무 위에서 즉위하신 왕, 그 왕만 따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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