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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07:01-14 삼백으로 줄이신 손, 보리떡으로 이르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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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치고, 미디안 진영은 북쪽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습니다(1절). 여호와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다 하시며, 이스라엘이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자랑할까 염려하십니다(2절). 두려워 떠는 자를 돌려보내니 이만 이천 명이 떠나고 만 명이 남습니다(3절). 그래도 많다 하시며 물 가에서 시험하시어 손으로 움켜 핥은 삼백 명만 머물게 하십니다(4-8절). 그 밤에 하나님은 두려워하거든 부하 부라와 함께 내려가 들으라 하시고, 기드온은 적진에서 보리떡 한 덩어리가 장막을 무너뜨리는 꿈과 그 해몽을 듣습니다(9-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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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우리는 기드온이 양털 한 뭉치를 두 번 놓고 표징을 구하는 자리에서 본문을 닫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아침에 곧바로 이어집니다. 표징을 다 받아 낸 사람이 이제 진을 치고, 바로 그 진에서 하나님은 전혀 뜻밖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어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했고 오늘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다만 그 시험의 목적이 사뭇 다릅니다.

# 무대는 이스르엘 골짜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쪽 길보아 산기슭 하롯 샘 곁에, 미디안 연합군은 북쪽 모레 산 앞에 진을 쳤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은 낙타를 타고 이동하는 유목 약탈 집단이었고, 뒤에 나오는 기록을 따르면 그 수가 십삼만 오천에 이릅니다. 낙타의 기동력 앞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한 지파들의 민병대는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 기드온은 이 대목부터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바알이 그와 다투게 하라는 뜻의 조롱 섞인 별명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은 겉으로는 민족과 민족의 싸움이지만 속으로는 누가 참 신인가를 가리는 싸움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제단을 헐던 밤의 싸움이 이제 골짜기로 자리를 옮겨 온 것입니다.

# 기드온 이야기를 관통하는 열쇠말은 수입니다. 미디안은 메뚜기 떼같이 많았고 그 낙타는 해변의 모래 같았습니다. 그 많음 앞에서 이스라엘도 수를 모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리어 그 수를 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수의 논리로 시작해 수의 논리가 완전히 무너지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사사기의 다른 이야기들이 대적의 무기나 지도자의 자질을 문제 삼았다면, 기드온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많고 적음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전쟁 기사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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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떨림의 샘에 모인 삼만 이천

하나님은 우리의 많음을 자랑거리로 받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가리려고 쌓아 올린 것들을 먼저 덜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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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삿 7:1). 여호와께서 이르십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삿 7:2).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 하시니 이만 이천 명이 떠나고 만 명이 남습니다(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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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롯이라는 지명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 말은 떨다라는 히브리어 어근에서 왔으니 떨림의 샘이라 옮길 수 있습니다. 삼만 이천 명이 모여 진을 친 자리의 이름이 하필 떨림의 샘입니다. 성경은 지명 하나로 그 진영에 감돌던 공기를 알려 줍니다. 사람은 모였으나 마음은 떨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 하실 때 쓰인 낱말이 이 지명과 같은 뿌리라는 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떨림의 샘에서 떠는 자들이 걸러진 셈입니다. 숫자는 두려움을 가려 줄 뿐 없애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본문은 지명 하나로 조용히 일러 줍니다.

그다음 눈에 걸리는 것은 따르는이라는 말입니다. 원문은 그와 함께한, 너와 함께한 백성이라고 씁니다. 아직은 기드온의 부하가 아니라 그와 나란히 선 동료들입니다. 그런데 뒷날 기드온은 같은 무리를 나를 따르는 백성이라고 바꾸어 부르게 됩니다. 함께함이 거느림으로 바뀌는 자리에서 지도자는 무너집니다. 저자는 이 낱말을 일부러 남겨 두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미리 그늘을 드리웁니다. 승리의 자리에서 말이 달라지는 사람을 성경은 이렇게 낱말 하나로 짚어 둡니다.

가장 무거운 것은 2절에 밝혀진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염려하신 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한 뒤에 나올 한마디, 곧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는 말이었습니다. 삼만 이천도 미디안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인데 하나님은 그마저 많다 하십니다. 패배는 사람을 낮추지만 자만은 하나님을 밀어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쟁의 승패보다 승리 이후의 신앙을 더 염려하셨습니다. 구원의 공로가 누구의 것인지 흐려지면, 이긴 전쟁이 도리어 더 깊은 패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기게 하시려는 것만이 아니라 이긴 뒤에도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순환은 늘 망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원을 경험한 세대가 그 구원을 자기 힘으로 기억하는 순간, 다음 세대의 배교가 준비됩니다. 하나님이 지금 자르고 계신 것은 군사가 아니라 바로 그 망각의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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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지난 세대 동안 모으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사람을 모으고 헌금을 모으고 조직을 세우는 것이 곧 능력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규모를 근거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규모가 커질수록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는 고백이 교회 안에 조용히 자리를 잡습니다. 성장의 통계표가 어느새 하나님을 가리는 병풍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의 숫자가 줄어든다면 그것은 단지 위기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하나님이 그 병풍을 걷어 내시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롯 샘 곁에 무엇인가를 쌓아 두고 삽니다. 통장의 잔고, 자녀의 성적표, 사람들의 인정, 오래 쌓아 온 경력이 그것입니다. 겉으로는 든든해 보이지만 그 자리의 이름은 여전히 떨림의 샘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내가 세어 보며 안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적어 보십시오. 그것이 사라진다고 상상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 지금 하나님이 덜어 내려 하시는 것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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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절 물 가에서 남기신 삼백

