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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3:15-25 이름을 묻는 손, 기묘자라 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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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는 염소 새끼를 준비해 여호와의 사자를 대접하려 하지만, 사자는 음식을 물리고 마땅히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 하며, 이름을 묻는 물음에는 내 이름이 기묘자라고만 답합니다(15-18절). 마노아가 바위 위에서 번제와 소제를 드리자 이적이 일어나고, 제단 불꽃이 하늘로 오르는 동시에 사자가 그 불꽃에 휩싸여 올라가매 부부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19-20절). 마노아는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 두려워하지만, 그의 아내는 번제를 받으시고 이 모든 일을 보이시고 말씀까지 주신 분이 우리를 죽이려 하셨을 리 없다고 분별합니다(21-23절). 마침내 그 여인이 아들을 낳아 삼손이라 이름하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며 마하네단에서 그의 영이 아이를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24-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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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소라 땅의 한 여인에게 두 번 찾아와 태에서부터 구별될 아이를 약속하고, 마노아의 물음에도 새 말을 더하지 않고 아내에게 준 규례를 되풀이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대화의 끝자리에서 시작합니다. 마노아는 아직 자기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 모르고, 그 모름 위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일을 하려 합니다. 손님을 붙들어 앉히고 상을 차리는 일입니다.

# 나그네를 붙들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가장 높은 예의였고, 상을 받은 손님은 그 집을 지킬 의무를 지는 관계로 들어섰습니다. 아브라함도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그렇게 했고, 기드온도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밑에서 염소 새끼와 무교전병을 내왔습니다. 이름을 묻는 것 역시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세계에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상대를 부를 수 있다는 뜻이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알아내려는 시도는 흔했고, 야곱이 브니엘에서 씨름 끝에 이름을 물었을 때도 끝내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생각은 이스라엘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고,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도 생명이 보전되었다며 그 땅의 이름을 새로 지었으며, 이사야도 성전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뵈었을 때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거룩하신 분과 피조물이 마주 서는 자리에는 언제나 이 떨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는 이 두려움을 그대로 두지 않고, 이름조차 적히지 않은 한 여인의 입을 통해 그 떨림을 다르게 읽는 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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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8절 이름을 묻는 손

성부 하나님은 사람의 예의와 이해 안에 담기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비밀로 남겨 두신 채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옮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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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삿 1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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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의 제안에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전갈을 받았으니 기쁘고, 기쁘니 상을 차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의 말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우리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준비하게 하소서입니다. 그런데 사자는 그 제안을 받지 않습니다. 머물기는 하겠으나 네 음식은 먹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방향을 틉니다.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상 위에 오를 것이 대접이 아니라 번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여기서 짧게 끼어들어 마노아가 그를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아내는 이미 그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웠다고 말했는데, 남편은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알아보지 못한 사람의 정성은 늘 방향을 조금씩 어긋나게 씁니다.

이어지는 물음이 그 어긋남을 더 또렷하게 합니다. 마노아는 이름을 묻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삿 13:17). 예언이 이루어지면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는 자기가 예언자로 여기는 이를 높이겠다고 말합니다. 영광의 방향이 한 칸 비껴 있습니다. 그래서 사자의 대답은 설명이 아니라 되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삿 13:18). 기묘자로 옮긴 말은 놀랍다, 헤아릴 수 없다, 비밀이다라는 뜻을 함께 지닌 낱말입니다. 히브리어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기묘자라는 이름을 알려 주신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은 너희 이해 밖에 있다고 답하신 것입니다. 이름을 얻어 손에 쥐려던 사람에게 돌아온 것은 빈손이었습니다.

