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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6-30 멈추지 않는 사랑, 흐르는 생명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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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안식의 규정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눈물 흘리는 이들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동참하는 생명의 사귐입니다.

*

안식일의 고요를 깨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납니다. 38년 된 병자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를 향해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의 시간'이었으나, 예수에게 그날은 고통받는 생명이 비로소 숨을 쉬게 되는 '해방의 시간'이었습니다. 비난하는 그들을 향해 던지신 주님의 말씀은 서늘하면서도 뜨겁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나님은 창조의 여정 끝에 안식에 들어가셨으나, 그 안식은 방관이 아닙니다. 자식이 아파 신음할 때 부모가 잠들 수 없듯, 타락한 세상에서 깨어지고 상한 피조물들을 다시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신학자 몰트만이 말했듯, 하나님의 안식은 '피조물과 함께 누리는 기쁨'이지 고립된 정지가 아닙니다. 신앙의 길 위에 서 있으면서도 때때로 회의가 찾아오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박제된 교리 속에 가두어 두었기 때문은 아닌지요.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박물관에 계시지 않고, 생명이 태동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지금도 땀 흘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독자적인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 이 철저한 비움과 의존이 바로 생명의 신비입니다. 예술가가 거장의 화풍을 눈에 익혀 그 정신을 이어받듯,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캔버스 위에 사랑과 정의라는 붓질을 이어가셨습니다. 신앙에 대한 더 적극적인 열망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깊이 응시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우리 시선을 두고, 그분의 손길이 닿는 곳에 우리 손을 보탤 때 비로소 우리는 심판을 지나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삶이 무겁고 신앙이 때로 허망하게 느껴질 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홀로 걷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비틀거릴 때 곁을 지키시고, 우리가 절망할 때 새로운 꿈을 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우리 생명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창한 업적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그 사랑의 리듬에 몸을 맡기는 '듣는 자'(요 5:25)가 되길 원하십니다.

사랑은 멈출 수 없는 흐름입니다. 고인 물이 썩듯, 자기만의 경건에 갇힌 종교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잔한 기적의 현장이 되게 하십시오. 연약한 이의 손을 잡고, 슬퍼하는 이와 함께 우는 그 작은 일함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습니다. 그 눈부신 생명의 행진에 기쁘게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요한복음 5:16-30 쉴 새 없이 흐르는 생명의 리듬, 그 ‘접속’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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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도 일하시는 아버지의 성실하심은 우리를 옭아매는 율법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을 살리시는 ‘생명의 노동’이며, 우리는 묵상을 통해 내 욕망의 질주를 멈추고(Stop) 그 하나님의 리듬에 접속함으로써 비로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영혼의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이 자리에 서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효율과 속도를 숭배하는 거대한 공장과도 같습니다. 멈추면 도태된다는 두려움이 채찍처럼 우리 등을 떠밀고, 우리는 그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5장의 본문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로 박해를 시작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사람이 살아난 기적’보다 ‘규정을 어긴 행위’가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

안식일은 쉬는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쉬지 않고 일하신다니요? 이 말씀은 노동의 연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단 한 순간이라도 우주를 붙드시는 손을 놓으신다면, 이 세상은 순식간에 혼돈과 죽음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도 하시는 ‘일’은 바로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고, 상한 것을 고치며, 죽어가는 것을 살리시는 ‘사랑의 노동’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아버지의 마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규정에 얽매여 생명을 방치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요 5:19). 이것은 무능력의 고백이 아닙니다. 철저한 ‘의존’이자 ‘일치’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야망이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사신 분이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자신을 투명한 유리창처럼 비우신 분입니다. 이기주 작가는 “말은 나름의 귀소 본능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과 행하신 표적은, 결국 그 생명의 원천이신 아버지 하나님께로 우리를 데려가려는 사랑의 귀소 본능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깊은 생명의 리듬에 동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묵상을 조용한 사색 정도로 생각하지만,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의 저자들은 훨씬 역동적인 정의를 들려줍니다. 김기현 목사는 “묵상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저항(Resistance)’”이라고 했고, 박영호 목사는 “묵상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참여(Participation)’”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를 위해 일하라, 더 많이 소유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묵상은 그 거센 욕망의 파도에 맞서 “아니요”라고 말하는 거룩한 저항입니다. 그리고 나의 이익을 위한 노동을 멈추고, 지금도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나의 손과 발을 포개어 넣는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내 안의 욕망이 죽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왕 노릇 하는 기적, 곧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요 5:24)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송민원 교수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듣고 싶은 대로 읽으려는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에게는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요 5:39-40). 그들은 텍스트(문자)에는 해박했을지 몰라도, 그 텍스트가 가리키는 ‘하나님의 가슴’을 만지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안에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고, 의무감만 남은 것 같아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까?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한동일 변호사는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일어서서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업적)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깊이 ‘접속’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아버지께 고정되기를 원하십니다. 심판의 권한을 가지신 아들(요 5:22)이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제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신뢰하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요 5:25). 이번 한 주간, 세상의 헛된 소음에는 귀를 닫고, 우리 영혼을 살리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는 ‘저항과 참여의 묵상’을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메마른 땅을 적시는 생수의 강이 되어 흘러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도의 삶은 오케스트라의 ‘튜닝(Tuning)’과 같습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모든 악기는 오보에가 불어주는 기준음 ‘라(A)’ 음에 자신의 소리를 맞춥니다.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던 악기들이 기준음에 조율될 때 비로소 웅장한 교향곡이 시작되듯, 우리의 분주하고 흩어진 마음을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주파수’에 맞추어 조율할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은 불협화음이 아닌, 이웃과 세상에 생명을 전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연주’가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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