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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06:11-24 큰 용사여, 라는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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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고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11절). 사자는 그를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고 부르지만, 기드온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느냐고 되묻습니다(12-13절). 여호와께서는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고, 자기 집이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다는 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약속하십니다(14-16절).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앞에서 바위에서 불이 나와 예물을 사르고, 두려워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안심하라 하십니다(17-23절). 기드온은 제단을 쌓아 여호와 살롬이라 불렀습니다(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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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우리는 이름 없는 한 선지자가 진단만 남기고 사라지는 자리에서 본문을 닫았습니다. 회개하라는 명령도, 그리하면 구원하리라는 약속도 없이 책망만 남은 열린 결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다음 장면입니다. 책망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혜가 그 뒤를 따라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아래로 내려오시고, 사사기에서 가장 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 장소부터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오브라는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땅입니다. 요아스는 므낫세 지파 아비에셀 가문 가운데서도 상당한 영향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고, 뒤에 25절에서 밝혀지듯 그의 집에는 바알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에서 큰 나무 아래는 흔히 신당이 서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사자는 바알의 냄새가 배어 있는 그 마당으로 걸어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리 정돈해 놓은 거룩한 자리에서만 만나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 시대의 얼굴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절대적인 지도자가 없던 이 시대에 하나님이 백성과 소통하시는 방식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의 활동이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고 제사장의 역할도 뚜렷하지 않던 때입니다. 왕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은 사자를 통해 친히 다스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의 소명 이야기이기 이전에, 왕이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직접 말을 거시는 이야기입니다.

# 기드온이라는 인물의 성격도 미리 잡아 두면 좋습니다. 그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전형입니다. 출애굽 이야기는 들어서 압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잘 살아가려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은 모릅니다. 그래서 현실의 참혹함은 정확히 보면서도 그 원인은 엉뚱한 곳에서 찾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드온은 네 번 입을 여는데, 그 넷이 모두 의심이거나 변명이거나 두려움입니다.

# 그럼에도 이 단락은 여호와 살롬이라는 제단 이름으로 닫힙니다. 배교와 압제와 부르짖음으로 이어지던 사사기의 순환이 여기서 처음으로 한 사람의 인격적인 만남 안으로 들어옵니다. 공동체 전체에 임할 구원을 기드온이 아주 세밀하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미리 맛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단은 사사기가 기록되던 때까지 오브라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주신 평화가 그렇게 오래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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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2절 포도주 틀에서 부르신 이름