빈손이 손해는 아닙니다. 이름을 쥐지 못한 자리에서 예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한글 성경은 이사야가 예고한 아기의 이름도 기묘자라고 옮겼습니다. 두 곳의 히브리어 낱말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바는 이어집니다. 사람의 헤아림 밖에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분석해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일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여백을 품고 그분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복음의 반전이 있습니다. 이름을 감추셨던 그분이 뒷날 스스로 이름을 주셨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낳을 아들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불리게 되었고,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의 이름은 예수라 하라 하셨습니다(마 1:21-23). 기묘자는 끝내 이름을 알려 주시려고 그날 이름을 감추고 계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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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에도 하나님을 대접하려는 손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드렸으니 이만큼은 돌아오리라는 셈, 정성을 쌓아 하나님을 내 편으로 돌려 놓으려는 마음입니다. 그 손은 부지런하지만 예배는 아닙니다. 예배는 내가 상을 차려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 아니라, 내 것을 태워 그분이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위해 많은 것을 차려 왔습니다. 건물과 행사와 통계가 그렇게 쌓였습니다. 그런데 그 상 위에 정작 태워 드린 것이 얼마인지는 따로 물어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차리는 교회보다 드리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을 다 설명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으십시오. 기도 응답이 더딜 때 우리는 곧 까닭을 붙이려 합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어떤 죄 때문에, 어느 순서가 틀려서라고 이름을 붙이고 나면 마음이 잠시 편해집니다. 그러나 이름을 붙인 뒤에 우리가 얻는 것은 평안이 아니라 통제감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붙일 수 없는 이름이 있고, 그 여백이 오히려 우리의 쉴 자리입니다. 오늘 하루 중 한 번은, 설명되지 않는 그 일을 설명하려 들지 말고 그저 그분 앞에 엎드려 보십시오. 그리고 존귀는 사람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좋은 설교자, 고마운 성도, 도움이 된 책이 다 통로일 뿐입니다. 영광의 방향이 한 칸 비껴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성숙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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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절 불꽃을 타고 오른 이름

성부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작은 예물을 물리지 않으시되, 그 예물 위에서 사람이 붙들 수 없는 방식으로 자기를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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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삿 1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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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는 알아듣지 못했으나 순종했습니다. 대접하려던 염소 새끼를 그대로 가져다가 이번에는 여호와께 드립니다. 제단이라 할 것도 없이 바위 위입니다. 기드온도 오브라의 바위 위에 그렇게 드렸습니다. 여기에 이 본문의 조용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분이 누구신지 몰랐지만, 들은 대로 방향만은 바꾸었습니다. 깨달음이 순종을 앞서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순서이지만, 성경에는 순종이 깨달음을 앞서는 자리가 훨씬 많습니다. 아는 만큼만 드리겠다는 사람은 끝내 드리지 못하고, 모르면서도 들은 대로 옮긴 사람이 결국 봅니다.

그다음 문장이 놀랍습니다. 이적이 일어났다고 옮긴 말은 원문에서는 누군가가 이적을 행했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그 주어가 분명히 적혀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 장면에 맞습니다. 앞 절에서 자기 이름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 하신 분이 이제 헤아릴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이름과 행위가 한 낱말의 뿌리에서 만납니다. 제단의 불꽃이 하늘로 오릅니다. 시내산 앞에서, 그리고 갈멜산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삼켰던 것처럼, 불꽃은 하나님이 예물을 받으셨다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꽃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불꽃 속에 사자가 함께 휩싸여 올라갑니다. 마노아가 붙들어 앉히고 싶었던 그분이 붙들 수 없는 방식으로 떠나가십니다. 머물러 주소서라고 청했던 손 위로 불꽃만 남았습니다.

부부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설명을 들은 것이 아니라 보았고, 본 뒤에 할 수 있는 일은 엎드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순서를 다시 새길 만합니다. 하나님은 마노아의 작은 예물을 물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정성으로 준비한 염소 새끼는 방향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정성이 향할 자리를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 예물 위에서 자기를 드러내시되 손에 쥐이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내십니다. 뒷날 한 몸을 단번에 드려 영원한 제사를 이루신 분이 바로 이 불꽃 안에서 미리 보인 분입니다(히 10:12). 우리가 드릴 것은 흠 없는 예물이 아니라, 흠 있는 우리를 그분 손에 옮겨 놓는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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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릴 것이 초라해서 못 드리겠다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재능도 시간도 물질도 남들보다 적으니 이런 것을 내놓아 무엇 하겠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값진 제물이 아니라 방향이 바로잡힌 염소 새끼 하나였습니다. 대접하려던 것을 드리는 것으로 바꾸기만 했을 뿐인데 그 위에서 불꽃이 올랐습니다. 한국교회는 드릴 것의 크기를 자주 견주어 왔습니다. 큰 헌신과 큰 사역이 존중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 견줌이 작은 사람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에서는 작은 것이 부끄럽지 않은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시간의 기도, 한 통의 문자, 한 번의 심방 동행이 다 바위 위에 놓인 염소 새끼입니다. 다음으로, 모르면서도 들은 대로 옮기는 순종을 오늘 한 가지만 해 보십시오. 왜 그래야 하는지 다 알고 나서 순종하려면 평생 순종할 일이 없습니다. 용서해야 할 사람을 다 이해한 뒤에 용서하려는 것도 같은 미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내 손을 떠나실 때를 견디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붙들어 두고 싶은 은혜의 순간, 뜨거웠던 집회와 눈물 났던 기도의 자리는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불꽃은 올라가고 우리는 다시 일상의 밭으로 돌아갑니다. 그 돌아감이 은혜의 끝이 아니라, 받으셨다는 표지 뒤에 오는 평범한 순종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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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3절 이미 받은 은혜로 분별하다

