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6:1-16 무엇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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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종교적 퍼포먼스가 아니라, 이웃을 향한 정의와 사랑, 그리고 그분과 보조를 맞추어 걷는 겸손한 일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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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초목이 숨죽인 채 법정에 섰습니다. 원고는 하나님이시고, 피고는 이스라엘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 장엄하고도 서글픈 ‘여호와의 변론’을 우리에게 중계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묻습니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미 6:3).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고, 발락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며 끝없이 베푸셨던 은총의 역사를 상기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은 힐난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사무치는 탄식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버거워하고, 율법을 짐으로 여기는 그 마음의 밑바닥을 하나님은 아프게 들여다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 난처한 법정에서 인간은 황급히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6절). 1년 된 송아지? 천천의 수양?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심지어 내 맏아들까지? 인간의 종교성은 늘 이런 식입니다. 내면의 빈곤을 물질의 양(量)으로 메우려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불안을 더 비싼 제물, 더 화려한 종교적 열심으로 무마하려 듭니다. 이것은 ‘거래’이지 ‘관계’가 아닙니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을 많이 하고, 교회 봉사에 열을 올리면 하나님이 감동하실 거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미가는 2,700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 우리 영혼에 비수와 같은 대답을 꽂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이 짧은 문장에 기독교 신앙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정의(Mishpat)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가운 법전의 논리가 아닙니다.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삶의 태도입니다.
둘째, 인자(Hesed)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변함없는 사랑, 따뜻한 연민을 품는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감상이고, 사랑이 없는 정의는 폭력입니다.
셋째,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고, 그분의 호흡에 내 호흡을 맞추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지 않고 그분의 뜻에 나를 튜닝(tuning)하는 겸손함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후반부(9-16절)는 우리의 서늘한 현실을 고발합니다. 부정한 저울, 거짓된 추, 강포와 거짓말…. 성전에서는 ‘천천의 수양’을 바치며 예배하지만, 장터와 일터에서는 오므리와 아합의 악한 관습을 따르는 이중성. 이것이 이스라엘의 비극이었고, 오늘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삶의 결과가 ‘공허’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14-15절). 하나님 없는 풍요는 신기루입니다. 불의로 쌓은 성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길을 묻는 순례자 여러분.
신앙은 ‘종교적 행위’라는 껍질을 깨고 ‘삶’이라는 알맹이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거룩한 척하는 연기자가 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거친 세상 한복판에서 정직한 저울을 사용하고, 약자의 손을 잡아주며, 묵묵히 하나님의 길을 걷는 ‘생활 신앙인’을 찾으십니다.
오늘 하루, 거창한 제물을 고민하기보다 내 곁에 있는 이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 건네는 것은 어떨까요? 불의한 이익을 거절하는 용기를 내보는 건 어떨까요? 그것이 천천의 수양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정의와 사랑, 그 아름다운 두 날개로 비상하며 하나님과 나란히 걷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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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6:1-16 하늘의 법정에서 들려오는 아픈 사랑의 초대
종교적 형식이라는 껍데기를 넘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헤세드)에 응답하여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걷는 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삶의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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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신산(辛酸)스러운 나날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일상은 마치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처럼 위태롭기만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과 풍요의 신기루를 쫓으며 '더 높이, 더 빨리'를 외치는 세상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다 보면, 어느덧 우리 영혼은 부박(浮薄)한 소음 속에 유폐되고 맙니다. 신앙에 대한 회의가 안개처럼 밀려오고,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할까'라는 무거운 강박이 우리 무릎을 꺾어 놓기도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오늘 우리를 장엄한 하늘의 법정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이 법정의 풍경이 사뭇 기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심판관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미 6:3) 물으시며 끙끙 앓는 연인의 모습으로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치는 수천 마리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미 6:7)이라는 '껍데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우리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전도된 마음의 발현일 뿐입니다.
주님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가없는 은총(헤세드)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 응답의 길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오로지 정의를 실천하며, 인자(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 여기서 자비를 뜻하는 히브리어 '라훔'은 어머니의 자궁 '레헴'과 어원이 같습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타자의 고통을 내 자궁의 아픔처럼 느끼는 공감적 배려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신앙의 무력감에 시달릴 때일수록 우리는 묵상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묵상은 단순히 문자를 읽는 행위가 아니라, 사자가 먹이를 삼키듯 말씀을 전 존재로 씹어 소화하는 '영혼의 훈련'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의 벼릿줄로 삼아 삶을 조율할 때, 비로소 우리 내면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안'이 깃듭니다.
우리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이미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여기시기에 우리는 충분히 존엄합니다. 이제 무거운 종교적 의무감을 내려놓고, 우리보다 먼저 고통의 현장인 '갈릴리'로 가 계신 주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억눌린 자의 곁이 되어 주고, 낯선 이를 환대하는 그 작은 성실함이 모여 무너진 세상의 폐허 위에 하나님의 평화의 태피스트리를 짜게 될 것입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아슬아슬한 절망을 넘어, 찬연한 부활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배미를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적시는 단비와 같습니다. 그 비가 스며드는 곳마다 굳은 땅은 부드러워지고, 잊혔던 생명의 씨앗은 기적처럼 다시 움트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