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5:01-20 되갚음의 사슬 끝에서 터뜨리신 부르짖는 자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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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 거둘 때 아내를 찾아간 삼손이 문 앞에서 거절당하면서, 오늘 본문은 되갚음이 되갚음을 부르는 사슬로 들어섭니다. 삼손은 여우 꼬리에 홰를 달아 블레셋의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태우고, 블레셋은 그 아내와 장인을 불사르며, 삼손은 다시 그들을 크게 칩니다(1-8절). 블레셋이 레히에 진을 치자 유다 사람 삼천 명은 자기들의 구원자를 결박해 원수의 손에 넘깁니다(9-13절). 그러나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자 밧줄이 불탄 삼처럼 떨어지고,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로 천 명을 죽인 뒤 자기 공을 노래합니다(14-17절). 이어 목말라 죽게 된 그가 여호와께 부르짖자 하나님이 우묵한 곳을 터뜨려 샘을 내시고, 그 샘은 부르짖은 자의 샘, 엔학고레로 오늘까지 남습니다(18-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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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삼손은 딤나의 결혼 잔치에서 수수께끼를 내었다가 아내의 눈물 앞에 답을 내주고, 분을 이기지 못해 아스글론에서 서른 명을 쳐 죽인 뒤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들러리였던 친구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뒤 얼마가 지난 어느 날, 밀 거두는 계절에 시작합니다. 얼마 후로 옮긴 표현은 제법 긴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화가 가라앉을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삼손은 그 사이 달라진 사정을 모른 채 돌아옵니다.
# 밀 추수는 대개 늦봄 오월 말경, 보리 추수가 끝난 뒤에 이어졌습니다. 한 해 양식이 들판에서 마지막으로 여무는 때이고, 밀과 포도와 감람은 고대 팔레스타인 농경의 세 기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절에 들판에 불을 놓는다는 것은 한 해 농사만이 아니라 여러 해의 살림을 끊어 놓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블레셋은 해안 평야의 다섯 성읍을 거점으로 철기와 조직된 군대를 갖추고 유다와 단 지파의 구릉지까지 세력을 뻗고 있었습니다. 사사기 13장 1절이 말하듯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의 손에 넘기셨고, 이스라엘은 그 압제 아래서 부르짖지도 않은 채 살고 있었습니다.
# 사사기 전체의 흐름에서 오늘 본문은 한 가지 서글픈 되돌림을 보여 줍니다. 사사기 1장에서 여호수아가 죽은 뒤 누가 먼저 올라가 가나안과 싸우겠느냐고 여쭈었을 때,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고 답하셨습니다. 그 유다가 오늘은 삼천 명의 무리를 이루어 올라가되, 원수를 치러 가지 않고 자기 구원자를 묶으러 내려갑니다. 사사기 뒷부분의 후렴인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움직이는 삼손과 자기 안전만 셈하는 유다의 모습에 이미 그 그림자가 드리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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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절 불붙은 꼬리가 이어 가는 되갚음의 사슬
성부 하나님은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분노의 사슬 한가운데서도 역사의 고삐를 놓지 않으시되, 그 분노를 결코 의롭다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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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삿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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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은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들고 처가를 찾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화해를 청하며 내미는 꽃 한 다발쯤 되는 선물입니다. 떠날 때의 분노는 가라앉았고, 이제는 아내를 만나겠다는 기대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장인은 문을 막고,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고 말합니다. 장인이 쓴 말은 스스로 굳게 그렇게 생각했다는 강조 구문입니다. 그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확신했지만 사위의 충동적인 기질을 셈에 넣지 못했고, 그 확신이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의 시작이 됩니다. 삼손의 대답은 짧고 섬뜩합니다.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그는 장인 한 사람이 아니라 블레셋 전체를 탓합니다. 답을 캐내려고 아내를 협박한 쪽이 그들이었으니 자기는 허물이 없다는 셈입니다. 그러나 허물이 없다는 말을 굳이 덧붙인다는 것 자체가, 지금부터 할 일이 폭력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우로 옮긴 히브리어 슈알은 무리 지어 다니는 자칼을 가리킬 가능성이 큽니다. 삼백 마리를 두 마리씩 꼬리로 묶고 그 사이에 홰를 달아 들판으로 몰았으니,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이 한꺼번에 탔습니다(삿 15:5). 기드온 시대에 미디안이 이스라엘의 소산을 휩쓸어 간 일에 견줄 만한 피해였습니다. 이제 불은 사람에게로 옮겨 붙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 대신 딤나의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릅니다. 자기들이 수수께끼를 부당하게 푼 일은 잊은 채 책임을 한 집에 몰아 씌운 것입니다. 한때 불사르겠다는 협박을 피하려고 남편의 비밀을 캐냈던 그 여인이 결국 그 불에 삼켜졌습니다. 박유미 교수는 협박당하고 버림받고 끝내 살해당한 이 이름 없는 여인의 삶이 약자를 제물로 삼는 사회의 잔인함을 고발한다고 말합니다.
