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14 갈증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생명 : 우물가의 낯선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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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끊임없이 목마를 수밖에 없는 세상의 우물을 고집하는 대신, 우리 존재의 근원을 어루만지며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생수의 강물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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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햇살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그곳에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가장 뜨거운 시간에 우물을 찾은 그의 발걸음에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의 깊은 고독과 허기가 배어 있습니다. 시인 기형도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했듯, 이 여인 역시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결핍을 안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물을 좀 달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견고한 증오의 벽을 허무는 이 파격적인 요청은, 단순히 갈증을 해소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한 영혼의 심연을 흔드는 거룩한 개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워둔 종교적, 사회적 담장을 넘어 우리 삶의 가장 비루하고 아픈 자리에 먼저 찾아와 앉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물동이'를 이고 인생의 우물가를 서성입니다. 돈, 명예, 혹은 타인의 인정이라는 두레박으로 끊임없이 물을 길어 올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여전한 갈증뿐입니다.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여러분이 찾고 있는 우물이 '생명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14).
주님이 약속하신 '생수'는 밖에서 주어지는 일시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중심부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이며, 어떤 시련의 가뭄 속에서도 마르지 않는 은총의 샘물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 베유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여인이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그 뜨거운 우물가에서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은 우리가 더 많은 열심을 내어 물을 긷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신 주님께 "그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캐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지고 있는 무거운 물동이를 내려놓고 그분이 건네시는 생명의 잔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 세상이 주는 갈증에 지쳐 계신 분이 있습니까? 마음의 우물가가 말라 비틀어져 황량함만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수가성 우물가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의 갈증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대신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의 노래를 여러분의 영혼에 심어주실 것입니다. 그 생수의 강물이 여러분의 메마른 일상을 다시금 푸르게 적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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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1-14 정오의 우물가, 그 목마름의 끝에서 건네시는 ‘영원’의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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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 끝없이 되풀이되는 욕망의 갈증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도덕적 훈계가 아닌 ‘공감의 대화’를 통해 찾아오시며, 마침내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샘물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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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가 풀리고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찾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타는 목마름으로 가득 찬 광야와 같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해갈되지 않는 갈증을 안고, 우리는 남들보다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헐떡이며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4장의 배경은 정오, 태양이 가장 뜨겁게 작열하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군중 속에 섞이지 못하고 외로움과 수치심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봅니다. 그런데 그 우물가에 뜻밖의 손님이 계셨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요 4:6)라고 기록합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이 구절에 주목하며,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지친(fatigatus)’ 모습으로 우리 곁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에서 깊은 위로를 발견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단함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분 또한 피곤하셨고, 목마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요 4:7)고 청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요청은 단순히 목을 축이려는 의도를 넘어섭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당시의 견고한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는 파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건넨 이 따뜻한 말 한마디는 여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그녀가 감추고 싶었던 상처와 욕망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는 ‘마중물’이 되어 예수님께로 되돌아옵니다.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라고 묻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방어적인 태도 너머에 있는 근원적인 갈망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14). 야곱의 우물은 우리의 노력과 전통,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만족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두레박질을 멈추지 않지만, 돌아서면 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밖에서 안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이 됩니다.
이 신비로운 생수를 우리 내면에 간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Conversation)”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주고받은 대화처럼, 묵상은 나의 솔직한 처지와 질문을 가지고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또한 묵상은 세상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한 거룩한 ‘저항(Resistance)’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가져야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속삭이지만, 묵상은 그 욕망의 질주를 멈추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만족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야곱의 우물에 집착하던 낡은 자아를 벗어버리고, 내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의 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부끄러운 과거(다섯 남편)를 알고 계셨지만,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당신임을 밝히십니다(요 4:26). 하나님은 우리의 오물 같은 현실 속에 풍덩 뛰어드셔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동고(同苦)의 사랑’을 지닌 분입니다. 우리는 완벽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 입고 깨어진 모습 그대로, 실패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내 삶은 왜 여전히 팍팍한가?”라는 회의가 들고, 반복되는 실패 앞에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정오의 뜨거운 태양 아래 홀로 앉아 있던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의 고단한 삶의 자리에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안다. 너의 목마름을 안다.”
이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간 여인처럼, 우리를 얽어매던 수치와 집착을 내려놓읍시다. 한동일 변호사가 말했듯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을 가지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갑시다.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신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인정이나 소유에 목매지 않습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요 7:38), 오히려 메마른 이웃을 적시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는 깊은 산속 옹달샘과 같습니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지만, 땅속 깊은 곳, 보이지 않는 근원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은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으며, 퍼낼수록 더 맑고 시원한 물이 되어 목마른 짐승과 길손의 생명을 살립니다. 우리의 영혼도 묵상을 통해 그 깊은 근원에 닿아 있을 때, 비로소 세상을 살리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