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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8:21-31 빼앗긴 신 앞의 탄식, 실로를 비껴간 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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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의 신상과 제사장을 챙긴 단 자손은 어린 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앞세우고 길을 떠납니다(21절). 미가는 이웃들을 불러 모아 뒤쫓으며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부르짖습니다(22-24절). 그러나 목숨을 잃게 하겠다는 협박 앞에서 그는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빈손으로 돌아갑니다(25-26절). 단 자손은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라이스를 칼날로 치고 불사르며, 구원할 자 없는 그 성읍을 단이라 부릅니다(27-29절). 그리고 새긴 신상을 세우고 모세의 손자 요나단의 자손을 제사장으로 삼아,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 내내 자기들만의 성소를 지킵니다(30-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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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단 지파의 정탐꾼들은 평온한 라이스를 보고 돌아와 하나님이 그 땅을 넘겨주셨다며 형제들을 부추겼고, 무장한 육백 명은 미가의 집에서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들고 나왔습니다. 미가의 제사장은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라는 제안에 마음이 기뻐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카메라를 돌려 모든 것을 잃은 미가의 얼굴을 비추고, 이어 불타는 라이스와 단에 세워진 새 성소를 차례로 보여 줍니다. 미가가 만든 것이라는 표현이 27절과 31절에 되풀이되며 결말부를 감싸므로, 이 결론의 초점은 땅의 정복보다 그 신상과 제사장이 어디로 가서 무엇이 되었는지에 놓입니다.

# 17-18장은 신명기 12장을 거꾸로 비추는 거울처럼 읽힙니다. 신명기는 산당을 허물고 우상을 무너뜨리라고 명했는데 이 본문에서는 신당과 우상이 세워지고, 신명기가 거듭 못 박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한 곳의 예배는 거듭 무시되며, 신명기가 금한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일이 그대로 행해집니다. 신명기 12장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평안히 살게 하실 때를 약속했으나, 단 지파는 그 평안을 약속의 땅이 아니라 남의 성읍에서 칼로 얻었습니다. 약속의 언어는 다 등장하는데 그 방향은 모두 뒤집혀 있습니다.

# 본문의 끝은 이야기의 시간 밖으로 멀리 뻗어 갑니다.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라는 말은 뒷날 북이스라엘이 무너지고 백성이 끌려간 때를 가리킵니다. 그 사이 나라가 갈라졌을 때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웠고(왕상 12:28-30), 아모스는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다며 맹세하는 자들이 엎드러지리라 선포했습니다(암 8:14). 은 이백으로 시작된 한 집의 신상이 한 지파의 성소가 되고 마침내 한 나라의 죄가 되는 긴 그림자가 마지막 두 절에 드리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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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4절 내가 만든 신들, 내게 남은 것

성부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분이시며,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도 끝까지 남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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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하는지라"(삿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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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자손은 어린 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앞세우고 길을 떠납니다. 행군할 때는 보통 가족과 재물을 뒤에 두어 지키는데, 이 특이한 대열은 뒤에서 쫓아올 미가를 대비한 것으로 읽힙니다. 자기들이 한 일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과연 집에서 멀리 떠났을 때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 단 자손을 따라붙습니다. 모였다고 옮긴 말은 부르짖다라는 동사의 수동형이어서, 이웃들이 스스로 모인 것이 아니라 미가에게 불려 나온 것임을 알려 줍니다. 그 동사는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쓰인 말입니다(3:9, 15). 그런데 미가는 하나님께가 아니라 이웃에게 부르짖고, 그 부르짖음은 빼앗긴 신상을 향해 있습니다.

단 자손은 얼굴을 돌려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고 묻습니다. 뻔히 알면서 떼는 시치미입니다. 그러자 미가가 터뜨립니다.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여기서 나의 신들과 내가 만들었다는 말이 한 문장에 묶여 있고, 만들다로 옮긴 동사가 창세기 1장 31절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다고 할 때 쓰인 바로 그 동사라고 짚습니다. 창조의 동사가 뒤집혔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이제 신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신이 사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택하고, 사람끼리 빼앗고 빼앗길 수 있는 물건으로 신이 그려집니다. 내가 만든이라는 말로 소유를 강조하는 순간, 그것들이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미가는 스스로 폭로한 셈입니다.