삼손은 다시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며 그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칩니다(삿 15:7-8). 이 갈등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블레셋이 삼손을 잡으러 온 것은 그가 그들을 쳤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들이 아내와 장인을 태웠기 때문이며, 그것은 삼손이 밭을 태웠기 때문이고, 그것은 장인이 딸을 다른 이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원인의 첫 고리를 끝내 찾을 수 없는 사슬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사슬을 통해 블레셋을 치실 계기를 찾고 계셨습니다(삿 14:4). 이것은 삼손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악을 쓰셔서 선을 이루신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니며, 책임은 여전히 그 일을 행한 사람의 몫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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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도 되갚음의 사슬로 촘촘히 엮여 있습니다. 한마디 상처에 한마디로 되갚고, 무시당한 만큼 무시로 돌려주며, 그러면서 늘 이번은 내게 허물이 없다고 말합니다. 교회 안의 갈등도 대부분 이렇게 자랍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모두가 자기는 받은 대로 돌려주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먼저 연습해야 할 것은 누가 옳은지 가리는 일보다 사슬의 한 고리를 스스로 끊는 일입니다. 사과할 차례가 아니어도 먼저 손을 내밀고,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권했습니다(롬 12:17). 이 권면은 약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불붙은 꼬리를 들판에 풀어놓지 말라는 말입니다.
가정에서는 이 사슬이 더 가까이에서 돌아갑니다. 부부 사이에 오간 말 한마디가 며칠씩 이어지는 냉기가 되고, 부모가 자녀에게 던진 서운함이 자녀의 반항으로 돌아옵니다. 일터에서도 한 번 틀어진 관계는 보고서 한 장, 회의 자리 하나마다 되갚음의 기회를 찾습니다. 그 사슬 속에서 가장 먼저 타 버리는 것은 삼손의 아내처럼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내 분노가 누구의 들판을 태우고 있는지, 그 불길에 누가 가장 먼저 다치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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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3절 동족의 손에 묶인 구원자
성자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아 원수의 손에 넘겨지셨으나, 그 넘겨짐을 통해 도리어 백성을 묶은 사슬을 끊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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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삿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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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합니다. 가득하다로 옮긴 동사는 단순히 채우는 것이 아니라 쳐들어와 짓밟는 군사적 점령을 뜻합니다. 놀란 유다 사람들이 왜 우리를 치느냐고 묻자 블레셋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고 답합니다(삿 15:10).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칼을 들고 블레셋 앞에 서지 않습니다. 삼천 명이 모여 내려간 곳은 원수의 진영이 아니라 삼손이 숨은 에담 바위 틈입니다. 에담이라는 이름은 사냥하는 새를 뜻하는 말에서 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쫓긴 짐승이 숨어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는 것이 원수가 아니라 동족이라는 점이 이 장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듭니다.
유다 사람들의 첫마디가 이 시대의 영적 형편을 다 드러냅니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다스리다로 옮긴 말은 분사형이어서 지금 다스리고 있는 중이라는 뜻을 담습니다. 그들은 블레셋의 통치를 이미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말은 기드온이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고 했던 고백(삿 8:23)과 정면으로 어긋납니다. 여호와의 다스림을 고백하던 입이 이제 블레셋의 다스림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다스림에서 건지려는 사람을 도리어 분란을 일으킨 골칫거리로 나무랍니다. 압제보다 무서운 것은 압제에 길든 마음입니다.
