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2:1-7 동굴의 시간, 그 깊은 침묵 속에서
우리의 삶이 꽉 막힌 동굴처럼 여겨질 때, 비로소 하나님은 당신의 숨결을 우리 비루한 영혼에 불어넣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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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이 제법 찹니다. 계절의 순환은 어김이 없어, 우리는 또다시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게 됩니다. 분주하게 달려왔지만 손에 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사람들 속에 섞여 웃고 떠들면서도 문득 심연과도 같은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화려해 보이는 무대 뒤편에는 언제나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시편 142편의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한때 골리앗을 쓰러뜨린 민족의 영웅이었고, 여인들의 노랫소리에 칭송받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거처는 왕궁이 아닌 차가운 아둘람 굴입니다. 사울의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 숨어든 그곳은 빛 한 줌 들지 않는 절망의 공간이었습니다. 다윗은 탄식합니다.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4절). 여기서 '오른쪽'은 나를 변호해 줄 사람이 서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 세상천지에 나를 지지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처절한 자각, 이것이 바로 '동굴'의 실체입니다.
우리네 인생에도 이런 동굴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건강이 무너지고, 경제적인 토대가 흔들릴 때 우리는 세상에서 유배당한 것 같은 소외감을 느낍니다. 신앙인이라 자부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고통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부재(不在)만을 경험하는 것 같아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라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신앙의 신비는 바로 이 지점에서 피어납니다. 다윗은 그 캄캄한 굴속에서 절망을 베고 눕는 대신, 시선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5절). 여기서 '분깃(share)'은 생존을 위한 땅이나 몫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내게 줄 몫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다윗은 하나님 자체가 나의 몫이요, 나의 기업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벗들이여.
동굴은 막다른 골목이 아닙니다. 그곳은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 채, 오직 나와 하나님이 단독자로 마주하는 '침묵의 성소'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허공을 치는 메아리처럼 느껴질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내뱉는 신음 소리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가슴에 가 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 입고, 찢기고, 갈 곳 몰라 웅크리고 있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품으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임하십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 명징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이 비록 흔들리며 걷는 길일지라도, 그 길 끝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환대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부디 이 겨울, 춥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부활의 희망을 붙드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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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2:1-7 돌이켜보니, 그 절망의 동굴에 이미 은총의 별이 떠올라 있었다
광야에서 부르짖는 연약한 영혼에게, 당신의 압도적인 은혜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믿음을 심어, 고립의 동굴을 세상의 빛과 연대가 살아 숨 쉬는 해방된 광장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적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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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홀로 있는 실존 속에서 때로 "이것이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며 길을 잃고 헤매곤 합니다. 삶의 무게가 우리를 짓눌러 영혼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스스로를 어쩔 수 없는 무력감과 공허의 심연에 내던지곤 합니다. 시편 142편의 시인이 "내 영혼을 돌보는 이가 없습니다"라고 울부짖었던 것처럼 (시 142:3), 우리의 고독은 때로 피할 곳 없는 동굴 속에 갇힌 듯 막막합니다. 이 비루한 고립 속에서, 우리는 자기 마음의 그림자를 직면할 용기조차 잃고 술이나 오락이라는 헛된 위안을 구하며 '나'라는 짐을 지고 다닙니다.
우리를 옥죄는 것은 외부의 압제뿐 아니라, 스스로가 갇혀 버린 '자아의 감옥'입니다. 세상은 늘 우리에게 강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라 속삭이지만, 믿음의 성숙은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절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바로 이 절박한 고립의 순간, 우리는 비로소 알지 못했던 광대한 실재와 접속합니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헤셸이 통찰했듯, 예언자는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듯, 우리를 짓누르는 고난은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와 긍휼을 향한 통로가 됩니다. 우리의 가장 취약한 자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시는 가장 적당한 순간인 것입니다.
시인은 곧 "주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땅에서 나의 몫이시니이다"(시 142:5) 고백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이 절망의 동굴에서 스스로 나올 힘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벽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을 압도하는 가없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강조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덕스럽지 않고 한결같으며, 마치 어머니가 태중의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몸으로 안으시는 긍휼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때로 미로처럼 모호하고, 낯선 불확실성 앞에서 흔들릴지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홀로 남겨진 존재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로 우리의 어둠을 밝히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 압도적인 은혜에 힘입어, 이제는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상처받은 이들의 곁이 되어주고, 그들의 짐을 나누어 지는 사랑의 순례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갑시다.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억압과 고립의 동굴이 아닌, 임마누엘의 해방된 광장이 열릴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