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1:1-16 땅을 녹이는 눈물의 소리
우리 삶의 견고해 보이던 것들이 무너져 내릴 때, 그 폐허는 절망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픈 사랑이 시작되는 자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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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는 모든 벗님들께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성(城)을 쌓고 살아갑니다. 안전하다고 믿어지는 직장, 건강, 혹은 행복한 가정이라는 이름의 견고한 산성들 말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굽이에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영원할 것 같던 그 산들이 실은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미가 1:4)처럼 얼마나 속절없이 녹아내릴 수 있는지를요. 오늘 우리가 마주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은 참으로 두렵고 아픕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처소에서 나오셔서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시니 산들이 녹고 골짜기가 갈라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이 무시무시한 심판의 풍경 앞에서 선지자는 도망치거나 숨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8절) 들개처럼 애곡하고 타조처럼 슬피 웁니다. 왜일까요? 그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산들을 녹이시는 그 뜨거운 불이 사실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타는 목마름'이자 '견딜 수 없는 아픔'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선지자가 나열하는 성읍들의 이름-가드, 베들레아브라, 사빌-은 당대 사람들이 자랑하던 번영의 상징들이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한줌의 먼지(베들레아브라, 티끌)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실상 우리를 구원하지 못함을 폭로하시는 그분의 발걸음은 가혹해 보이지만, 실은 우리를 옥죄고 있는 껍데기를 깨뜨리시는 은총의 망치질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고칠 수 없는"(9절) 지경에 이르렀기에, 하나님은 에둘러 가지 않으시고 우리 삶의 한복판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 하나님이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드시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런 아픔이 오는지 이해할 수 없어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벗님들, 기억하십시오. 선지자가 벌거벗은 몸으로 울부짖을 때, 그는 가장 정직하게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위선과 체면, 인과응보의 논리를 다 벗어던지고 "주여, 나는 아픕니다"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아픔과 공명하게 됩니다.
무너짐은 끝이 아닙니다. 폐허는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의 깨어짐 사이로 들어오십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모든 것이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으시는 주님의 그 '아픈 사랑'에 기대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심판조차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지독한 사랑의 다른 이름임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흔들리며 걷는 그 길 위에 주님의 은총이 깃들기를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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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1:1-16 낮은 곳을 향하는 통애(痛愛)의 눈물, 그 시린 은총의 시작
우리의 오만한 '높은 곳'이 무너져 내리는 파국의 자리에서조차, 하나님은 차가운 심판자가 아닌 '끙끙 앓는' 긍휼의 눈물로 우리를 품으시며, 비루한 일상을 다시 세우는 가없는 은총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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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높은 곳을 향해 질주하는 '사다리의 존재'로 살아가곤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더 높이 올라가라, 더 견고한 성벽을 쌓으라 속삭입니다. 하지만 미가서의 예언자가 목도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산당(山堂)'들은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신격화된 우상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돈, 명예, 권력이라는 '높은 곳'은 사실 하나님의 임재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일 때가 많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주님께서 그 높은 곳을 밟고 내려오실 때, 산들이 밀초처럼 녹아내리고 골짜기들이 갈라지는 파국을 선포합니다(3-4절).
그러나 이 엄중한 심판의 풍경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하나님의 파토스(Pathos, 마음)'가 흐르고 있습니다. 예언자 미가가 "내가 벌거벗은 몸으로 울부짖으며 들개처럼 부르짖겠다"고 탄식하는 것은 단순히 다가올 재앙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닙니다(8절). 그것은 자기 백성을 징계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찢어지는 마음, 즉 '끙끙 앓으시는' 하나님의 통애(痛愛)가 예언자의 몸을 통해 터져 나온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을 뜻하는 '라훔(rahum)'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레헴(rehem)'과 어원이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부서진 자궁과 같은 상처 속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이게 아닌데" 하는 탄식이 나올 때, 혹은 신앙에 대한 회의가 안개처럼 밀려올 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겪는 환난은 우리를 멸절시키려는 독단의 채찍이 아니라, 묵은 땅을 갈아엎어 우리 속에 잠든 '참사람'의 씨앗을 깨우려는 시린 은총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무너진 그 폐허의 자리까지 '포복(匍匐)'하여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라는 종교적 강박에서 벗어나, 우리를 향해 이미 쏟아지고 있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자비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그분의 긍휼은 우리의 부족함을 꾸짖기보다 먼저 우리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어 주십니다. 이 따뜻한 은총의 빛 아래서 우리의 굳은 마음이 살가운 흙가슴으로 변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의 '설 땅'이 되어 주는 사랑의 순례길을 명랑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그 낮은 자리가 곧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히 피어나는 '새로운 시작'의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부서뜨리기 위한 망치가 아니라, 토기장이가 깨진 옹기 조각들을 모아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듯 우리의 파편화된 삶을 새로운 희망의 예술로 빚어내시는 '거룩한 손길'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