하나님은 우리의 지금 모습이 아니라 당신이 빚어 가실 내일을 먼저 보시고, 그 내일의 이름으로 오늘의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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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삿 6:11). 그리고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 숨어서 밀을 떨던 사람이 들은 첫마디가 용사라는 호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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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은 본래 넓고 바람 잘 드는 마당에서 합니다. 키질을 해야 겨가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밀을 떨고 있습니다. 포도주 틀은 바위를 파서 만든 움푹한 구덩이여서 바람이 들지 않고, 한 번에 얼마 되지도 않는 양만 다룰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본문이 쓴 낱말은 도리깨로 크게 내려치는 타작이 아니라 작은 막대기로 알갱이를 톡톡 떨어내는 몸짓을 가리킵니다. 그 한 단어 안에 그가 얼마나 웅크리고 있었는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라고 옮긴 표현도 원문에서는 안전한 곳에 숨긴다는 뜻이니, 그는 지금 거둔 것을 감추는 중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호와의 사자는 큰 용사여라고 부릅니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는 전쟁에 나설 수 있는 힘 있는 자, 유력한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롱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더욱이 원문의 어순은 우리말과 반대여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가 먼저 나오고 큰 용사여가 뒤따릅니다. 순서가 곧 논리입니다. 그가 용사인 근거는 그의 팔뚝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 그것이 그의 힘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시선이 한 자리에서 어긋나는 것을 봅니다. 기드온이 자기를 보는 눈에는 겁먹은 생존자가 있고, 하나님이 그를 보시는 눈에는 이스라엘을 구할 용사가 있습니다. 소명은 내가 준비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정의하시기 때문에 시작됩니다. 훗날 예수께서 시몬을 보시고 게바라 부르신 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직 흔들리는 사람에게 반석이라는 이름을 미리 얹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현재를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우리의 내일을 앞당겨 불러 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호칭은 기드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용맹할 수 있다는 이 정체성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것이었고, 오늘 그 이름을 잃어버린 백성을 대신해 한 사람이 먼저 그 이름을 되찾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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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사람을 볼 때 이미 갖춘 것을 먼저 셉니다. 경력과 학위와 실적을 헤아려 직분을 맡기고, 그 목록이 얇으면 조용히 뒤로 물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하나님은 포도주 틀에 웅크린 사람을 용사라 부르십니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사람을 보는 눈입니다.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무엇으로 빚어 가실 것인가를 묻는 눈입니다. 그 눈이 살아 있는 공동체는 사람을 잃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저마다 포도주 틀이 있습니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자리, 작게 웅크린 채 겨우 지켜 내는 것들입니다. 바로 그 자리로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은 자신에게 스스로 붙여 온 이름 하나를 떠올려 보십시오. 소심한 사람, 늦된 사람, 별것 아닌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옆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이름을 나란히 적어 보십시오. 큰 용사여. 두 이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오래갈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나를 부르시는 그 목소리가 나를 설명하는 내 목소리보다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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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4절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하나님은 원망 섞인 물음조차 물리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물음을 던진 사람의 손에 구원의 사명을 맡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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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삿 6:13). 하나님은 그 항변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으시고 다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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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의 항변에는 그가 배운 것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그는 출애굽을 압니다. 어른들에게 들었고 되풀이해 외웠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가 꺼내는 이야기가 어제 읽은 이름 없는 선지자의 설교와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사건을 딛고 서서 두 사람이 정반대의 결론에 이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문제로 짚었는데, 기드온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은 아닙니다. 지식이 회개에 이르지 못하면 그 지식은 원망의 재료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는 나라는 인칭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났고, 우리 조상이 말했고,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공동체의 불행은 정확히 보면서도 그 안에 자기 몫이 있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자신이 바로 그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적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마침 그를 이적으로 세우시려고 찾아오신 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논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이미 선지자를 통해 충분히 밝히셨기에 여기서 되풀이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명령이 옵니다. 이 너의 힘으로라는 구절은 번역하기 까다로운 대목입니다. 원문은 오히려 너는 이 너의 힘으로 가라에 가깝고, 게다가 이라는 지시어에 정관사가 없어서 이것이 네 힘이다로 읽을 여지가 열립니다. 그렇게 읽으면 말씀의 뜻이 선명해집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심, 그것이 네 힘이다. 뒤따르는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그 힘의 보증입니다. 하나님은 빈손인 사람을 결코 홀로 내보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미디안을 향해 몸을 돌려 걸어 나가는 그 첫걸음부터가 이미 믿음의 일이며, 순종은 확신이 다 찬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다 모인 뒤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길 위에서 비로소 힘이 주어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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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안에도 기드온의 물음이 흔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서 왜 교회는 이렇게 작아지고 세상은 이토록 차가운가. 그 물음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물음이 원망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물음 앞에 다른 물음을 놓습니다. 혹시 그 문제를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응답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하나님은 시대를 탓하는 입에 사명을 쥐여 주십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진단을 멈추고 자기가 파송된 자리임을 깨닫는 순간, 불평은 기도가 되고 기도는 발걸음이 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적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싶은 계절이 있습니다. 기도한 지 오래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아침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럴 때 물음을 이렇게 한 번 바꾸어 보십시오. 혹시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나를 보내신 것은 아닌가. 말씀은 읽을 때가 아니라 되씹을 때 우리를 바꿉니다. 오늘 14절 한 절만 손으로 적어 보시고, 그 문장의 주어가 슬며시 나에게로 옮겨 오는 순간을 기다려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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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절 가장 작은 자에게 주신 약속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을 저울질하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이 함께하시겠다는 약속 하나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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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삿 6:15). 하나님의 대답은 짧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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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의 말은 얼핏 겸손해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계속 읽어 가면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오브라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땅이었고, 요아스는 성읍의 제단을 관리할 만한 유력자였습니다. 기드온에게는 부릴 수 있는 종이 열 명이나 있었고, 뒷날 그는 여러 아내와 칠십 명의 아들을 둘 만큼 살림이 넉넉했습니다. 그러니 가장 작은 자라는 고백은 신분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대한 고백입니다. 부족함을 이유로 물러서는 것이 언제나 겸손인 것은 아닙니다.

대답으로 주어진 말씀은 물음과 아귀가 딱 맞습니다. 무엇으로 구원하겠느냐는 질문에 하나님은 어떤 무기도 어떤 병력도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오직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무기이며 군대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느냐고 물러서던 모세에게 주신 대답이 이것과 똑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손에 쥐여 주시는 것은 능력의 목록이 아니라 동행의 약속입니다.