삼손의 대답은 블레셋의 말과 거의 같습니다.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이 문장에는 우리말 성경이 옮기지 않은 그와 똑같이라는 강조어가 들어 있습니다. 그는 사사로서의 사명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블레셋이 방금 한 말을 되받아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뿐입니다. 당시 근동에서 통하던 동해 보복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사사와 하나님의 원수가 같은 문장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이 장면의 가장 아픈 대목입니다. 삼손은 동족을 치지 않고,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맹세하라는 조건 하나만 달고 새 밧줄 둘에 순순히 묶입니다. 그러나 원수의 손에 넘기는 것은 직접 죽이지만 않을 뿐 죽게 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을 묶어 넘기면 모두가 평온을 되찾는다는 이 셈법은 뒷날 대제사장 가야바의 입에서 다시 들립니다(요 11:50). 동족에게 묶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 이 구원자의 모습은,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에게 영접받지 못하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비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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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깥의 박해보다 안에서 자라는 길들여짐입니다. 세상의 질서가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그 질서를 흔드는 목소리는 모두 분란으로 들리게 됩니다. 정의를 말하는 사람, 가난한 이웃 편에 서자고 말하는 사람, 복음의 불편함을 상기시키는 사람이 모임의 평온을 깨는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지금 누구의 다스림 아래 편안해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돈과 효율과 체면이 조용히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평화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우리는 자주 유다 사람들이 됩니다.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동료를 모른 척하거나, 가정 안에서 모두가 쉬쉬하는 문제를 들춘 가족을 원망하거나, 일터에서 부당한 관행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을 조용히 따돌리는 일에 한 사람으로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새 밧줄 두 가닥을 들고 내려가는 삼천 명 가운데 내가 서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넘겨진 자리에서 도리어 우리를 위해 결박당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이제는 묶는 손이 아니라 풀어 주는 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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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7절 불탄 삼처럼 떨어진 밧줄, 턱뼈의 산
성령 하나님은 사람이 묶어 둔 결박을 한순간에 풀어 구원을 이루시되, 그 영광이 사람의 자랑으로 바뀌는 것을 슬퍼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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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삿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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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인 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이 마주 나가며 소리를 지릅니다. 전쟁을 시작하거나 승리를 경축할 때 외치는 함성을 가리키는 동사이니, 원수를 손에 넣었다고 믿은 승리의 함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함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십니다. 사자를 찢을 때(삿 14:6)와 아스글론으로 내려갈 때(삿 14:19)에 쓰인 바로 그 동사, 세차게 들이닥친다는 뜻의 찰라흐입니다. 새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떨어졌다는 표현은 앞 단락의 불과 이어집니다. 블레셋 들판을 태우던 불, 딤나의 집을 태우던 불이 이제는 결박을 태우는 이미지로 바뀝니다. 삼손의 힘의 근원이 그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에 있다는 사실이 이보다 또렷할 수 없습니다.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집어 듭니다. 새로 옮긴 말은 막 생긴, 아직 마르지 않은이라는 뜻이어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짐승의 뼈를 가리킵니다. 무기로서는 변변치 않은 물건이고, 동시에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나실인의 규례를 또 한 번 넘어서는 물건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도, 삼손은 자신이 구별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흠 있는 손을 쓰시지만, 흠이 흠 아닌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천 명을 쓰러뜨린 그는 노래를 부릅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삿 15:16). 김회권 교수는 이 노래가 나귀를 뜻하는 하모르와 더미를 뜻하는 하모르가 같은 소리라는 점을 절묘하게 살린 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노래에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절이 한 줄도 없습니다. 전쟁 뒤 여호와를 찬양했던 드보라의 노래(삿 5장)와 견주어 보면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보입니다. 노래의 주어는 끝까지 나입니다. 기드온 이야기에서 여호와를 위하라는 외침에 기드온을 위하라는 말이 슬쩍 덧붙여진 것이 비극의 씨앗이 되었던 것처럼, 가장 큰 승리의 순간에 하나님을 잊은 이 노래도 사소하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노래를 마친 삼손은 턱뼈를 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 곧 턱뼈의 산이라 이름합니다(삿 15:17). 라마트는 높다는 뜻에서 온 말로 높은 곳, 언덕을 뜻하니 자기 승리를 높이 세워 두는 이름입니다. 우리 주님은 친히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으나 스스로 높이지 않으시고 자기를 낮추셨습니다(빌 2:8-9). 턱뼈의 산과 갈보리 언덕은 그렇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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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우리 삶에 일하실 때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막혔던 일이 풀리고, 결박 같던 관계가 풀리며, 오래 묶여 있던 습관의 밧줄이 불탄 삼처럼 떨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노래는 쉽게 내가 했다는 노래로 바뀝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의 열매, 섬김의 결과, 공동체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 어느새 그 문장의 주어가 우리 교회, 우리 프로그램, 우리 지도자가 되어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작은 열매 하나를 이야기할 때도 그 열매를 맺게 하신 성령의 이름을 먼저 부르는 공동체이기를 소망합니다.
