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6:1-10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갈 인생들이 부르는 희망의 노래
참된 행복은 힘 있는 자들에게 줄을 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시는 야곱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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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참 어지럽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확성기를 들고 자기주장을 외치기에 바쁘고, 힘 있는 자들은 자신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합니다. 선거철이 되거나 세상이 요동칠 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를 지켜줄 든든한 '배경'을 찾습니다. 유력한 정치인, 막강한 자본, 혹은 인맥이라는 이름의 동아줄을 잡으려 애씁니다. 그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146편의 기자는 우리의 이런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뼈아프게 지적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3-4절).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권력자도, 세상을 호령하는 영웅도 결국은 '호흡' 하나에 의존해 사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들의 거창했던 계획도, 야망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은 인간을 '아담(Adam)', 즉 '흙 먼지'라고 부릅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에게 영원한 안전을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시인은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5절).
왜 하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나 '이삭의 하나님'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일까요? 야곱은 사기꾼이었고, 도망자였으며, 평생을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았던 고달픈 인생의 대명사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호칭 속에는, 비루하고 흠 많은 인생조차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내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화려한 성공의 자리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의 밤을 지나는 이들의 곁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 7절부터 9절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역 목록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분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세우시고,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맹인들의 눈을 여시고, 비굴한 자(삶의 무게에 눌려 허리가 굽은 자)들을 일으키시며,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귀인'들은 힘 있는 자들과 결탁하여 더 높은 성을 쌓으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 그늘진 곳으로 내려가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신음 소리가 들리는 거리의 모퉁이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입술의 노래를 넘어,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그곳을 우리도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벗들이여.
세상의 힘이 커 보이고 내 힘은 너무나 미약해 보일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권력은 잠시 피었다 지는 꽃과 같지만, 시온의 하나님은 영원히 다스리십니다(10절).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같은 우리를 외면치 않으시고, 넘어진 우리를 일으켜 세워 다시 걷게 하시는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으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무언가를 많이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비 안에 머무는 것(관계)임을 말입니다. 호흡이 있는 동안,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오직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분의 따뜻한 손길을 세상에 전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빕니다. 할렐루야.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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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6:1-10 바람처럼 사라질 유한한 힘을 넘어, 영원한 긍휼에 뿌리내리라
우리가 세상의 유한한 권력에 대한 의존을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의 압도적인 긍휼과 그분의 구체적인 정의의 행위에 눈뜰 때, 비로소 고통받는 이웃의 설 땅이 되어주는 참된 자유와 영원한 찬양의 삶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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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이라는 거친 파도 속에서 자주 불안과 마주합니다. 무언가 든든한 것에 기대어 안락을 얻고 싶다는 갈망은 인간의 숙명처럼 느껴집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속삭입니까? 바로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 힘 있는 자들, 소위 '왕자들'의 보호를 구하고 그들의 힘을 의지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고관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 146:3).
인간의 힘이란 얼마나 허망한지요. 우리가 그토록 견고하다고 믿었던 권력이나 부(富), 혹은 명예조차도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계획이 소멸하리로다”(시 146:4). 인간이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계획은 숨결이 멈추는 순간 덧없이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존과 안위를 위해 이웃을 수단으로 삼고, 자기중심성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한, 우리의 노력은 결국 허무주의적인 절망으로 귀결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돈이나 지위가 보장하는 안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유한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려놓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절망의 끝은 아닙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절감하는 바로 그 자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눈을 뜨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선언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우리가 의지할 분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곧 우리의 지식이나 이성으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장엄한 신비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은 무정한 초월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의 권능을 가장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구체적인 긍휼(compassion)로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억눌린 자들을 위해 정의를 집행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십니다(시 146:7). 그분의 시선은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진 이들, 눈먼 자, 갇힌 자,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시 146:8-9). 히브리어로 긍휼(라훔)은 어머니의 자궁과 뿌리가 같은 단어라 하듯,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당신의 몸으로 품어 안으십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 또는 삶이 막막하고 힘겨워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할까’ 질문할 때, 교훈적 의무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헤세드)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이미 당신의 따뜻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이 은혜에 힘입어, 이제 우리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에 눈을 돌리고, 그들의 곁이 되어주는 사랑의 순례길을 걷는 명랑한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의 작은 걸음이, “하나님이 영원히 다스리시는”(시 146:10) 그 영광스러운 세계를 이 땅에 구현하는 창조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