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5:1-21 비틀거리는 존재들을 위한 중력, 그 거룩한 돌봄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세상을 압도하는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세밀한 사랑 속에 있습니다.
*
계절이 속절없이 흐릅니다. 시간의 강물 위에 떠 있는 낙엽처럼, 우리네 인생도 어딘가를 향해 쉼 없이 흘러갑니다. 릴케는 그의 시에서 "나뭇잎이 진다, 저 먼 곳에서 시들 듯이 진다"고 노래하며 만유가 낙하하는 우주의 슬픔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중력을 견디는 일입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휘청거리고, 때로는 예기치 않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시편 145편은 다윗의 마지막 찬양시입니다. 그는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3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대함'은 무엇입니까? 대개는 누군가보다 더 높아지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그런 강자들을 향해 환호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무능하다며 벼랑 끝으로 내몱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위대함은 결이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8절)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위대함은 높고 높은 보좌에서 호령하는 권위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으로 스며드는 물과 같은 겸손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가슴 저리게 다가오는 구절은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고단함 속에서 신앙의 의미를 묻고 계신 벗들이여, 이 말씀이 들리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꼿꼿하게 서서 승승장구할 때만 박수 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힘이 빠져 비틀거릴 때,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릎 꿇을 때, 그분은 곁에 계십니다. 릴케가 말한 "이 낙하를 지극히 부드러운 손으로 받아주시는 어느 한 분",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넘어지면 끝장"이라고 위협하지만, 하나님은 "넘어짐은 내 품에 안길 기회"라고 속삭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유능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이신 주님은 찢기고 상한 영혼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심으로 당신의 왕 되심을 증명하십니다.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강한 척,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시인은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한다"(15절)고 했습니다. 어미 새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그저 입을 벌리고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면 됩니다. 그때 주님은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16절) 하십니다. 우리의 결핍은 하나님의 채우심이 머무는 자리가 됩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업적'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나를 붙들고 계신 그 거룩한 손길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18절).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바로 그곳, 우리의 절망이 깊어지는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오늘도 비틀거리며 걷는 길 위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그분의 숨결을 느끼시길 빕니다. 넘어진 그 자리가 도리어 은혜의 자리가 되는 신비가 여러분의 삶을 감싸 안기를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시편 145:1-21 당신의 긍휼과 압도적인 은총이, 우리의 허물 속에서 피어납니다
우리가 유한하고 비루한 실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무궁한 긍휼과 신실하심으로 연약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이 압도적인 은총은 고통받는 타자의 품으로 나아가는 자발적인 찬양과 응답의 근거가 됩니다.
*
우리는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주 자신의 한없이 작은 모습을 마주합니다. 시편 145편은 시작부터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 찬양하지만,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세상의 모습은 때로 이 찬양의 장엄함과 거리가 먼 듯 느껴집니다. 오히려 세상은 경쟁과 성공의 사다리 위에서 서로를 짓밟고 올라가야 하는 전쟁터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파시스트적인 속도는 우리를 분주하게 만들어, 정작 삶의 본질과 신비에 경탄할 (경탄의 능력) 여유조차 앗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자아의 감옥 속에서, 혹은 고통과 무력감의 심연에서 비틀거릴 때, 시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압도적인 긍휼의 실상을 선언합니다.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 145:8)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긍휼은 단순히 감정적인 동정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은 어머니의 ‘자궁’과 어원이 같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어머니가 자식을 품듯이 당신의 몸으로 안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고 흠 없는 존재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시인은 이어서 “주님은 넘어지는 사람은 누구든지 붙들어 주시며, 짓눌린 사람은 누구든지 일으켜 세우신다” (시 145:14)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일어날 힘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을 압도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사랑받는 존재이지, 우리의 의로운 행위나 도덕적 우월성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이나 고난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 성숙하고 인간다워지는 디딤돌로 사용하십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에 대한 회의나 삶의 무게로 인해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하는 강박에 시달릴 때, 이 놀라운 진실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기를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통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진정한 찬양은 단순히 예배당에서 드리는 노래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에 반응하며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는 구체적인 행동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지금도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가 그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짐을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과 깊이 접속되는 기쁨을 맛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꿈, 곧 평화와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기꺼이 선물로 내어주는 삶을 살기로 결단할 때, 우리의 삶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참된 자유와 명랑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한 몸짓 하나하나가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태피스트리를 짜는 실타래가 될 것임을 주님은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