성령 하나님은 두려움에 갇힌 마음에 이미 주신 은혜의 증거를 떠올려 주시고, 그 증거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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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삿 13: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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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자 마노아는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았습니다. 깨달음은 늘 한 박자 늦게 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그를 두려움으로 데려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고, 야곱도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도 생명이 보전되었다며 놀랐습니다. 마노아는 배운 대로 반응한 것입니다. 다만 그의 두려움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조금 전에 자기 눈으로 본 일입니다. 두려움은 늘 우리 기억을 좁게 만듭니다. 방금 받은 은혜조차 지워 버리고 최악의 결말 하나만 크게 비춥니다.

아내의 대답은 차분하고 논리가 단단합니다. 그녀는 세 가지 증거를 차례로 셉니다.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예물을 받으신 일, 이적을 보이신 일, 약속을 주신 일입니다. 죽이려 하셨더라면이라고 옮긴 말은 직역하면 죽이기를 기뻐하셨더라면에 가깝습니다. 작정하고 우리를 없애려 하셨다면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녀는 감정으로 남편을 달래지 않습니다. 이미 일어난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분별의 방법입니다. 앞날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서 뒤쪽 뜻을 읽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끝까지 이름이 적히지 않습니다. 사사기는 뒤로 갈수록 여성의 자리가 좁아지는 책이고, 이름이 남는 여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삼손의 힘을 빼앗은 들릴라입니다. 그런데 이름 없는 이 여인이 이 장에서 가장 밝게 봅니다. 말씀을 먼저 받고, 두려워할 자리에서 두려워하고, 이제는 남편의 공포를 신학으로 풀어 줍니다. 하나님은 직분과 순서가 아니라 들을 귀를 보고 일하십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논증은 뒷날 사도가 펼친 논증과 결이 같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롬 8:32). 가장 큰 것을 이미 주신 분이 작은 것을 아끼실 리 없다는 셈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두려움에 맞서는 가장 든든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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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몰려올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의 말보다 기억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이미 해 놓으신 일을 세어 보는 일입니다. 마노아의 아내처럼 손가락으로 꼽아 보십시오. 받으신 예배가 있고, 보여 주신 일이 있고, 들려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세어 놓고 나면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결말이 그분의 성품과 얼마나 어긋나는지 보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앞날이 어둡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숫자가 줄고 신뢰가 낮아진 것은 사실이고, 아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나온 대책은 대개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이미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을 세어 본 뒤에 내리는 결정은 결이 다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성도들이 걱정이 몰려오는 밤에 이 셈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이 여인의 자리를 눈여겨보십시오. 집안에 두려움이 들어올 때 누군가 한 사람은 차분히 증거를 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꼭 목소리가 큰 사람이거나 직분이 높은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내 곁에서 나보다 조용히 더 밝게 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의 말을 가볍게 넘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름이 적히지 않은 입으로도 가장 정확한 말씀을 전하십니다. 또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두려움을 나눌 때 상대의 공포를 키우는 사람인가, 증거를 세어 주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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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5절 작은 태양이라 이름한 아이

성자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감추셨으나 우리에게는 부를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 위에 복과 영을 부어 구원을 시작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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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삿 13: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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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물었던 사람은 이름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름을 지을 아이를 얻었습니다. 이 짝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무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비밀로 남았고, 사람의 손에는 부를 수 있는 이름이 하나 놓였습니다. 이름을 지은 사람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그 여인입니다. 말씀을 가장 먼저 받고 가장 정확히 알아들은 사람이 이름을 붙입니다. 삼손이라는 이름은 해를 뜻하는 낱말에서 왔습니다. 작은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그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벧세메스, 곧 해의 집이라는 성읍이 있었으니 낯선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이름이 놓인 자리를 보십시오. 블레셋의 사십 년 어둠 속입니다. 아무도 부르짖지 않던 캄캄한 땅에 작은 태양 하나가 떠오릅니다. 큰 해가 아니라 작은 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이 크기로 시작합니다.

