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2:1-13 막힌 담을 허무는 은총의 선봉장(先鋒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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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약함과 죄성으로 스스로를 가둔 절망의 감옥 문을 부수고, 친히 앞서 걸어가시며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총을 신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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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지면 침묵은 무거워지고, 생각의 그림자는 길어집니다. 미가 선지자는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는 이들의 어두운 밤을 고발합니다(미 2:1). 날이 밝으면 그들은 자신의 손에 있는 힘으로 그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밭을 탐하고 집을 빼앗는 그들의 탐욕은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이 됩니다. 2,700년 전 유대 땅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것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더 많이 가짐'이 '더 훌륭한 존재'로 오독되는 시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듯, '소유'가 '존재'를 삼켜버린 세상에서 인간은 타인을 이웃이 아닌 경쟁자로, 혹은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이 우리에게 뼈아픈 이유는 단순히 사회적 불의에 대한 고발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 내면을 정직하게 응시할 때 마주하는 비루함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안전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마음의 성벽을 높이 쌓습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쌓아 올린 그 견고한 성벽은 어느새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되고 맙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갈증과 회의감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 말하면서도, 실상은 내 힘으로 쌓은 성벽 안에서 홀로 떨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 우리에게, 미가서는 놀라운 반전을 선물합니다. 심판의 경고로 가득 찬 이 예언서의 한복판에 갑작스레 구원의 서광이 비칩니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문을 열고 나가며 그들의 왕이 앞서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미 2:13)
히브리어로 '길을 여는 자'는 '하포레츠(Ha-Poretz)', 즉 '부수고 나가는 자'를 뜻합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가둔 절망의 울타리를 부수십니다. 우리가 갇힌 감옥 문을 안에서 열 힘이 없을 때, 밖에서 부수고 들어와 우리를 이끌어 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네가 벽을 넘어라", "네가 문을 열어라"라고 요구하며 짐을 지우지만, 복음은 "내가 이미 문을 부수었다", "내가 너보다 앞서 걷고 있다"라고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무게에 눌려 신앙의 길 위에서 주저앉은 벗들이여.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상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홀로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앞에는 '길을 여시는 분'의 뒷모습이 있습니다. 그분이 친히 선봉장이 되어 거친 가시덤불을 헤치고, 막힌 담을 허물며 앞서 가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 뚫린 문으로 걸어 나가면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빈터가 됩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함께 가자" 손 내미시는 그 사랑에 기대십시오. 신앙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앞서 가시는 주님을 향한 시선입니다. 오늘, 닫힌 문을 부수고 우리를 빛으로 이끄시는 그 은총의 신비 안에서 다시 걷기를 바랍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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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2:1-13 탐욕의 밤을 깨우는 자비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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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끝없는 욕망이 타자의 평화를 짓밟는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흩어진 우리를 긍휼히 모으시고 앞서 길을 여시어 진정한 해방의 광장으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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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침대에 누워 평온한 잠을 청하기보다, 내일의 이익을 계산하고 남보다 앞서가기 위한 방책을 꾸미느라 뒤척이곤 합니다. 미가 선지자가 목도한 예루살렘의 밤도 그러했습니다. 권력을 쥔 이들이 침상에서 악을 꾀하고, 날이 밝자마자 그 힘을 휘둘러 이웃의 밭과 집을 빼앗는 풍경은 참으로 '신산스럽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나를 살해하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을 내린다고 했지만, 탐욕에 눈먼 이들에게 타자는 그저 자신의 곳간을 채우기 위한 '사용 물'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성공'이라 속삭이지만, 그 질주 속에서 우리는 정작 소중한 '사람의 향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욕망이라는 전차에 올라탄 채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삶은, 결국 스스로를 '자아의 감옥'에 가두는 일입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우리의 이 부박한 실존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끙끙 앓으십니다'. 주님의 진노는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뒤틀린 질서를 바로잡아 우리를 참사람의 길로 돌이키려는 '아픈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지만 미가서 2장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놀라운 반전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탐욕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을 "보스라의 양 떼처럼" 다시 모으겠다고 약속하십니다(미 2:12).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로운 행위를 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길 잃은 양처럼 연약하기에,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가없는 은총'으로 품어 안으십니다. 주님은 우리 앞서 길을 여는 '브레이커(Breaker, 길을 여는 자)'가 되어 주십니다(미 2:13).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앙의 회의가 안개처럼 밀려오고 있습니까? 혹은 자신의 허물 때문에 주님 앞에 서기가 두려우신지요?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내가 무엇을 이루어 내는 투쟁이 아니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자비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깨진 가슴 조각들을 모아 성소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이제는 스스로 길을 내려는 강박을 내려놓고, 우리 앞서 걸어가시며 굽은 길을 펴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갑시다. 그 압도적인 사랑에 빚진 자 되어, 우리도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 주는 사랑의 순례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갑시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멜 때, 비로소 세상을 이기는 참된 평화의 노래가 우리 삶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친 사막을 휩쓰는 모래폭풍 속에서도, 기어코 생명의 싹을 틔워 올리는 농부의 성실한 손길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따스한 햇볕 아래 머물며 함께 자라나기만 하면 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