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3:1-12 무너짐, 그 서늘한 은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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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탐욕과 위선으로 쌓아 올린 거짓 평안의 성읍이 무너지는 그 황량한 자리야말로, 굳은 땅을 기경하여 새로운 생명을 심으시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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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판을 지나다 보면 문득 서늘한 바람 끝에 실려 오는 생의 비애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바라본 세상도 그러했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꺾어 그들의 살을 먹었습니다(미 3:2-3). 재판관들은 뇌물을 위해 판결하고, 선지자들은 돈을 주면 평강을 외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2,700년 전의 야만적인 풍경이라 치부하기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피로 사회’의 단면과 너무도 닮아 있어 가슴이 저릿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담보로 나의 안락을 쌓아 올리는 것, 그것이 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미가서 3장은 성경에서 가장 혹독한 심판의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4절), 응답하지 않으시며(7절), 마침내 시온을 밭같이 갈아엎고 예루살렘을 돌무더기가 되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12절). 이 서슬 퍼런 말씀 앞에 서면, 연약한 우리는 두려움에 떱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니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11절)라는 헛된 확신 뒤에 숨어보지만, 불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순 속에서 신앙의 길을 묻는 벗들이여.
우리는 여기서 깊은 호흡으로 하나님의 본심을 읽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시온을 ‘밭같이’ 갈아엎겠다고 하시는 걸까요? 농부이신 하나님에게 ‘갈아엎음’은 파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작(cultivation)’입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땅, 가시덤불과 잡초가 무성해 더 이상 생명을 품을 수 없는 땅을 살리기 위해 농부는 쟁기를 듭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는 그 아픔 없이는 새로운 파종도, 생명의 움틔움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쌓아 올린 성공의 탑, 종교적 습관이라는 견고한 성벽이 무너질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탄식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그때가 은혜의 시간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시기 전에 우리의 방해자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움켜쥔 거짓 안전,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 모든 ‘안전장치’들을 하나님은 허무십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8절) 죄를 선포한다고 고백합니다. 진정한 희망은 값싼 위로가 아니라, 아픈 현실을 직시하는 정직함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연약함 속에 숨어 죄를 정당화하거나, 거짓 평화에 안주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 돌무더기가 된 성전 터는 끝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시는 빈 도화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밭처럼 갈아엎어지는 고통 속에 있다면, 기억하십시오. 지금 하나님은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기경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힘으로 쌓은 것들이 무너진 그 빈자리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심기 위해서말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무너짐조차 끌어안으십시오. 쟁기질당하는 아픔은 곧 다가올 봄을 예비하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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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3:1-12 탐욕의 파국 위에 내리는 아픈 은총의 비
우리의 이기심이 타자의 생명을 짓밟는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무너진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끙끙 앓으시는’ 긍휼로 우리를 부르시어 비루한 욕망을 씻어내고 다시 ‘참사람’의 길로 걷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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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3장의 말씀은 차마 눈을 뜨고 읽기 힘들 정도로 참혹합니다. 지도자라는 이들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꺾어 고기를 삶듯 먹어치우는 광경은(미 3:2-3),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존재의 파국’ 그 자체입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나를 살해하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을 내린다고 했지만, 탐욕에 눈먼 이들에게 타자는 그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소비재’일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역시 이 ‘사탄의 맷돌’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 하는 세상은 사람을 인격이 아닌 숫자로 치환하고,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누군가의 아픔을 딛고 서는 것을 지혜라 가르칩니다. 종교 지도자들조차 ‘입에 물려주는 것이 있으면 평화를 외치고,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준비’하는(미 3:5) ‘종교 상인’으로 전락할 때, 세상은 빛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엄중한 심판의 선언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하나님의 파토스(Pathos)’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예루살렘을 보며 차가운 심판자로 서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이 야수가 되어 버린 현실 앞에서 ‘끙끙 앓고’ 계십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을 뜻하는 ‘라훔(rahum)’은 어머니의 자궁인 ‘레헴(rehem)’과 뿌리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지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속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혹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주저앉아 계십니까? 혹은 “이게 아닌데”라고 자책하며 길을 잃으셨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부활의 주님은 지금 성공의 자리가 아니라 ‘눈물의 땅’ 갈릴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쌓아 올린 공로의 기념비가 아니라, 상한 갈대조차 꺾지 않으시는 당신의 압도적인 은총 안에서 우리가 다시 숨 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거저 주시는 용서와 사랑의 부력에 우리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깨진 가슴 조각들을 모아 주님은 다시 성소를 만드실 것입니다. 이제 이기적인 욕망의 분화구를 닦아내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랑의 레가토’를 연주하며 사십시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과 접속할 때, 비로소 무너진 폐허 위로 생명의 파랑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배미를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적시는 단비와 같습니다. 그 비가 스며드는 곳마다 굳은 땅은 부드러워지고, 잊혔던 생명의 씨앗은 기적처럼 다시 움트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