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4:01-20 내려가는 걸음, 뒤따르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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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은 딤나에 내려가 블레셋 사람의 딸 하나를 보고 돌아와 부모에게 아내로 맞게 해 달라 청하며, 만류하는 말 앞에서도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한다는 한마디로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1-4절).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던 길에 젊은 사자를 만나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하매 맨손으로 찢었고, 얼마 뒤 그 주검에 고인 꿀을 떠먹고 부모에게도 주면서 어디서 났는지는 숨깁니다(5-9절). 혼인 잔치에서 그는 들러리로 온 삼십 명에게 옷 예순 벌을 걸고 수수께끼를 냅니다(10-14절). 사흘이 지나도 풀지 못한 이들이 그의 아내를 협박하자 아내는 울며 졸라 답을 얻어 동족에게 알리고, 분노한 삼손은 아스글론에 내려가 삼십 명을 쳐 죽여 값을 치르고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갑니다(15-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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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한 아이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는 문장으로 닫혔습니다. 사십 년 어둠 속에 놓인 작은 태양, 태에서부터 구별된 나실인의 첫 걸음을 우리는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첫 문장은 그 기대를 비껴갑니다. 영이 움직이기 시작한 청년이 처음 내디딘 걸음은 블레셋 땅으로 내려가는 걸음이었습니다. 시작하리라 하신 구원과 실제로 시작된 발걸음 사이의 어긋남이 오늘 이야기의 긴장입니다.
# 소라는 유다 산지의 서쪽 끝에 얹힌 언덕 마을입니다. 거기서 소렉 골짜기를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평야가 열리고 그 초입에 딤나가 있습니다. 걸어서 반나절 거리이지만 두 땅의 성격은 아주 달랐습니다. 산지는 이스라엘의 자리였고, 평야는 철기와 성읍과 바다를 가진 블레셋의 자리였습니다. 단 지파는 본래 이 경계에 기업을 받았으나 끝내 평야로 내려가 살지 못했고, 훗날에는 땅을 찾아 아예 북쪽으로 옮겨 갑니다. 삼손의 집은 밀려난 지파의 변두리, 곧 두 세계가 맞닿아 날마다 서로의 말과 물건과 풍습이 오가던 접경이었습니다.
# 나실인의 규례는 세 가지였습니다. 포도나무 소산을 입에 대지 않고, 주검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입니다(민 6:3-6). 오늘 본문에는 포도원과 주검과 잔치가 차례로 나옵니다. 세 울타리 가운데 둘이 이 한 장에서 헐리고 남은 하나는 뒤에 가서 헐립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사사기가 되풀이하는 후렴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직역하면 자기 눈에 옳은 대로입니다(삿 21:25). 오늘 삼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바로 그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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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눈에 좋아서 내려간 길
성부 하나님은 사람이 제 눈을 따라 내려가는 걸음까지도 끝내 당신의 구원 계획 안으로 거두어들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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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삿 14:1-2).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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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에 놓인 동사가 이 장 전체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산지에 자리 잡은 소라에서 평야의 딤나로 가는 길은 실제로 내리막이었으니 지리를 적은 말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화자는 이런 낱말을 그냥 흘려 쓰지 않습니다. 같은 동사가 이 한 장에서만 다섯 번 되풀이됩니다. 딤나에 내려가고(1절), 부모와 함께 내려가고(5절), 여자에게 내려가고(7절), 아버지가 내려가고(10절), 마지막에는 아스글론에 내려갑니다(19절). 반대로 올라가는 걸음은 두 번뿐인데, 하나는 부모에게 청하러 올라온 걸음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이 어그러진 뒤 분이 나서 올라간 걸음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를 화자는 동사 하나로 그려 보입니다. 걸음이 낮아지는 것은 발의 일이지만, 걸음이 어디로 기울지를 정하는 것은 마음의 일입니다.