하나님은 사람의 자격을 기준으로 일꾼을 고르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께만 영광이 돌아갈 만큼 작은 무리를 남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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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삿 7:4). 개처럼 혀로 핥는 자와 무릎 꿇고 마시는 자를 나누게 하시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삿 7:6). 하나님은 이 삼백 명으로 구원하겠다 하시고,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 처소로 돌려보내게 하십니다(7-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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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가의 시험을 두고 오랫동안 여러 해석이 있어 왔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전사의 자세가 아니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삼백이 뽑혔다는 설명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럴듯하지만 본문은 그 어디에서도 이들을 용사라 부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큰 용사라 부른 적은 있어도 이 삼백에게는 그런 호칭이 붙지 않습니다. 본문이 붙드는 것은 그들의 자세나 실력이 아니라 오직 그 수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누구를 고르실지 밝히지 않으시고, 물을 마시게 한 뒤 그 모습을 따라 가르실 뿐이었습니다.

수를 따라가 보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삼만 이천에서 만으로, 다시 삼백으로 줄었습니다. 처음 모인 수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 맞은편에는 메뚜기 떼 같은 십수만의 군대가 누워 있습니다. 이 정도로 기울어진 싸움이라면 이긴 뒤에 누구도 자기 힘을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고르신 기준은 능력이 아니라 작음이었고, 이 시험은 자격을 가리는 시험이 아니라 두려움을 다루시는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궁지로 몰아넣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 자리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삼백의 손에 쥐어진 것을 보십시오. 칼과 창이 아니라 양식과 나팔입니다(8절). 무기가 아니라 먹을 것과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병기의 우열로 결판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손에 다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것들을 택하셨고, 마침내 가장 약해 보이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온 세상을 건지셨습니다. 작아지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후퇴가 아니라 그분이 일하실 자리를 내어 드리는 일입니다. 바울이 약한 그때에 강하다고 고백한 것도 같은 이치였습니다. 힘이 빠진 자리가 곧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얼마나 남았느냐가 아니라 남은 것을 누구의 손에 들려 드리느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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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작아지는 시대를 우리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예배당의 빈자리가 늘고 다음 세대의 발걸음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다시 삼만 이천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남은 삼백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가입니다. 양식과 나팔, 곧 함께 나눌 것과 함께 외칠 말씀이 우리 손에 있다면 그 교회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며 할 수 있는 일이 줄고, 병이나 형편 때문에 내밀 수 있는 것이 적어질 때 우리는 쉽게 스스로를 쓸모없다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것이 적다고 물리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적음을 손에 드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내 손에 남은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밥 한 끼든 전화 한 통이든, 하나님께 들려 드리면 그것이 오늘의 나팔이 됩니다. 적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그대로 내어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그 적음을 통해 당신이 하셨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적음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서명이 놓이는 여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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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절 두려워하거든 내려가 들으라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종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자리까지 몸소 내려가 확신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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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삿 7:9). 이어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삿 7:10)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하십니다.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내려가리라 하십니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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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의 말씀은 이미 완료형입니다.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다고 하십니다.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승리가 이미 끝난 일로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시간표를 앞질러 갑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이 이어집니다.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하나님은 기드온이 그 약속을 듣고도 발이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라 두렵거든 이렇게 하라는 배려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믿음의 크기에 맞추어 손 내미는 높이를 바꾸십니다.

원문에서 하나님은 이 대목에 너라는 말을 유난히 힘주어 쓰십니다. 네가 두려우면 너와 네 부하가 함께 내려가라 하십니다. 두려움을 부끄러운 것으로 덮지 않으시고 그 이름을 그대로 불러 주십니다. 그리고 혼자 가게 하지 않으시고 부라를 붙여 주십니다. 확신은 대개 홀로 짜내는 결심이 아니라 곁에 선 한 사람과 함께 받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 언제나 동행을 함께 붙이신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확인됩니다.