이 탄식에는 쓰라린 아이러니가 겹쳐 있습니다. 17장에서 미가는 어머니의 은 천백을 훔친 사람이었습니다. 신당의 신상보다 다섯 배도 넘는 은을 먼저 훔친 그가 이제 도둑의 손에 신상을 잃었으니, 속이려던 사람이 도리어 속은 꼴입니다. 훔친 은으로 시작한 예배는 훔쳐 가는 손에 들려 나갔습니다. 그는 이 상실 앞에서도 여호와를 찾지 않습니다. 그가 잃었다고 느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신들이었고, 그러므로 그에게 남은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보이는 물건이나 제도에 의지한 신앙은 그것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집니다.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말만 되뇌던 시대에 하나님은 그 성전마저 무너뜨리셨습니다(렘 7:4, 14). 예수님은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둑이 구멍을 뚫는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 하시고(마 6:19), 자기 양들을 주신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10:29). 빼앗길 수 있는 신과 빼앗을 수 없는 아버지, 그 둘 사이의 거리를 본문은 미가의 빈손으로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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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날에 미가처럼 묻습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그런데 그 물음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살펴야 합니다. 무너진 사업, 떠나간 관계, 잃어버린 건강 앞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그동안 그것들이 내 마음의 가장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상실은 아프지만, 동시에 내가 무엇을 신처럼 붙들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거울이 됩니다. 한국교회도 예배당과 프로그램과 교세라는 보이는 것들을 오래 의지해 왔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모이는 예배가 멈추었을 때 많은 이들이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건물과 제도가 멈추어도 남아 계시는 하나님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무엇을 잃더라도 하나님만은 잃지 않는 교회, 빈손이 되어도 부르짖을 대상을 아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내 삶에서 빼앗기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그 하나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손 안에 있는 것만이 끝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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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6절 강한 자가 옳은 세상

성자 하나님은 힘센 자가 이기는 세상 한복판에 약한 자로 오셔서, 힘이 곧 정의라는 논리를 십자가로 뒤집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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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단 자손이 자기 길을 간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삿 18: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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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자손의 대답은 짧고 차갑습니다.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어제 본문에서 그들은 레위 청년에게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고 했습니다(18:19). 회유로 입을 막던 그들이 이제 미가의 항의를 목숨으로 위협해 뭉갭니다. 이 이야기에서 약한 자의 목소리는 두 번 막힙니다. 한 번은 달래는 말로, 한 번은 협박으로 막힙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에게 말할 권리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네 목소리를 들리게 하지 말라는 말은 한마디로 시끄럽다, 조용히 하라는 위협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노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는 마음이 쓰라린 자들, 영혼이 쓴 자들이라는 표현이고, 사무엘하 17장 8절에서 새끼를 빼앗긴 곰의 격분을 묘사할 때 쓰인 말과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끼를 빼앗긴 쪽은 단 자손이 아니라 미가입니다. 빼앗은 자들이 빼앗긴 자의 분노를 앞세웁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언어를 가로채는 것, 이것이 폭력의 오래된 문법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다고 적습니다. 옳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힘센 사람이 이기는 상황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누르는 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왕 없는 시대의 실제 법이었습니다. 단 지파의 행보 어디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그들의 정복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힘이 곧 정의라는 논리에서 나온 잔인한 행위였습니다.

박유미 교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미가의 잘못된 신앙을 그가 의지하던 것의 상실과 죽음의 위협으로 심판하셨다고 읽습니다. 복을 받으려고 만든 신상과 제사장이 오히려 재앙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사기 전체는 약한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구원자를 세우시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압제자의 자리에 서 있고, 짓밟힌 쪽은 같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앞부분의 가나안 왕들이 하던 일을 이제 이스라엘이 자기 형제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우리를 전혀 다른 한 분에게로 이끌어 갑니다. 강한 자들이 약한 자의 입을 막는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끌려가실 때 입을 열지 않으셨고, 칼을 든 제자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다는 말씀처럼(고전 1:27), 십자가는 힘이 곧 정의라는 세상의 문법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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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자손의 말은 오늘도 여러 모양으로 들립니다. 네 목소리를 들리게 하지 말라. 직장에서 부당함을 말하는 사람에게, 가정에서 아픔을 꺼내는 가족에게, 교회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성도에게 이 말이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목소리가 큰 쪽, 수가 많은 쪽, 가진 것이 많은 쪽이 옳은 쪽이 되는 일은 왕 없는 시대만의 일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도 교회 안의 약한 이들이 목소리를 냈을 때 교회의 덕을 해친다며 입을 막았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약한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불편한 말이라도 끝까지 들어 주고, 그 말 속에 하나님이 보내신 경고가 있는지 분별하는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또 개인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내가 누군가보다 강한 자리에 있을 때 그 힘으로 상대의 입을 막은 적은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내가 약한 자리에 있다면, 강한 자를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끝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미가는 사람에게만 부르짖었지만 우리에게는 약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억울함을 되갚을 힘이 없을 때, 그 억울함을 들고 사람의 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약한 자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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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29절 구원할 자 없는 성읍