그 마음을 움직인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본문은 감추지 않습니다. 보았다는 말이 첫 문장에 두 번 나옵니다. 보고, 보았사오니입니다. 부모가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고 만류하자 아들은 한 문장으로 논쟁을 끝냅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삿 14:3). 히브리어를 그대로 옮기면 그 여자가 내 눈에 좋습니다에 가깝습니다. 조금 뒤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삿 14:7). 사사기의 마지막 후렴이 말하는 자기 눈에 옳은 대로가 이 청년의 입술에서 먼저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구별됨이 아니라 눈의 판단이 그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언약 백성 전체가 앓던 병을, 그 백성을 구원하라고 세워진 사람이 똑같이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자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얹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삿 14:4). 히브리어 문장은 그 말을 맨 앞에 두어 힘을 실었습니다. 삼손의 부모는 알지 못했고 삼손 자신도 몰랐으나, 그 어긋난 걸음의 배후에 블레셋을 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삼손의 선택을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설명하지도 변호하지도 않고 다만 알려 줄 뿐입니다. 사람이 제 눈을 따라 내려가는 그 길 위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길을 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가 붙들고 있는 신비이며, 훗날 형제들의 악의를 두고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고백한 사람의 자리이기도 합니다(창 50:20).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좋다 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잘못이 놓인 자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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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눈으로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보기에 좋으니 사고, 보기에 좋으니 가고, 보기에 좋으니 사람을 고릅니다. 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감각이고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통로입니다. 문제는 눈이 판단의 마지막 자리에 앉을 때 생깁니다. 오늘 하루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이것이 내 눈에 좋아서 내린 결론인지 말씀 앞에서 옳아서 내린 결론인지 한 번만 더 물어보십시오. 그 한 번의 물음이 내려가는 걸음과 서 있는 걸음을 가릅니다. 한국교회도 오랫동안 보기에 좋은 것을 좇아 왔습니다. 규모와 시설과 성과는 눈에 잘 보이고 세어 보기도 쉽습니다. 반면 신실함과 정직과 오래 참음은 사진에 담기지 않습니다. 눈에 잘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온 세월이 오늘의 불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보이는 것보다 옳은 것을 먼저 세는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이미 내려와 버린 자리에 있는 분들께 드립니다. 잘못 고른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아는 아침이 있습니다. 그 아침에 필요한 것은 자책의 되새김이 아니라, 그 자리까지 따라오신 분을 알아보는 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고 계획을 다시 짜지 않으시고, 우리가 선 그 자리에서 일을 이어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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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절 포도원과 주검 사이에서
성령 하나님은 약한 사람에게도 강하게 임하시지만, 그 능력은 감추고 싶은 자리를 덮어 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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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삿 14:5-6).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삿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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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먼저 보십시오. 포도원입니다. 나실인에게 포도나무는 열매도 껍질도 씨도 입에 대지 말아야 할 것이었습니다(민 6:4). 그 규례는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표지였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것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눈에 보이는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표지를 몸에 지닌 청년이 지금 포도원 한가운데를 걷고 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규례를 어긴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울타리에 바싹 붙어 걷고 있습니다. 무너짐은 대개 한 번의 큰 결심으로 오지 않고, 가까이 가도 괜찮다는 작은 허락들이 쌓여 옵니다. 경계선 가까이 오래 머문 사람은 어느 날 자기가 언제 선을 넘었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사자가 달려들고,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합니다. 강하게 임했다고 옮긴 말은 옷처럼 덮였다는 표현이 아니라 세차게 밀어닥쳤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사사기에서 이 영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해 임하셨습니다. 옷니엘에게도, 기드온에게도, 입다에게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영이 임하신 자리는 전쟁터가 아니라 혼담을 위해 내려가는 사사로운 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이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해서 능력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있습니다. 능력이 임했다는 것이 그 걸음을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사와 승인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위해 주신 힘을 사람이 제 길에서 쓸 때에도 그 힘을 곧바로 거두지 않으실 때가 있고, 그 유예는 은혜이자 동시에 위험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돌이켜 사자의 주검을 봅니다. 나실인이 가장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이 주검이었습니다. 부모의 주검 앞에서도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을 만큼 엄한 규례였습니다(민 6:7). 그런데 그는 손을 넣어 꿀을 떠먹고, 부모에게도 건넵니다. 여기서 화자가 두 번이나 되풀이하는 말이 있습니다. 알리지 아니하였더라입니다. 사자를 찢은 일도 알리지 않았고, 꿀의 출처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능력은 자랑하지 않았으나 죄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감추는 습관이 이 사람의 생애에 자리를 잡는 장면입니다. 사자의 주검에서 떠온 단맛, 이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 됩니다. 어두운 데서 얻은 것을 밝은 자리의 양식으로 삼고, 그 출처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훗날 빛 가운데로 나아오라 부르시는 복음은 바로 이 습관을 향한 초대입니다(요일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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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출처를 말하지 않는 단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얻었는지 말할 수 없는 이익, 누구를 밀어내고 앉은 자리, 조금 부풀린 보고로 받은 칭찬 같은 것들입니다. 맛은 달지만 그 단맛은 사람을 고립시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점점 말수가 줄어듭니다. 오늘 하루 중에 한 사람에게라도 출처를 밝혀 보십시오. 고백은 관계를 회복시키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다음으로, 울타리 가까이 오래 머물지 마십시오. 아직 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말이 가장 위태로운 말입니다. 포도원 안을 걷기 시작한 날과 사자의 주검에 손을 넣은 날 사이는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이 거리가 자주 짧았습니다. 이만한 일은 관행이라며 지나간 것들이 쌓여 어느 날 큰 부끄러움으로 드러나곤 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모든 일에서 작은 경계가 먼저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과 승인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일이 잘되고 힘이 실린다고 해서 그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 것은 아닙니다. 열매가 아니라 말씀이 길을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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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4절 잔치 자리에 걸린 수수께끼
