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27-42 우물가에서 건져 올린 하늘빛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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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신앙은 경계를 허무는 환대에서 시작되며, 한 사람을 정성껏 대하는 것이 곧 세상을 향한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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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오정, 뜨거운 태양이 정수리를 내리누르는 고요한 한낮입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를 찾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가슴 속엔 해결되지 않는 갈증과 세상으로부터 입은 깊은 흉터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 메마른 영혼 앞에 낯선 유대 사내, 예수가 말을 건넵니다. "물을 좀 줄 수 있겠소?" 이 평범한 말 건넴은 사실 상처받은 영혼을 향한 거룩한 수인사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거창한 교리나 장엄한 의례 속에서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사마리아와 유대라는 견고한 가름줄을 허물고, 한 여인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마주하셨습니다. 톨스토이가 말했듯,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그녀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그저 존재 자체로 환대하셨습니다. 그 따뜻한 시선 앞에서 여인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원망과 절망의 얼음이 봄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까? 혹은 더 열정적인 삶을 갈망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을 파주시는 분입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간 것은 어떤 의무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속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 그 생명의 기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들의 수고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앞선 세대의 눈물과 헌신이라는 날실 위에 직조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책임은 또 다른 파종자가 되어 이 무정한 세상에 사랑과 관용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결과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막에 꽃이 피게 하시고 광야에서 샘이 솟게 하시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고, 그저 오늘 만나는 이의 가슴에 따뜻한 불꽃 하나를 지펴주면 족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삶이 곤고할수록 시인 예수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주어지는 대가가 아니라, 이미 우리 손바닥에 새겨진 잊혀지지 않는 약속입니다. 그분의 은혜 안에 머물 때, 우리의 남루한 일상은 비로소 하늘빛 광휘로 가득 찬 축제가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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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27-42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달려가는 기쁨, 그 거룩한 '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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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양식은 나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척박한 땅에 오셔서 말을 건네시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그 사랑에 감전된 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세상 속으로 달려가 또 다른 생명을 깨우는 ‘기쁨의 전령’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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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 대지 깊은 곳에서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찾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먹고사는 문제의 엄중함에 짓눌려, 정작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참된 양식이 무엇인지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4장의 후반부는 바로 그 ‘양식’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줍니다.
제자들이 마을에서 먹을 것을 구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배고픔을 잊으신 채 충만한 기쁨에 차 계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수군거렸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예수님에게 양식은 단순히 위장을 채우는 빵이 아니었습니다. 소외되고 상처 입은 한 영혼,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그녀의 목마름을 해갈시키고 그녀를 새로운 존재로 빚어내는 것, 그것이 주님을 살게 하는 힘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늘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오물 같은 현실 속에 풍덩 뛰어드셔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동고(同苦)의 사랑’을 지닌 분이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 여기는 사마리아 땅, 그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여인 곁에 머무르심으로 당신의 배고픔조차 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신비입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나를 살리는 양식이 되는 기적 말입니다.
그 시각, 여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그녀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요 4:28) 사람들에게 외쳤다고 기록합니다. 물동이는 그녀의 생존 수단이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물을 길어야 했던 고단한 일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녀는 그토록 집착했던 물동이를 미련 없이 버려두었습니다. 더 크고 근원적인 생수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 자기를 손가락질하던 이웃들에게로 달려가 “와서 보라”고 외칩니다.
이기주 작가는 “말은 나름의 귀소 본능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여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외침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억눌렸던 영혼이 해방되는 소리였고, 닫혔던 관계의 문을 여는 ‘기쁨의 파동’이었습니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 제자들은 아직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주님의 눈에는 이미 영혼의 추수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 벅찬 감격을 우리 삶의 자리로 가져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묵상은 나의 일상을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이야기 속으로 편입시키는 ‘번역(Translation)’의 과정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간 행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자신의 삶으로 번역해 낸 가장 역동적인 묵상의 결과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결말은 더욱 감동적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고, 주님은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됩니다. 그들은 여인에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요 4:42). 한동일 변호사는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이야말로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은총을 입은 한 사람의 변화가 온 마을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전염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왜 여전히 이 모양일까?” 하는 회의가 들고,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위축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처럼 목마른 자,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자를 찾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조차 들어 쓰셔서 누군가를 구원하는 통로로 삼으십니다.
이제 우리를 얽어매던 ‘물동이’를 내려놓읍시다. 생존을 위한 염려, 남들의 시선, 과거의 상처라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나를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을 전하러 세상 속으로 달려갑시다. 우리가 만나는 이웃, 직장 동료, 가족들이 바로 우리가 추수해야 할 ‘희어진 밭’입니다.
한 주간도 주님이 주시는 참된 양식으로 배부르고, 우리의 작은 변화를 통해 이웃에게 예수를 보여주는 ‘기적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복음의 전파는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의 가슴에 떨어진 은혜의 돌멩이는 작아 보이지만, 그로 인해 일어난 ‘동심원(Concentric Circles)’은 멈추지 않고 퍼져나가 마침내 호수 전체를 흔들고, 멀리 있는 기슭에까지 닿아 잠든 배를 깨우는 법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