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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1:13-25 왕이 없던 시대의 끝, 참 왕을 기다리는 베들레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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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은 림몬 바위에 숨은 베냐민 자손에게 평화를 공포하고 야베스 길르앗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주지만, 아직도 이백 명이 부족합니다(13-15절). 맹세 때문에 자기 딸을 줄 수 없는 장로들은 실로에서 해마다 열리는 여호와의 명절을 떠올리고, 베냐민 자손에게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춤추러 나오는 딸들을 붙들어 가라고 명령합니다(16-21절). 아버지나 형제가 항의하면 너희가 자의로 준 것이 아니니 죄가 없다고 달래겠다는 말까지 준비합니다(22절). 베냐민 자손은 그대로 행하여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고, 이스라엘 자손도 각기 흩어집니다(23-24절). 사사기는 왕이 없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한 문장으로 막을 내립니다(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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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미스바의 맹세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야베스 길르앗을 치고,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살려 실로 진영으로 데려왔습니다. 화자는 그곳을 가나안 땅이라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의 뒷마무리이자 사사기 전체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림몬 바위에는 넉 달을 숨어 지낸 베냐민 남자 육백 명이 있었고, 끌려온 여인은 사백 명이었습니다. 이백이라는 숫자의 틈이 다시 새로운 폭력을 부릅니다.

# 실로는 에브라임 산지의 성읍으로, 여호수아 시대에 회막을 세우고 남은 일곱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준 곳이었습니다. 사무엘상 첫머리에서 한나가 해마다 올라가 기도하던 곳도 실로입니다. 율법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친 뒤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라고 명합니다. 가을걷이와 포도 수확을 마친 계절에 백성은 초막을 짓고 즐거워했고, 여인들은 포도원 가까이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가장 기뻐야 할 감사의 명절이 오늘 본문에서는 계략의 무대가 됩니다. 뒷날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처음 자기 이름을 두셨던 실로에 가서 그 행한 것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 사사기는 처음과 끝이 서로 마주 보도록 짜인 책입니다. 두 곳 모두에서 이스라엘은 누가 먼저 올라가 싸울지를 묻고 유다가 먼저라는 응답을 듣지만, 처음의 상대는 가나안 족속이고 마지막의 상대는 동족 베냐민입니다. 처음에는 갈렙의 딸 악사의 복된 결혼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살육과 납치로 얼룩진 결혼이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라는 후렴이 마지막 다섯 장을 네 번 묶습니다(17:6; 18:1; 19:1; 21:25). 구원자가 세워질 때마다 땅이 평온했으나 그 평온은 매번 짧아졌고, 그 나선형의 내리막이 오늘 본문에서 바닥에 닿습니다. 바닥에 닿은 이야기만이 다음 책으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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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8절 평화 뒤에 남은 틈

