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01:19-27 경청과 행함과 경건
*
시험을 이기는 길이 지혜와 기도임을 밝힌 야고보는 이제 말과 말씀을 대하는 자세로 넘어갑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라고 합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니,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벗어 버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권합니다(19-21절).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거울로 제 얼굴을 보고 돌아서서 곧 잊는 사람과 같지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며 실천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22-25절).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경건은 헛것이고, 참된 경건은 환난 중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26-27절).
*
# 어제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고백으로 끝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말씀에서 다시 출발합니다. 말씀으로 태어난 사람은 말씀을 들으며 자라야 하고, 들은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어제가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를 보여 주었다면, 오늘은 그 아버지의 말씀 앞에서 자녀가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의 말씀, 심어진 말씀, 온전한 율법이 한 줄로 이어져 있습니다. 시험을 이기는 첫째 길이 지혜를 구하는 기도였다면, 둘째 길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 흩어진 성도들은 날마다 거친 말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부자들의 말, 법정에서 쏟아지는 고발, 회당과 장터에서 듣는 조롱이 있었습니다. 억울한 사람은 말이 빨라지고 화가 앞섭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시험이 길어지자 서로를 향한 말이 날카로워졌을 것입니다. 한편 회당 전통에 익숙한 그들은 말씀을 듣는 일에는 누구보다 익숙했지만, 들은 말씀이 삶으로 옮겨지지 않는 신앙의 습관도 함께 지니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그 익숙함이 가장 위험한 시험이 될 수 있음을 압니다.
# 오늘 본문에는 지혜문학과 산상수훈이 겹겹이 울립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권면은 말을 아끼는 자가 지식이 있다고 한 잠언의 오랜 지혜를 닮았습니다.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 행하지 않는 자를 견주는 대목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의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거듭 외쳐 온 하나님 백성의 표지입니다. 들음과 행함과 돌봄이 따로가 아니라 한 신앙의 세 얼굴입니다.
*
# 19-21절 심어진 말씀을 받으라
성령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말씀을 심으시고 그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
야고보는 사랑하는 형제들을 부르며 세 가지를 당부합니다. 듣기는 속히, 말하기는 더디,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옷을 벗듯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벗어 버리고,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말씀, 이미 마음에 심어진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겸손히 받으라고 권합니다(19-21절). 들음이 먼저이고 말은 나중입니다.
.
듣기는 속히 하라는 말은 먼저 사람의 말을 잘 들으라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앞 절과 이어 읽으면 그 대상이 더 분명해집니다. 우리를 낳은 진리의 말씀을 먼저, 그리고 곧바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말은 귀로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순종을 품고 있습니다. 시험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기보다 내 속에서 들끓는 소리를 먼저 듣습니다. 그 소리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는 원망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더디 하라는 권면은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는 전도자의 경고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고 우리가 대답하는 것이 신앙의 바른 문법입니다. 무엇을 먼저 듣느냐가 그 사람의 말을 결정합니다. 욕심의 소리를 먼저 들은 입에서는 원망이 나오고, 말씀을 먼저 들은 입에서는 감사와 분별이 나옵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이유는 사람의 성냄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분노가 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 앞에서 보이신 주님의 분노처럼 불의를 향한 거룩한 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경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내 욕심이 꺾일 때 터져 나오는 분노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성내기를 속히 했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지 못했습니다. 핍박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도 곧바로 되받아치기보다, 그 말을 통해서도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를 돌아보는 것이 의를 이루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것을 신뢰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21절의 벗어 버리라는 말은 옷을 벗는다는 뜻이고, 더러운 것은 얼룩진 옷을 가리킵니다. 모든, 넘치는이라는 수식은 말씀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만큼 마음이 가득 차 있는 형편을 보여 줍니다. 마음을 비운 자리에 받아야 할 것은 심어진 말씀입니다. 심어졌다는 말은 밖에서 덧붙인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린 씨앗처럼 이미 안에 자리 잡았다는 뜻입니다. 새 언약의 날에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예레미야의 약속이 여기서 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실 때 이미 말씀의 씨앗을 심으셨고, 그 씨앗이 자라 우리 영혼을 끝까지 구원해 가십니다. 온유함으로 받는다는 것은 그 씨앗이 자라도록 굳은 마음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는 태도입니다. 온유는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고삐를 맡긴 힘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하셨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
우리에게는 사람들과 미디어와 SNS를 통해 날마다 수많은 말이 쏟아집니다. 그 말들을 잘 분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때로 상처가 되는 말 앞에서 쉽게 낙심하거나 극단적인 생각에 빠지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을 통해서도 나를 빚으시는 주님을 신뢰한다면, 비난 속에서도 내 안의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발견하고 버리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독한 말을 마음에 오래 담아 두지는 맙시다. 마음에 받고 담아야 할 말은 우리 영혼을 구원할 진리의 말씀입니다. 가정에서는 식구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일부터 시작합시다. 말허리를 자르지 않고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집안의 공기가 달라집니다. 일터에서는 화가 날 때 대답을 한 박자 늦추고, 그 사이에 오늘 묵상한 말씀 한 구절을 떠올려 봅시다. 우리교회가 서로의 말을 속히 듣고 더디 판단하는 공동체, 말씀을 먼저 듣고 나중에 말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회의와 모임에서도 서둘러 결론을 내기보다 함께 말씀을 읽고 잠잠히 기도하는 시간을 먼저 가집시다. 오늘 내 안에 가득 찬 말은 누구의 말인지, 내 마음에 품은 말이 무엇인지 조용히 점검해 봅니다. 말씀보다 뉴스와 알림을 먼저 여는 아침이 이어지고 있다면, 내일 아침에는 휴대전화보다 성경을 먼저 펴 봅시다. 무엇을 먼저 듣느냐가 하루의 말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오늘 누군가에게 서운한 말을 들었다면, 대꾸하기 전에 그 말 속에 나를 돌아보게 하는 한마디가 있는지 먼저 살펴봅시다. 그래도 남는 상처는 주님께 가져가 맡기고, 그 사람을 위해 짧게라도 기도해 봅시다. 미운 사람을 위해 드리는 짧은 기도가 내 안의 분노를 가장 빨리 식혀 줍니다. 기도하는 동안 성령께서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을 먼저 만지십니다.