삼위 하나님은 건져 줄 이 없는 이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약한 자의 평온을 짓밟은 승리를 결코 당신의 승리라 부르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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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삿 18: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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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자손은 미가가 만든 것과 제사장을 데리고 라이스에 이릅니다. 화자는 세 번째로 그들을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이라 부릅니다. 한가하다로 옮긴 말은 조용하다, 소동이 없다는 뜻이고 걱정이 없다로 옮긴 말은 신뢰하다, 믿다라는 뜻입니다. 라이스 사람들은 분쟁이나 폭력 없이 서로를 믿으며 살아가던 이들이었습니다. 그 신뢰의 낱말이 7절과 10절과 27절에 세 번 되풀이되며 독자의 마음을 그들 쪽으로 기울이고, 단 자손의 이유 없는 폭력을 더 또렷하게 드러냅니다. 의심하지 않던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단 자손은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릅니다. 칼날로 치고 불을 놓았다는 표현은 본래 여호와의 전쟁을 묘사할 때 쓰인 말입니다(신 13:15-16; 수 11:11). 화자는 일부러 거룩한 전쟁의 어휘를 빌려 와 이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 아님을 반어로 드러냅니다. 가나안 정복이 정당했던 까닭은 가나안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였기 때문인데, 단 지파는 죄악된 가나안은 물리치지 못한 채 만만한 라이스를 잡고 있을 뿐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하고, 갈렙이 아낙 자손의 땅을 얻고, 드보라가 철 병거 구백 대를 꺾고, 기드온이 삼백 명으로 미디안을 이긴 신앙의 유산을 그들은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강한 아모리 앞에서는 물러났고, 약한 라이스 앞에서는 잔인했습니다.

28절은 이 참극의 까닭을 한 줄로 적습니다.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구원할 자로 옮긴 말은 건져 내는 자를 뜻합니다. 사사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자의 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옷니엘과 에훗 같은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책의 끝자락에서 구원할 자가 없는 쪽은 이스라엘의 칼 아래 놓인 이방 성읍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야기가, 이스라엘이 구원할 자 없는 이들을 짓밟는 이야기로 뒤집혔습니다. 단 자손은 성읍을 다시 세우고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부릅니다. 라이스라는 이름은 사자를 뜻하는데, 일찍이 모세는 단을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 새끼라고 축복했습니다(신 33:22). 사자의 기백으로 싸워야 할 곳은 버려두고, 사자라는 이름의 무방비한 성읍을 삼켜 자기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 대목은 구원할 자가 없던 자리에 찾아오신 한 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롬 5:6). 단 자손은 약한 성읍을 찾아가 칼로 쳤지만, 그리스도는 연약한 자를 찾아가 대신 맞으셨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구원할 자 없는 이웃 곁에 서는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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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도 구원할 자가 없는 라이스들이 있습니다. 동맹도 없고 목소리도 작아 무엇을 빼앗겨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이들입니다. 일터의 비정규직 노동자, 말이 서툰 이주민, 돌봐 줄 이 없는 홀몸 어르신, 보호막이 약한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평온은 힘 있는 자들에게 곧잘 기회가 됩니다. 한국교회도 개발과 성장의 시대를 지나며 누군가의 평온한 터전 위에 건물을 세운 일은 없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이 지역에서 구원할 자 없는 이들의 곁에 서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이웃의 사정을 알아 두는 것, 도움을 청할 데 없는 이에게 연락처 하나가 되어 주는 것, 억울한 일을 당한 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것이 구원자를 닮는 시작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가 얻은 것 가운데 누군가의 무방비 위에 세운 것은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내 이름을 붙인 성읍의 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화자가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였더라고 굳이 덧붙였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덮어 버린 이름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얻은 자리의 본 이름을 기억할 때 비로소 감사와 겸손과 책임이 함께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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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1절 모세의 손자와 실로의 하나님의 집

성령 하나님은 혈통이나 전통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이들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참된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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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삿 18: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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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자손은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웁니다. 그리고 이야기 내내 이름 없이 레위 청년, 그 제사장으로만 불리던 사람의 정체가 마지막에야 드러납니다.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것을 엄청난 충격이라 부르며, 히브리어 본문에 모세의 자음 사이로 작은 글자 하나를 매달아 넣어 므낫세로 읽히게 하려 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설명합니다. 모세의 이름이 우상 숭배와 엮이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던 후대 서기관들의 부끄러움이 글자 하나에 남은 것이며, 모세가 원문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고 판단합니다.