성부 하나님은 사람이 제 힘을 놀잇감으로 삼는 자리에서도 일하시되, 그 자랑을 그대로 두지는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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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그것을 풀어 내게 말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삿 14: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삿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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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라고 옮긴 낱말은 본디 마시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혼인 잔치의 중심에 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이 그 자리를 직접 베풉니다. 포도원을 지나고 주검을 만진 손이 이제 술자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신랑의 벗으로 세워진 삼십 명은 축하객이라기보다 감시자에 가까웠습니다. 이방인 사위를 관찰하고 상대하라고 블레셋 사람들이 붙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삼손도 그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환대 대신 내기를 꺼냅니다. 옷 예순 벌은 작은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겉옷 한 벌은 한 사람의 재산 목록에 오르던 물건이었고, 삼십 명이 각각 두 벌씩 내놓는다는 것은 마을 하나가 휘청할 만한 판돈이었습니다. 혼인 잔치가 시작부터 싸움터의 냄새를 풍깁니다.
그가 낸 수수께끼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읽어 보십시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답이 그의 개인적인 경험 안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수수께끼는 듣는 이에게도 실마리를 주지만, 이것은 처음부터 이길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물음이었습니다. 더 눈여겨볼 것은 그 답의 내용입니다. 사자의 주검과 거기서 떠온 꿀, 곧 나실인의 규례를 어긴 자리가 그대로 문제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그 일을, 그는 부끄러워하지도 회개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이기기 위한 놀잇감으로 삼았습니다. 감추어 둔 죄가 오래되면 어느 날 무용담이 됩니다. 그것이 가장 위험한 단계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 장면을 길게 나무라지 않습니다. 다만 사흘이 지나도록 풀지 못하였다고 적어 두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이미 불길한 기운이 들어 있습니다. 이레 가운데 사흘이 지났고, 빚을 질 수 없는 사람들의 조바심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힘을 자랑하려고 벌인 놀이가 곧 한 여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칼로 돌아올 참입니다. 하나님은 이 뒤틀린 자리를 그대로 방치하지도, 서둘러 덮어 주지도 않으십니다. 사람이 벌인 일이 그 결과를 드러내도록 두시면서, 그 결과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자랑은 반드시 값을 부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은 겸손을 권하는 예의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고전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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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입에도 무용담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무모함, 아슬아슬하게 넘긴 일, 남들은 못 했을 거라고 말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사실 회개했어야 할 일이 섞여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부끄러움이 재미로 바뀐 것입니다. 오늘 한 번 자기 이야기 목록을 조용히 살펴보십시오. 웃으며 하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는 울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이야기 목록에서 내려놓으십시오. 다음으로, 이기려고 만든 물음을 조심하십시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우리는 때로 상대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판을 짜는 일입니다. 나는 지려고 묻는가, 이기려고 묻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던진 질문에서 자주 이기려 했습니다. 옳은 말을 하면서도 사람을 얻지 못한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대화가 이기는 대화가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대화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손에 주신 힘이 놀잇감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십시오. 은사는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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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0절 눈물과 아스글론 사이
성자 하나님은 사람의 분노가 남긴 잔해 위에서도 구원의 길을 내시고, 값을 치르러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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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일 동안 그들이 잔치할 때 그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그에게 강요함으로 일곱째 날에는 그가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그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더라"(삿 14:17).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삿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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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이름이 없는 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알아내지 못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는 말이었습니다(삿 14:15). 그러니 그녀의 눈물은 술수가 아니라 생존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하고 말합니다(삿 14:16). 사랑한다면서 데려온 사람이 정작 위기 앞에서는 아무 방패가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눈에 좋아서 시작된 관계의 얄팍함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보기에 좋다는 감정은 사람을 데려오게는 하지만 지켜 내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삼손이 그녀를 부르는 말이 그 얄팍함의 증거입니다. 내 암송아지라는 말은 애칭이 아니라 밭 가는 짐승에 빗댄 거친 비아냥이었습니다(삿 14:18).