뒤따르는 비유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십니다. 바로 앞 단락에서 본문은 그들이 메뚜기 떼 같고 낙타가 무수하다고 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던 무리가 여기서는 한 사람으로 줄어듭니다. 실은 기드온 이야기 전체가 수의 이야기입니다. 십삼만이 넘는 대군과 삼백 명, 무수한 낙타와 한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사기 저자는 이 대목에서부터 못 박아 둡니다. 사람이 세는 수는 두려움을 키우지만, 하나님이 헤아리시는 수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많고 적음을 견주는 저울이 애초에 다른 것입니다. 함께 계신 그분 한 분이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약속은 기드온의 약함을 고쳐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 약함 위에 하나님 자신을 그대로 얹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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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크기로 자기를 증명해 왔습니다. 규모가 곧 힘이라고 배웠고, 작은 교회는 스스로를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작음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문제 삼으시는 것은 작음을 핑계로 물러서는 마음입니다.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한 집에서 사사를 세우신 분은 지금도 작은 교회와 작은 모임과 작은 헌신을 통해 일하십니다. 부르심 앞에서 우리가 셈해야 할 것은 우리 편의 크기가 아니라 함께 계시겠다는 그 약속의 무게입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자신을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하며 뒤로 물러섭니다. 그 말이 정말 겸손인지, 아니면 순종을 미루기 위한 점잖은 변명인지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마음에 걸리는 순종 한 가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일 앞에 16절을 가만히 놓아 보십시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이 약속이 내 부족함보다 크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한 걸음을 뗍니다. 그 한 걸음이 오늘 묵상이 맺는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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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4절 바위에서 나온 불, 평화라 이름한 제단

하나님은 믿음이 약한 자에게 표징을 아끼지 않으시며, 두려움에 떠는 사람에게 승리보다 먼저 평화를 선언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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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은 표징을 구하고, 예물을 가져올 때까지 떠나지 마시기를 청합니다(17-18절). 그리고 염소 새끼와 가루 한 에바로 만든 무교병과 국을 상수리나무 아래로 가져옵니다(19절). 사자는 그것을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더니 지팡이 끝을 내밉니다.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삿 6:21). 그제야 기드온은 두려워하고, 하나님은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삿 6:23)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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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이 가져온 음식의 양이 만만치 않습니다. 가루 한 에바는 스무 킬로그램이 넘습니다. 한 사람이 먹기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양이고, 미디안에게 다 빼앗기던 그 시절 형편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가 준비한 것은 본래 제물이 아니라 대접할 음식이었습니다. 그는 눈앞의 손님을 예언자쯤으로 여겼고, 그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그 말이 참되다는 표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그것을 바위 위에 올리고 국까지 붓게 합니다. 기드온이 차린 저녁상이 그 자리에서 제단이 되고 제물이 됩니다.

불은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바위에서 나옵니다. 땅에서 솟은 불이 고기와 무교병을 사르고 사자는 사라집니다. 이적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적으로 대답하신 셈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에게 징표를 허락하시는 이 자비가 놀랍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첫 반응은 감격이 아니라 비명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당시의 통념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주신 약속보다 자기가 본 것이 더 크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꾸짖음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이 세 마디를 듣고 기드온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붙입니다. 여호와는 평화라는 뜻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가 아직 아무것도 이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미디안은 그대로 있고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평화의 제단이 먼저 섭니다. 성경의 평화는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결과가 아니라, 함께 계신 분에게서 흘러나와 싸움보다 앞서 오는 선물입니다. 훗날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분의 목소리가 여기서 이미 들려옵니다. 기드온이 그날 미리 맛본 평화는 그 한 사람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머지않아 온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구원을 그가 아주 인격적인 크기로 먼저 받아 안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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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평화를 상황의 결과로 여기는 데 익숙합니다. 문제가 풀려야 평안하고 숫자가 회복되어야 안심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살롬은 미디안이 물러가기 전에 세워진 제단입니다. 교회가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결과가 아니라 함께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제단은 사사기가 기록될 때까지 오브라에 남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자리는 그렇게 오래 서서 다음 세대에게 말을 겁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쌓는 제단도 누군가의 내일에 서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확신이 다 차오른 뒤에 순종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순서는 반대입니다. 한 걸음 나아갈 때 평안이 뒤따라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 하나를 떠올리고 그 위에 미리 이름을 붙여 보십시오. 여호와 살롬. 같은 구절이 어제와 다르게 읽히는 아침이 있습니다. 그 작은 놀라움이 묵상의 기쁨이고, 그 기쁨이 우리를 하루 더 걷게 합니다. 오늘도 그런 아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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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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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 틀에 웅크린 사람을

큰 용사라 부르신 주님,

저희도 숨어서 지키는 것이 많습니다.

들키고 싶지 않은 자리마다

먼저 찾아와 주옵소서.

저희를 부르시는 그 이름으로

오늘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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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이 어디 있느냐 묻는 입에

사명을 쥐여 주시는 주님,

저희 원망을 물리치지 않으시니 감사합니다.

시대를 탓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내심을 받은 자리로 걸어가게 하옵소서.

함께하심이 곧 저희 힘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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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자라 물러서는 저희에게

반드시 함께하리라 하신 주님,

겸손을 가장한 미룸을 거두어 주옵소서.

저희 크기를 세지 않게 하시고

약속의 무게를 먼저 달아 보게 하옵소서.

한 걸음 내딛는 아침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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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서 불을 내신 하나님,

저희 저녁상도 제단이 되게 하옵소서.

아직 아무것도 이기지 못했으나

여호와 살롬이라 먼저 부르겠습니다.

안심하라 하신 그 말씀 하나로

오늘 하루를 걸어가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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