*
# 22-25절 듣고 행하는 복된 자
성자 예수님은 말씀을 들여다보고 행하는 자에게 참된 자유와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
야고보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명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로 제 얼굴을 보고 돌아서서 그 모습을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그 곁에 머무는 사람은 듣고 잊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며, 그가 행하는 바로 그 일에서 복을 받습니다(22-25절). 들음은 행함으로 완성됩니다.
.
행하는 자가 되라는 말은 무엇을 한 번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되라는 부름입니다. 일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존재와 성품의 문제입니다. 듣기만 하는 자로 옮긴 말은 강연을 듣는 청중을 가리킬 때 쓰던 표현입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고 돌아서는 것만으로 신앙이 자란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입니다. 야고보는 1장에서만 속인다는 말을 세 번 씁니다. 하나님을 탓하며 속고, 듣기만 하며 속고, 혀를 다스리지 못하면서 경건하다고 여기며 속습니다. 들음과 행함은 저절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려 존재가 바뀔 때 비로소 행함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을 다그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마음에 받으라고 했습니다. 행함은 노력으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심어진 말씀이 맺는 열매입니다.
거울 비유는 이 본문의 중심이고,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그림입니다. 당시 거울은 청동을 닦아 만든 것이어서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습니다. 그래도 사람은 거울을 보며 얼굴을 매만집니다. 문제는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생긴 얼굴로 옮긴 말에는 출생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비유가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단지 외모가 아니라,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본래의 얼굴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누구의 자녀로 태어났는지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그 얼굴을 보고도 세상으로 돌아가 다른 얼굴로 산다면 잊어버린 것입니다. 주일에 본 얼굴과 월요일에 사는 얼굴이 다를 때 우리는 거울 앞에 섰다가 돌아선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자주 거울을 보아도 기억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반대로 복 있는 사람은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봅니다. 이 말은 허리를 굽혀 깊이 들여다본다는 뜻으로, 부활의 아침 빈 무덤 안을 몸을 굽혀 들여다보던 제자의 몸짓에 쓰인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곁에 계속 머뭅니다. 한 번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살피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 율법은 사람을 옭아매는 규칙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법입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말씀은 정죄에 갇힌 사람을 풀어 주고, 일그러진 형상을 본래 얼굴로 회복시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여기 겹쳐집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일 속에서 복을 받습니다. 복은 행함 뒤에 따로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그 삶 자체가 복이라는 뜻입니다.
.
나를 빚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알기만 하고 배우기만 하면서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씀을 통해 나의 부족함이 발견되거든 끊고, 격려하시거든 위로를 받고, 사명을 주시거든 충성하며 순종하는 것이 내게 능력이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일을 자유를 빼앗는 성가신 일로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학교를 지나는 우리 여정을 인도하시는 주의 말씀은 불편한 짐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오랜 묵상과 배움과 지식을 가지고도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자기 나라를 사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고,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는 오늘 읽은 말씀 한 구절을 식탁에서 나누고, 그 말씀대로 해 본 작은 일 하나를 저녁에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일터에서는 말씀이 비춘 나의 얼굴, 곧 하나님의 자녀다운 정직과 성실을 잊지 않고 하루를 살아 냅시다. 우리교회가 설교를 소비하는 청중이 아니라, 들은 말씀을 손과 발로 번역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일에 들은 말씀을 수요일과 금요일에 다시 꺼내 서로 묻고 격려하는 목장이 되면 좋겠습니다. 주의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묵상은 거울 앞에 오래 머무는 시간입니다. 하루에 한 구절이라도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고, 그 구절이 비춘 내 얼굴을 저녁까지 기억해 봅시다. 그렇게 하루하루 쌓인 기억이 말씀을 닮은 얼굴을 만듭니다. 혹시 말씀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삶에 아무 변화가 없다고 느끼신다면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늘 들은 말씀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를 골라 그대로 해 보는 데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작은 순종이 다음 말씀을 듣는 귀를 엽니다.