화자가 이 정체를 끝에 가서야 밝힌 것은 제사장 계층에 퍼진 가나안화를 알리기 위함으로 읽힙니다. 가장 이름난 가문까지 영적으로 부패했다는 사실은, 가나안에 들어온 지 백 년도 되지 않아 이스라엘이 얼마나 깊이 가나안을 닮아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부록의 사건들은 출애굽을 기준으로 삼대에 해당합니다. 광야에서 율법을 받은 할아버지의 손자가 은 열 세겔에 고용된 신당 제사장이 되었고, 그 자손이 대를 이어 우상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혈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믿음은 피로 물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계보는 뒷날 여로보암이 단에 성소를 세울 때 나름의 명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31절은 짧지만 날카롭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여기서 하나님의 집으로 옮긴 말과 17장 5절에서 미가의 신당으로 옮긴 말은 정관사 하나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실로의 성막을 회막이라 부를 수도 있었는데, 굳이 미가의 신당과 같은 말에 정관사를 붙여 부름으로써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실로에 있는 그 집만이 참 하나님의 집임을 드러냅니다. 실로를 이렇게 언급한 것은 단 지파의 우상 숭배에 대한 간접적이되 치명적인 비판입니다. 여호수아가 회막을 세우고 땅을 분배한 곳, 뒷날 사무엘이 자라날 곳이 실로였습니다(수 18:1; 삼상 1:3). 참된 집이 멀지 않았는데도 단 자손은 자기들을 위해 만든 성소를 택했습니다. 이 결말은 절차를 그럭저럭 갖춘 성공담처럼 오래 이어졌지만, 그 속에는 매우 미심쩍은 것이 있었습니다. 오래 지속된 것이 참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이른다 하시고(요 4:21-24), 자기 육체를 성전이라 하셨습니다(요 2:21).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습니다(고전 3:16). 성령께서는 우리를 자기를 위해 세운 성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집으로 지어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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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신상을 세웠다는 말은 오늘 우리를 향한 질문입니다. 우리 예배는 누구를 위하여 세워져 있습니까. 내 필요와 취향과 편의를 채우는 예배라면, 아무리 오래 이어지고 아무리 전통이 깊어도 단의 성소를 닮아 갈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믿음의 명문가, 몇 대째 신앙 가문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써 왔습니다. 소중한 유산이지만, 모세의 손자가 신당 제사장이 된 이야기는 그 유산이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물려줄 것은 신앙의 이름표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길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지켜 온 것들을 말씀 앞에 다시 세워 보십시오. 교회의 관행, 가정의 습관, 내 신앙의 오래된 틀 가운데 실로가 아니라 단을 향해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집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우리 몸과 공동체가 그 집이 되도록 오늘 한 걸음 실로 쪽으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그 한 걸음은 대단한 결단이 아니어도 됩니다. 내 편의를 위해 미뤄 둔 주일 예배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 가정 예배의 식탁에 성경을 다시 펴는 것, 자녀에게 내 신앙의 이력 대신 오늘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 실로를 향한 발걸음입니다.

*

# 거둠의 기도

주님,

내가 만든 신들을 빼앗기고

이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울부짖던 날들을 돌아봅니다.

빼앗길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두었던 저희를 용서하시고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아버지 손에

저희를 다시 맡기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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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로 오신 예수님,

강한 자가 옳은 세상에서

저희가 누군가의 입을 막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목소리가 작은 이의 말을

끝까지 듣게 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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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하나님,

구원할 자 없는 성읍의 신음을

들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연약할 때 저희를 찾아오신 사랑으로

광양사랑의교회가 이 땅의 라이스 곁에

건져 주는 손으로 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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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저희를 위하여 세운 성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집이 되게 하옵소서.

이름과 전통을 자랑하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하시며

오늘 한 걸음 실로를 향해 돌이키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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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3 사사기 09:22-45 삼 년 뒤에 보내신 영, 소금 뿌린 성읍 평화의길벗 2026.09.20 45
1272 사사기 09:07-21 제 열매를 버리지 않은 나무들, 그늘 없는 그늘 평화의길벗 2026.09.19 54
1271 사사기 09:01-06 골육이라 부른 입, 한 바위 위의 피 평화의길벗 2026.09.18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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