개인의 삶에도 저마다 턱뼈의 산이 있습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기억, 큰일을 해낸 경력, 남보다 앞섰던 성취가 그것입니다. 그 기억을 언덕 위에 세워 두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은혜보다 공로를 기념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하루 무엇인가를 이루어 낸다면, 그 일 앞에 나귀의 턱뼈가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 계셨음을 먼저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그 도구를 내던지듯 자랑도 함께 내려놓는 겸손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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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0절 목마른 자의 부르짖음, 엔학고레
삼위 하나님은 자기 공을 노래하던 입이 목말라 부르짖을 때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마른 땅을 터뜨려 생명의 샘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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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삿 15: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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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을 쓰러뜨린 사람이 물 한 모금이 없어 죽게 되었습니다. 17절과 18절은 문법적으로 끊김 없이 이어집니다. 그가 던졌고, 불렀고, 목말랐고, 불렀고, 말했다는 동사들이 숨 가쁘게 이어지다가 한순간에 처지가 뒤집힙니다. 방금 땅에 이름을 붙이던 사람이 이제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제야 삼손은 입을 열어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라고 고백합니다. 턱뼈의 노래에서 빠졌던 주님이 목마름의 기도에서야 문장의 주어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위기가 아니라 자기의 위기 앞에서야 하나님을 찾았고, 그 기도는 여전히 미숙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물이 솟아납니다. 광야에서 원망하고 다투던 이스라엘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신 므리바의 사건(민 20:2-13)이 겹쳐 보이는 장면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목마르기 때문에 물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대목에서 본문의 말놀이가 완성됩니다. 전성민 교수가 짚는 대로, 17절에서 땅의 이름을 짓던 카라가 18절에서는 여호와께 부르짖는 카라가 되고, 19절의 엔학고레에도 같은 카라가 들어 있습니다. 학코레는 부르짖다의 분사에 정관사가 붙은 꼴이니, 엔학고레는 그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주도권을 쥐고 이름을 붙이던 사람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으로 자리를 바로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사기는 이 샘마저 단순한 미담으로 두지 않습니다. 삼손이 그 샘에 붙인 이름조차 응답하신 하나님보다 부르짖은 자기를 더 기념하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삼손의 부르짖음에 쓰인 카라는, 사사기 전체에서 이스라엘이 압제 아래 부르짖을 때 쓰인 자아크와 다른 낱말입니다. 그의 부르짖음은 민족의 부르짖음을 대신하지 못했고 개인의 곤경에서 벗어나려는 외침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이십 년 동안 사사로 지냈다는 20절의 요약도 블레셋 사람의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다른 사사들과 달리 삼손의 시대에는 땅이 평온했다는 말이 끝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는 한 줄이 남습니다. 턱뼈의 산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어도 부르짖은 자의 샘은 세대를 넘어 남았습니다. 사람의 공로는 잊히고 하나님의 응답은 남는 것입니다. 이 샘은 초막절 마지막 날 예수께서 서서 외치신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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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역설은 가장 강했던 날 뒤에 가장 목마른 날이 온다는 데 있습니다. 큰일을 이룬 직후에 찾아오는 허탈, 모든 것을 쏟아 낸 뒤 밀려오는 탈진은 목회자에게도 성도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부끄러워 기도를 미루곤 합니다. 방금까지 내 힘을 자랑했는데 무슨 낯으로 살려 달라고 하겠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도 샘을 여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서로에게 전해야 할 소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부르짖을 자격을 갖춘 사람만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목마른 사람은 누구든지 부르짖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삶에도 라맛 레히와 엔학고레가 함께 있습니다. 내 이름을 새겨 두고 싶은 언덕과, 내 한계를 인정하고 엎드린 우묵한 자리입니다. 가정에서 더는 버틸 힘이 없다고 느끼는 부모, 일터에서 성과를 내고도 속이 텅 빈 직장인, 오래 섬기다 지쳐 버린 교회 일꾼 모두가 이 우묵한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덕보다 우묵한 곳에서 샘을 터뜨리십니다. 그리고 그 샘의 이름에 내 부르짖음보다 응답하신 분의 이름을 더 크게 새기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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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이번은 내게 허물이 없다고
스스로를 변호하며 불을 놓던
저희의 입과 손을 돌아봅니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사슬 속에서
힘없는 이웃이 먼저 타 버리지 않도록
오늘 저희가 먼저 한 고리를 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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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의 손에 묶여 넘겨진 구원자를 보며
저희를 위해 결박당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세상의 다스림을 평화라 부르며
진실을 말하는 이를 묶어 넘기던
저희의 길들여진 마음을 용서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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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박을 불탄 삼처럼 떨어뜨리시는
성령 하나님,
주께서 이루신 일 앞에서
내가 했다고 노래하지 않게 하시고
턱뼈의 산에 새긴 저희 이름을
기꺼이 내려놓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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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자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자랑하던 입으로 다시 부르짖을 때에도
마른 땅을 터뜨려 샘을 내어 주시니
그 샘물로 오늘 저희를 소생하게 하시고
응답하신 주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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