그다음 문장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갑자기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분노에 찬 사람에게, 그것도 애먼 성읍을 치러 가는 길목에서 그 영이 임하십니다. 아스글론은 딤나에서 사십 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해안 도시였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이 잔치의 일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본문은 이 일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영이 임하셨다고 적을 뿐 잘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혈기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지배를 흔드시려는 당신의 뜻을 그 혈기의 한복판에서 관철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거친 정직함입니다. 이 책은 영웅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만 홀로 남기십니다. 사사는 언제나 거울입니다. 그 거울에 비치는 것은 사람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런 사람으로도 일하시는 분의 끈질기심입니다.
장의 마지막 문장은 서늘합니다. 삼손의 아내는 그의 친구였던 자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가 눈에 좋아 데려오려 했던 사람은 그렇게 남의 사람이 되었고, 뒤에 그 여인과 그 아버지는 불에 타 죽습니다. 내려간 걸음이 남긴 값을 정작 삼손 자신은 치르지 않았고, 가장 약한 사람들이 대신 치렀습니다. 죄의 값이 언제나 지은 사람에게만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장의 가장 아픈 대목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합니다. 값을 치르지 않고 올라가 버린 사람이 있는 세상에, 아무 값도 지을 것이 없으신 분이 스스로 내려오셔서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걸음입니다(빌 2:6-8). 사사기의 모든 내려감이 어그러진 걸음이었다면, 갈보리로 향한 그 내려감만은 끝까지 옳은 걸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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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분노도 대개 애먼 곳에서 터집니다. 상처를 준 사람 앞에서는 참았다가 집에 돌아와 식구에게 쏟고, 일터에서 눌린 마음을 가장 약한 사람에게 풉니다. 아스글론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내 분노가 향하는 자리가 실제 원인이 있는 자리인지 한 번만 확인해 보십시오. 그 한 번의 확인이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 줍니다. 다음으로, 내가 내린 결정의 값을 누가 치르고 있는지 물으십시오. 사람은 자기 선택의 무게를 늘 자기 몫으로만 셈합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결정은 아이들이 치르고, 한 교회의 결정은 가장 연약한 성도가 치릅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시간에 내린 여러 결정의 값도 정작 목소리가 작은 이들이 치러 왔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모든 결정에서 그 값을 누가 지게 되는지를 먼저 헤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눈물 앞에 서 있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누군가 내 앞에서 울고 있다면 그 울음의 이유를 캐묻기 전에 먼저 그가 무엇에 쫓기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이레 동안 운 여인의 등 뒤에는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울음 뒤에도 우리가 모르는 협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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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오늘도 제 눈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 저희를
이 아침 붙들어 주옵소서.
보기에 좋다는 말 한마디로
말씀을 이긴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정직하게 헤아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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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내려간 자리마다
뒤따라오신 발걸음이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봅니다.
버리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며
어긋난 길 위에서도
당신의 길을 내신 분을 찬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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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춘 단맛을 내려놓게 하시고
자랑이 된 부끄러움을
다시 부끄러움으로 알게 하옵소서.
제 분노가 애먼 곳으로 흐르지 않게 하시고
제 선택의 값을 약한 이에게
떠넘기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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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주님,
그 걸음을 따라
오늘 하루 바르게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