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5-51 존재의 지평을 넓히는 초대 : "와서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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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안락한 의구심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우리를 부르시는 생명의 현존 속으로 온몸을 던져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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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어쩌면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속 주인공들이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리듯, 우리 영혼은 늘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허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뒤따릅니다. 그들의 발소리를 들으신 예수께서 돌이켜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요 1:38). 이 질문은 시대를 넘어 오늘 우리에게도 비수처럼 날아와 박힙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긴 노정에서 과연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제자들의 대답은 뜻밖에도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였습니다. 그들은 지식이나 교리를 구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머무시는 '존재의 처소'를 궁금해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복잡한 설명 대신 짧고 강렬한 초대를 건네십니다. "와서 보아라(Come and see)." 신앙은 책상 위에서 논리로 갈무리되는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자며 그분의 숨결을 느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 마음에는 나다나엘과 같은 회의가 깃들곤 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이는 익숙함이라는 감옥에 갇힌 이들의 흔한 탄식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만 하나님을 가두려 합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와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와서 보아라"며 손을 내밀었을 뿐입니다. 진리는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던 나다나엘의 고독과 고뇌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 무화과나무 아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묵상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유의 공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장 은밀한 슬픔과 가장 깊은 열망을 먼저 읽어내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기 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응시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없는 은혜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이 장엄한 선언은 야곱이 광야의 돌베개를 베고 잤던 그 '벧엘'의 꿈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가 되셨습니다.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혹은 더 뜨거운 삶을 갈망하는 이들이 있다면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다만 여러분의 존재를 투명하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이란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알고 계시는 그분의 시선 안에서 안식하며, 그분이 머무시는 세상의 낮은 곳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와서 보아라"는 그분의 초대는 오늘도 유효합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여 우리의 좁은 자아를 넘어 하나님의 광활한 생명의 바다로 나아가는 '기다림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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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5-51 낯선 초대, 그 설렘이 빚어내는 삶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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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거창한 교리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 앞에 서서 나의 욕망을 직시하고, “와서 보라”는 초대에 응답하여 그분과 머무는 ‘사귐의 묵상’을 통해 나의 존재가 새롭게 호명되는 경이로운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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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 어느덧 대지 깊은 곳에서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오늘이라는 기적의 시간을 건너오신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찾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욕망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어, 정작 내 영혼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조차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장의 이야기는 바로 그 소음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나직하지만 단호한 초대장입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고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돌이켜 물으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요 1:38). 송민원 교수는 성경이 질문으로 가득 찬 책이라 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너의 삶을 추동하는 궁극적인 지향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건드리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돈을 구하고, 안정을 구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며 허둥거립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엉뚱하게도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얻어내기보다, 주님이 머무시는 곳, 그 존재의 거처에 함께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Come and see)고 말씀하십니다(요 1:39). 신앙은 관념적인 설명이나 논리가 아닙니다. 와서, 직접 경험하고,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묵상’의 본질입니다. 묵상은 텍스트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묵상은 낯선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 그분의 시선으로 나를 읽어내고, 하늘의 언어를 나의 일상 언어로 바꾸어내는 치열한 ‘번역(Translation)’의 과정입니다. 그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묵으며 겪었던 시간은, 그들의 낡은 일상이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드라마로 번역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만남은 곧바로 새로운 관계의 확장으로 이어집니다. 안드레는 형제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 예수님은 투박하고 거친 어부 시몬의 현재 모습 너머에 있는 가능성, 즉 ‘반석(게바)’으로서의 미래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듯, 예수님은 우리의 본래적 실존을 호명하여 새로운 존재로 빚어내십니다. 세상은 우리의 효용 가치를 따져 점수를 매기지만, 주님은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고 “너는 반석이다”, “너는 소중하다”라고 불러주십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갔을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냉소했습니다(요 1:46). 우리 마음속에도 이런 회의와 냉소가 똬리를 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내 주제에 무슨 변화가 있겠어?”, “교회가 세상을 바꿀 수 있겠어?”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며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의 고독과 고민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이야말로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냉소마저 품어 안으시는 주님의 사랑 앞에서 무장해제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아직 신앙의 문지방 위에서 서성이고 계신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완벽해서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시몬처럼 거칠고, 나다나엘처럼 의심 많고 냉소적이어도 괜찮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시고 “와서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원한 시간을 건네주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우리 존재의 깊은 곳을 두드리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묵상은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먼 여행”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머물러 나의 욕망을 내려놓고 그분과 눈을 맞출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세상에 따뜻한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오케스트라의 ‘조율(Tuning)’과 같습니다.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던 악기들이 기준음(A, 라)인 오보에 소리에 맞춰 자신의 음을 조절하듯, 욕망과 혼돈으로 흩어진 우리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준음에 맞추어 조율할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은 불협화음이 아닌 장엄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교향곡’을 연주하게 되는 법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