이어지는 문장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복을 주셨다고 직접 말하는 자리는 드뭅니다. 이 책은 대개 사람의 실패와 화자의 탄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유년에는 복이라는 낱말이 놓입니다. 뒷날 이 아이가 그 복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우리는 압니다. 그는 태에서부터 구별되었으나 그 구별을 여러 번 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시작은 복이었습니다. 사람의 뒷날이 하나님의 시작을 취소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복이 놓인 장소가 마하네단, 곧 단 지파의 진이라 불린 곳입니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블레셋 평야와 맞닿은 최전선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안전한 뒤편에서 기르지 않으시고 맞닿은 자리에서 기르십니다.

마지막 낱말이 이 장 전체를 열어 줍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움직이다로 옮긴 말은 가볍게 건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세게 휘젓는다는 뜻이고, 번민과 뒤숭숭함이 함께 따라오는 소란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일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의 평생은 실제로 그렇게 휘저어졌습니다. 그리고 시작하셨더라는 말은 앞에서 사자가 이 아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신 그 말과 짝을 이룹니다(삿 13:5). 약속이 시작이라 하셨고 이제 영이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삼손은 끝내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시작하는 구원자 뒤에 끝내시는 구원자가 오셔야 했습니다. 참된 태양은 흠 없이 오셔서 사망의 그늘에 앉은 백성 위에 떠오르신 분, 의로운 해로 일컬어진 그분이십니다(말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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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 안에 일을 시작하실 때 마음이 늘 평온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위로자이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휘저으시는 분입니다. 편안하던 자리가 불편해지고, 넘기던 일이 걸리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생깁니다. 그 뒤숭숭함을 곧 시험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신 자리일 수 있습니다. 묵상이 하는 일이 바로 그 휘젓는 손길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한동안 평안과 안정을 신앙의 증거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이 마지막 문장은 영이 오시는 자리에 번민이 함께 온다고 말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성도들이 마음이 불편해질 때 그것을 서둘러 덮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작은 시작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사십 년의 어둠에 하나님이 놓으신 것은 군대가 아니라 갓난아기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맡은 일도 대개 그 크기입니다. 주일학교의 한 아이, 처음 나온 새 가족 한 사람, 아직 아무 열매가 없는 기도 하나가 그 자리입니다. 그리고 내가 선 자리가 최전선처럼 고단하게 느껴지는 분들에게 이 구절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마하네단에서 아이를 기르셨습니다. 블레셋과 맞닿은 그 경계가 하나님이 고르신 양육의 자리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버티고 있는 그 일터와 가정과 관계의 경계선도 그렇습니다. 피하고 싶은 그 자리가 실은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자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작만 맡고 떠나는 삶도 아름답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결말을 보지 못하고 떠날 수 있습니다. 완성은 시작을 주신 분의 몫입니다.

*

# 거둠의 기도

주님,

이름을 물어 쥐려 했던 저희의 조급한 손을

오늘 아침 펴게 하옵소서.

헤아릴 수 없는 분을 헤아려 보려 애쓰던 마음에

알 수 없음을 견디는 힘을 주옵소서.

.

기묘자라 하신 하나님,

저희가 차린 상을 물리시고 저희 손의 것을 태워

당신께 드리게 하신 은혜를 찬송합니다.

바위 위에 놓인 작은 예물도 받으시는 분이심을 믿사오니

드릴 것이 초라하다는 말로 순종을 미루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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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몰려오는 밤에는 이미 받은 것을 세게 하옵소서.

받으신 예배와 보여 주신 일과 들려주신 약속을 꼽으며

죽이려 하지 않으신 분의 마음을 저희 입으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곁에서 더 밝게 보고 있는 이의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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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작은 해를 두시는 주님,

저희가 선 경계의 자리도 주께서 고르신 양육의 밭인 줄 알게 하시고

휘저으시는 성령의 손길을 서둘러 덮지 않게 하옵소서.

시작만 맡고 떠나는 삶도 주님 손에서 헛되지 않음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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