성부 하나님은 우리가 벌린 틈을 그분의 이름 뒤에 숨기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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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사람을 보내 평화를 공포하자 베냐민 사람들이 돌아옵니다. 회중은 야베스 길르앗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건넵니다. 그러나 남자는 육백 명, 여자는 사백 명이어서 아직도 부족했습니다. 백성은 뉘우치면서 그 까닭을 여호와께서 지파들 가운데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장로들은 남은 자들에게 아내를 얻게 할 길을 의논하지만, 딸을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던 자기들의 맹세에 막힙니다(13-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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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공포한다는 말은 더 이상의 위협은 없으리라는 선언입니다. 넉 달 동안 바위틈에 숨어 지낸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에는 값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건네진 선물은 부모와 형제를 잃고 끌려온 딸들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 전쟁 포로를 아내로 삼는 관습이 있었고 신명기에도 여자 포로에 관한 규정이 있지만, 동족을 포로로 삼아 화해의 선물로 건네는 일은 구약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습니다. 한쪽의 평화가 다른 쪽의 짓밟힘 위에 세워졌습니다. 샬롬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온전함인데, 이 평화는 약한 이들의 자리를 빼앗아 강한 이들의 자리를 채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아직도 부족했습니다. 백성은 다시 뉘우칩니다. 여기 쓰인 동사는 잘못을 인정한 회개라기보다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는 정도의 뜻입니다. 그리고 15절 끝의 문장이 눈에 걸립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이 구문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틈을 만드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 페레츠는 성벽이 무너져 생긴 틈, 갈라진 자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분명 역사의 주인이시고 베냐민이 당한 심판도 그분의 주권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틈을 벌린 칼은 자기들 손에 있었는데, 그들은 그 틈을 하나님의 일로 돌리고 싶어 합니다. 더 눈여겨볼 것은 그들이 안타까워한 것이 사라지게 된 한 지파의 아픔이 아니라 열둘이라는 숫자가 깨지는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동족의 고통에 함께 아파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모양이 흐트러지는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17절에서 장로들은 살아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 쓰인 말은 하나님이 주신 유업을 뜻하는 나할라가 아니라 소유의 뜻이 더 강한 여룻샤입니다. 지파의 소유와 계보를 지키는 일이 가장 큰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18절에서는 맹세가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뜻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맹세해 놓고는, 이제 그 맹세 때문에 임할 저주가 두렵다고 말하며 책임을 하늘로 밀어 올립니다.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20장에서 이스라엘은 적어도 세 번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21장에서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습니다. 질문도 대답도 모두 그들이 말했다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 여쭈며 시작한 책이 하나님께 묻지 않는 회의로 끝나 갑니다. 기도가 멈춘 자리에서 사람은 틈을 메우려다 더 큰 틈을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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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평화를 공포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갈등이 지나가면 서둘러 화해를 선언하고 다 정리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가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는 잘 묻지 않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쪽과 수습한 쪽이 악수를 나누는 동안, 그 사이에서 상처 입은 사람은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평화를 서둘러 공포하는 교회가 아니라, 평화의 값을 누가 치렀는지 끝까지 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만든 틈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로 덮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 모든 일을 다스리시지만, 그 믿음이 내 잘못을 가리는 휘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관계가 깨졌을 때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그 틈을 어떻게 벌렸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 한 걸음이 회개의 시작이고, 그 자리에서만 하나님의 주권은 핑계가 아니라 위로가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우리끼리 묻고 우리끼리 대답하는 회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가정의 대화에서도, 일터의 결정에서도 하나님께 여쭙는 자리가 비어 있다면 그 모임은 21장의 장로 회의를 닮아 가고 있습니다. 오늘 내려야 할 결정이 있다면 한 번이라도 멈추어 주님께 여쭙고, 그 결정이 가장 약한 사람에게 어떤 무게로 떨어질지를 헤아려 보십시오. 림몬 바위의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공포되었지만, 야베스 길르앗의 딸들에게는 아무도 평화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평화의 소식이 누구에게까지 닿고 있는지를 오늘 한 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참된 평화는 선언으로 오지 않고,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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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절 포도원에 숨은 손

성자 하나님은 신부를 빼앗지 않으시고 자기를 내어 주어 얻으시는 참 신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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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들은 실로에서 해마다 열리는 여호와의 명절을 떠올리고 그곳으로 가는 길까지 일러 줍니다. 그리고 베냐민 자손에게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춤추러 나오는 실로의 딸들을 각각 하나씩 붙들어 아내로 삼으라고 명령합니다. 아버지나 형제가 시비하면 자의로 준 것이 아니니 죄가 없다고 달래 주겠다는 말까지 준비합니다. 베냐민 자손은 그대로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을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고 자기 기업으로 돌아갑니다(19-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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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절은 실로의 위치를 유난히 자세히 설명합니다.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이라는 것입니다. 한때 회막이 서 있던 중심 성소를 이렇게 길을 일러 주듯 설명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스라엘의 신앙이 얼마나 흐려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의 명절이라는 표현은 구약에 몇 번밖에 나오지 않는 말이고, 절기를 지키는 일은 출애굽의 목적으로 제시될 만큼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깊이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것이 어떤 절기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장로들은 그 축제를 여호와의 명절이라 불러 자기들의 계략에 신앙의 옷을 입혔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절기가 경솔한 맹세가 낳은 문제를 푸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지도 흐려진 축제에 거룩한 이름만 남은 것은, 이 공동체가 이미 이름만 성소인 자리에 서 있다는 표지입니다.