*
# 26-27절 참된 경건의 길
성부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을 돌보는 경건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
야고보는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는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두 가지로 보여 줍니다.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그리고 자기를 지켜 세상의 흐름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말과 행함과 거룩이 한 사람 안에서 하나로 묶입니다(26-27절). 경건은 삶 전체의 일입니다.
.
경건으로 옮긴 말은 예배와 제의와 종교적 규범에 충실한 모습을 가리킬 때 쓰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바리새인 시절을 말할 때도 이 낱말을 썼습니다. 그러니 야고보는 종교 생활에 열심인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혀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헛것이라고 합니다. 재갈은 말의 입에 물려 온몸을 다스리는 도구입니다. 혀에 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내 혀의 고삐를 말씀의 손에 넘겨 드리는 일입니다. 냉소와 비난과 험담이 쉬지 않고 나오는 입이 예배당에서는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경건의 모양과 능력이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혀의 문제는 3장에서 다시 길게 다루어집니다.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마음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내가 얼마나 거친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야고보는 참된 경건을 설명하면서 기도 시간이나 예배 출석을 먼저 꼽지 않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을 꼽습니다. 1세기의 고아와 과부는 남성의 보호가 사라져 생계 자체가 위태로운 가장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돌본다는 말은 찾아가 살핀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신다고 할 때 쓰던 말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시편은 노래합니다. 그러니 약한 이를 찾아가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말이 이 경건의 기준을 정합니다. 사람의 평판이 아니라 아버지의 눈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경건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지킨다는 말은 저절로 되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속은 하나님을 떠나 돈과 힘과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질서를 말합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그 흐름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뜻을 따라 구별된 삶을 삽니다. 사회적 경건과 개인적 거룩은 둘로 나뉘지 않습니다. 약한 이를 돌보되 세상의 방식에 물들지 않고, 거룩을 지키되 약한 이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 온전한 경건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장 온전히 사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죄인과 병자와 과부의 아들을 찾아가셨고, 세상의 영광을 주겠다는 유혹 앞에서 끝까지 아버지의 뜻을 붙드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안에 심어진 말씀이 되어 오늘도 우리를 경건한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
온전함과 참된 경건은 언행심사가 하나 되는 데서 드러납니다. 말과 행동과 생각과 일이 따로 노는 사람은 어떤 모양을 갖추어도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말하기를 더디 할 뿐 아니라 말한 것을 신실하신 하나님처럼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에 신뢰를 잃은 사람은 무엇을 해도 이웃 앞에서 권위를 잃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를 잃은 고아였고, 신랑 되신 주님을 잃은 과부였으며,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나그네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시고 보배로운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약한 이들을 향한 섬김은 그 은혜 앞에서 드리는 신앙고백이 됩니다.
가정에서는 내가 한 약속을 지키는 작은 신실함부터 회복합시다. 일터에서는 아무도 챙기지 않는 동료, 늘 밀려나는 사람의 이름을 먼저 기억해 봅시다. 우리교회가 홀로 사는 어르신과 한부모 가정, 낯선 땅에 와서 일하는 이웃을 찾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돌봄을 기억하는 교회는 돌봄을 멈출 수 없습니다. 언행심사의 일치, 약한 이를 향한 돌봄, 세속에 물들지 않는 거룩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정진해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주에 한 사람이라도 정해서 전화를 걸거나 찾아가 봅시다. 거창한 봉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고 안부를 묻는 그 한 걸음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드리는 가장 정결한 경건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내 입에서 나간 말을 저녁에 돌아보며, 누군가를 깎아내린 말이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 다시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넵시다. 혀에 재갈을 물리는 일은 그렇게 작은 데서 시작됩니다.
*
# 거둠의 기도
우리를 구원하사 자유롭게 하신 주님,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자녀답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게 하옵소서.
.
나를 빚으시는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여
주의 의를 이루어 가게 하시고
수많은 말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온유함으로 받게 하옵소서.
.
나를 자유롭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살리는 말씀을 잘 들을 뿐 아니라
허리 굽혀 들여다보고 그 곁에 머물러
말씀을 따라 온전히 행하는 복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
참된 경건의 길을 잊지 않게 하시고
혀에 재갈을 물려 말과 삶이 하나 되며
환난 중의 고아와 과부를 찾아가고
세상에 물들지 않는 구별된 삶으로
우리교회와 저의 날들을 채워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