그런데 이 배려 자체가 기드온의 자리를 말해 줍니다. 그는 이미 양털로 두 번 표징을 구했고, 여호와의 영이 옷 입듯 임하셨으며, 삼백을 남기신 하나님의 말씀까지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흔들립니다. 신앙은 한 번의 체험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더딤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도 의심하는 도마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완성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시작된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내주신 것은 새로운 표징이 아니라 새로운 걸음이었습니다. 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시는 대신 직접 내려가 들어 보라 하십니다. 믿음은 앉은 자리에서 자라지 않고 움직이는 발 밑에서 자랍니다. 두려움을 없애 주시는 대신 두려운 채로 걸을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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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확신이 선 다음에 순종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확신이 선 사람을 고르시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확신을 마련해 주십니다. 한국교회는 종종 담대함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아 왔습니다. 흔들리는 성도를 믿음이 약하다고 몰아세우는 말이 강단에서도 심심찮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종에게 내려가 들어 보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이런 하나님을 닮아, 확신 없는 이를 밀어내는 곳이 아니라 그가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결단이 서지 않아 문고리를 잡고 한참을 서 계신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담대해진 다음에 오라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오늘 들을 수 있는 한마디를 들으라 하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곁에 부라 한 사람을 두십시오. 함께 기도할 한 사람,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 밤은 결코 혼자의 밤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그 부라가 되어 드릴 차례입니다. 확신을 대신 만들어 줄 수는 없어도 함께 내려가 줄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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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4절 보리떡 한 덩어리가 굴러 들어와

하나님은 가장 하찮아 보이는 것을 손에 드시고, 대적의 입술까지 돌이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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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삿 7:12). 기드온은 거기서 한 사람이 친구에게 꿈을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삿 7:13) 장막을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답합니다. 이는 기드온의 칼이라고(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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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은 기드온의 눈에 비친 현실입니다. 메뚜기 떼와 해변의 모래는 셀 수 없음을 나타내는 관용 표현입니다. 삼백 명으로 이 골짜기를 마주한 사람의 가슴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저자는 이어지는 장면에 보라를 두 번 끼워 넣어 독자를 멈춰 세웁니다. 보라, 한 사람이 꿈을 말하고 있었다고. 눈에 보이는 것은 절망뿐인데 귀에 들리는 것은 전혀 다른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자기편이 줄어든 것만 보이던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쪽의 마음을 이미 흔들고 계셨습니다.

꿈의 내용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보리떡은 밀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의 거친 떡입니다. 낙타와 병력을 자랑하던 진영에서 가장 하찮은 물건 하나가 굴러 들어와 장막을 뒤엎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여러 동사를 잇달아 놓아 그 떡이 부딪히고 무너뜨리고 마침내 뒤엎는 장면을 영화처럼 그립니다. 하나님은 큰 것으로 큰 것을 치지 않으시고 가장 작은 것으로 가장 큰 것을 엎으십니다. 훗날 갈릴리 호숫가에서 한 소년이 내놓은 것도 보리떡 다섯 개였습니다.

다만 해몽에는 위험한 씨앗도 섞여 있습니다. 그들은 그 꿈을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불렀습니다. 승리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이름이 앞에 놓입니다. 실제로 뒷날 이스라엘은 이 승리를 기드온의 공로로 돌렸고, 기드온은 그 영광을 사양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에 사람의 이름이 붙기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말과 조심할 말이 같은 문장 안에 나란히 들어 있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놀랍습니다. 당신의 종을 세우시려고 대적의 잠자리까지 다녀가시고, 원수의 입술을 빌려서라도 약속을 되풀이해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쪽에서 먼저 움직입니다. 기드온의 눈에는 줄어든 자기편만 보였지만, 하나님은 이미 적진의 잠자리를 흔들어 두셨습니다. 우리가 셈을 마치고 절망할 때에도 하나님의 일은 벌써 절반쯤 진행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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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메뚜기 떼처럼 감당할 수 없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감당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손에 남은 것은 보리떡 한 덩어리뿐인 것 같은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한 덩어리를 손에 드십니다. 한국교회가 되찾아야 할 것은 큰 힘이 아니라 작은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자리입니다. 성도 한 사람의 정직한 하루, 이웃에게 건네는 밥 한 그릇, 아이 곁에 앉아 성경을 읽어 주는 저녁이 그 보리떡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셈에 넣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장막을 엎으십니다. 다만 한 가지는 조심하십시다. 그 승리에 내 이름을 붙이지 않는 일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받은 은혜일수록 그 공로는 온전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내어놓을 보리떡 한 덩어리가 무엇인지 찾아보시고, 그것이 굴러가 무엇을 무너뜨리는지는 하나님께 맡겨 드리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크기를 재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펴는 것이고, 무너뜨리는 일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그 작은 손을 펴는 일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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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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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는 늘 세어 보며 안심하려 합니다.

사람을 세고 형편을 세고

쌓아 둔 것을 세어 보며

그것을 믿음이라 불렀습니다.

떨림의 샘 곁에 진을 쳐 놓고

많음으로 두려움을 가리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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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시는 손을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덜어 내시는 것이 빼앗으심이 아니라

주님의 자리를 내시는 일임을

오늘 이 말씀 앞에서 배우게 하소서.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는 말을

저희 입술에서 거두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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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이 적어 보이는 날에도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들게 하시고

보리떡 한 덩어리 같은 저희를

주님의 손에 기꺼이 올려 드리게 하소서.

두려운 채로 한 걸음 내딛는 저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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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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