명령은 구체적입니다. 포도원에 숨어 보다가, 딸들이 춤을 추러 나오면,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라. 여기 쓰인 동사 하타프는 구약에서 이곳과 시편 10편에만 나오는데, 시편에서는 사자가 굴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물로 짐승을 포획하듯 확실히 붙잡는다는 말입니다. 장로들은 베냐민 남자들에게 여자들을 먹잇감 사냥하듯 잡아가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사람을 납치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던 토라의 말씀은 무시하고, 자기들의 맹세만은 지켜야 한다며 이 야만적인 방법을 해결책으로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말 가운데 무엇을 지킬지를 고르는 순간, 그들은 자기 말을 골랐습니다. 지켜야 할 것을 버리고 버려야 할 것을 지킨 셈입니다.

22절은 가장 어두운 대목입니다. 시비하다로 옮긴 말은 주로 법정에서 쓰이는 낱말입니다. 장로들은 법적 항의를 미리 막을 논리까지 준비했습니다. 딸을 준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니 맹세를 어긴 것이 아니라는 셈법입니다. 범죄를 은혜라는 말로 포장하여 피해자에게 대의를 위한 희생을 강요한 것입니다. 더 아픈 것은 실로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항의할 것으로 예상된 내용조차 딸이 납치당한 폭력이 아니라, 자신들이 맹세를 어겨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문제였다는 점입니다. 23절에서 붙들다로 옮긴 말은 21절과 다른 가잘인데, 이 말은 다른 곳에서 빼앗다, 강탈하다로 번역됩니다. 춤추던 딸들의 모습은 아버지의 서원에 삼켜진 입다의 딸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사기는 한 여인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수많은 여인의 빼앗김으로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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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명절이 사람의 계산에 쓰이는 일은 오늘도 일어납니다. 예배와 절기와 행사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리가 아니라 조직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이 될 때, 우리는 실로의 장로들을 닮아 갑니다. 성도의 헌신을 목표를 이루는 숫자로만 셈할 때, 사람은 어느새 도구가 됩니다. 사람을 셈하기 시작하면 이름을 부르는 일이 먼저 사라집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은혜라는 말의 오용입니다. 상처 입은 이가 문제를 제기할 때 은혜롭게 덮자, 교회를 생각해서 참아 달라는 말로 입을 막은 일이 우리 가운데 적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22절의 장로들이 한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은혜는 피해자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가해자를 진실 앞에 세우고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교회가 은혜라는 말을 결코 누군가의 입을 막는 데 쓰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라며 한 사람의 억울함을 덮어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덮어 둔 억울함은 사라지지 않고 다음 세대의 마루 밑에 그대로 남습니다. 일터에서도 모두를 위해서라는 말로 한 사람의 권리를 빼앗는 결정에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무언가를 빼앗아 얻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 주어 관계를 얻는 사람입니다. 우리 곁에도 춤추던 자리에서 갑자기 빼앗김을 당한 이들이 있습니다. 기뻐해야 할 자리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 교회에서 오히려 마음을 다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 자기를 내어 주신 신랑을 따르는 신부 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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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5절 왕이 없던 시대의 끝

삼위 하나님은 어둠의 끝에서도 베들레헴에 참 왕의 길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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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자손이 여자들을 데리고 떠나자, 이스라엘 자손도 각기 자기 지파와 가족에게로, 각기 자기 기업으로 돌아갑니다.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수습되었습니다. 지파의 수는 채워졌고 전쟁은 끝났고 사람들은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빼앗긴 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사기는 왕이 없어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한 문장으로 막을 내립니다(24-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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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라는 말이 24절에 두 번, 25절에 한 번 거듭 울립니다. 공동체는 흩어졌고 남은 것은 각자의 기업, 각자의 소견뿐입니다. 한 레위 사람과 첩의 불화에서 시작해 집단 폭력과 내전과 두 번의 강제 혼인으로 이어진 이야기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제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바로 이 무심한 마무리가 여인들의 운명을 더 참혹하게 만듭니다. 사사기는 부모의 축복 속에 이루어진 옷니엘과 악사의 결혼으로 시작해, 무참한 폭력 속에서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으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서지 않을 때 한 사회가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고통이 누구에게 먼저 떨어지는지를 이 책은 끝까지 보여 줍니다.

마지막 문장을 두고 오랫동안 두 가지 읽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왕정이 서야 이 혼란이 끝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버린 상태를 고발하는 말로 읽는 것입니다. 이 책이 기록되고 읽힌 시대의 청중은 이미 나쁜 왕들의 통치와 포로 됨을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인간 왕이 해결책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통치자가 없는 이스라엘에서는 모두가 왕이었고, 자신의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 되었을 때 개인의 욕망은 신앙의 이름으로 미화되었습니다. 왕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왕이 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정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사기 바로 뒤에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로 시작하는 룻기가 놓여 있습니다. 사사기의 베들레헴은 떠돌이 레위인이 나온 곳이요 비극을 맞은 첩의 고향, 곧 무정부 상태의 발원지였습니다. 그러나 룻기의 베들레헴은 인애가 넘치는 곳이 되고, 사무엘서의 베들레헴은 목자 왕을 배출하는 성읍이 됩니다. 룻기의 보아스는 이방 여인을 포도원에서 붙들어 가는 대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게 하고 옷자락을 펴 덮어 주는 기업 무를 자였습니다. 그리고 룻기의 마지막 계보는 베레스에서 시작해 다윗에서 끝납니다(룻 4:18-22). 베레스라는 이름은 21장 15절의 틈, 곧 페레츠와 같은 말입니다. 지파들 가운데 난 틈으로 끝난 책 뒤에, 틈이라는 이름에서 시작해 왕에 이르는 계보가 놓인 것입니다. 그 계보의 끝에서 하나님은 베들레헴에 참 왕을 보내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보좌 삼으신 왕이십니다. 사사기가 끝내 채우지 못한 빈자리의 주인이 마침내 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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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의 마지막 문장은 과거의 기록이면서 오늘 우리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우리는 우리 시대가 과연 사사 시대보다 나은지를 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의 크기와 힘을 복음을 위한 것이라 말하면서 약한 이들의 신음은 작게 듣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각자가 신앙의 언어로 내 욕망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이 마지막 문장을 우리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으로 삼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매일의 묵상이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말씀 앞에 앉는 일은 내 소견을 내려놓고 참 왕의 뜻을 여쭙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각자 자기 방으로 흩어져 각자의 소견대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 함께 말씀 앞에 앉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일터에서도 모두가 옳다고 하는 일을 한 번 더 주님의 눈으로 보십시오. 모두의 소견이 모여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어둠이 끝이 아니었듯, 우리의 무너진 자리도 끝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틈이라는 이름에서 왕의 계보를 이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무너진 틈에서도 새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 참 왕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 그것이 사사기를 다 읽은 우리가 내려야 할 결론입니다. 구월 첫날부터 이어 온 사사기 묵상의 여정을 여기서 닫으며, 이 책이 우리에게 남긴 물음을 가슴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 삶의 보좌에는 누가 앉아 계십니까. 그 자리에 참 왕을 모신 사람만이 사사기 다음 장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 거둠의 기도

주님,

평화를 공포하면서도

그 평화의 값을 누가 치렀는지

묻지 않던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저희가 벌린 틈을

주의 뜻이라는 말로 덮지 않게 하시고

결정의 자리마다

먼저 주께 여쭙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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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내어 주신 신랑 되신 예수님,

포도원에 숨어 빼앗아 얻는

세상의 방식을 버리게 하옵소서.

은혜라는 말로

누군가의 입을 막지 않게 하시고

빼앗긴 딸들의 눈물을 기억하며

약한 이의 편에 서게 하옵소서.

.

살리시는 성령님,

각기 자기 기업으로 흩어져

각기 자기 소견대로 사는 저희를

다시 말씀 앞으로 모아 주옵소서.

내가 왕이 된 마음의 보좌에서

저희를 내려오게 하시고

참 왕의 다스림에 순복하게 하옵소서.

.

틈에서 왕의 계보를 이으신 하나님,

사사기의 어둠 끝에

베들레헴의 빛을 예비하셨듯

우리교회와 저희 가정의

무너진 자리에서도

새 이야기를 시작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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