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22-36 그늘의 기쁨 :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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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자아를 확장하려는 욕망을 거두고, 신랑 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기쁨 속으로 기꺼이 사라지는 '조연의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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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참 묘해서 자기가 선 자리가 조금이라도 좁아지면 금세 서운함을 느낍니다. 누군가 나보다 더 주목받고, 내가 공들여 세운 것들이 타인의 빛에 가려질 때 우리는 존재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스승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이들이 이제는 예수께로 몰려간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들은 시샘 어린 우려를 표합니다. "선생님,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갑니다."
그러나 요한의 대답은 맑고 투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임을 분명히 합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신부를 만나는 것을 보며 질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랑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기쁨을 누립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이 고백은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이가 누리는 '자유함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 회의에 빠지거나 지치는 이유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나의 확장'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로움, 나의 열심, 나의 존재감이 부각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공허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우리는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것에 패배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신앙은 주님의 거대한 사랑 앞에 기꺼이 패배하는 일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분은 만물 위에 계십니다. 땅에서 난 우리는 땅의 언어로 말할 뿐이지만, 하늘에서 오시는 그분은 하늘의 생명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풍성한 생명을 우리도 누리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자리를 내어드릴 때, 역설적으로 우리 삶은 하늘의 신비로 가득 차게 됩니다.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분들이나 더 적극적인 헌신을 다짐하는 분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그늘의 기쁨'을 배우는 일입니다. 주님의 빛이 환히 빛나도록 나라는 그림자를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대단한 주인공이 되라고 독촉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분의 흥왕함을 함께 기뻐하는 '친구'가 되어주길 바라실 뿐입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박수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세운 공로가 기억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우리 영혼의 귀에 들려온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는 고백이 서글픈 자기 포기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만난 자의 환희가 되어 여러분의 삶에 깃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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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22-36 비교의 감옥을 넘어, ‘기꺼이 사라지는’ 기쁨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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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성취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는 ‘비교의 지옥’에서 벗어나, 말씀 앞에 멈춰 서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서사 속에 나를 ‘조율’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라짐으로써 영원히 남는 은총의 신비를 맛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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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짐을 지고 비틀거리며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찾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거대한 경쟁의 투기장과도 같습니다. 남보다 앞서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안심이 되는 이 숨 가쁜 질주 속에서 우리는 자주 길을 잃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3장의 풍경은 바로 그 치열한 경쟁심과 박탈감이 빚어낸 소란스러운 현장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선생님께 달려와 숨 가쁘게 고자질합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 3:26). 이 말속에는 짙은 패배감과 질투가 서려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원조 아닙니까? 그런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예수에게로 몰려갑니다. 우리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닙니까?” 그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뱉은 이 다급한 말은 결국 그들의 내면이 얼마나 불안하고 허약한지를 드러내는 증거가 되어 그들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낯뜨거운 우리 자신의 초상을 봅니다. 남이 잘되는 꼴을 보면 배가 아프고, 나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 같아 전전긍긍하는 모습 말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이 말은 질문이라기보다 ‘존재의 비명’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성공’과 ‘인기’에서 찾으려 했기에, 예수가 등장하자마자 존재의 기반이 흔들리는 멀미를 느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비교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세상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한 거룩한 ‘저항(Resistance)’”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커져라, 더 유명해져라”라고 우리를 채찍질합니다. 묵상은 그 욕망의 질주를 멈추고(Stop), 말씀 앞에 서서 나의 초라함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용기입니다. 또한 묵상은 나의 사소한 일상을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이야기 속으로 편입시키는 ‘번역(Translation)’의 과정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묵상의 사람이었다면,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가는 현상을 ‘우리의 실패’가 아닌 ‘하나님 약속의 성취’로 번역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훗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패배자의 자위가 아닙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당당한 겸손’입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이야말로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굳이 1등이 아니어도,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아도, 나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갖게 됩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할까?”, “하나님은 나를 잊으신 게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사역하고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거창한 성과를 낸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음을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오물 같은 현실 속에 풍덩 뛰어드셔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동고(同苦)의 사랑’, 즉 우리를 위해 끙끙 앓으시는 사랑을 지닌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세상을 이기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약함을 자랑하고, 누군가의 디딤돌이 되어주는 ‘기꺼운 사라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처럼 비교하며 조바심 내지 말고, 오직 주님만이 나의 전부임을 고백하며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때 우리의 비루한 일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내는 거룩한 그릇으로 빚어질 것입니다.
이제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얼룩진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나를 통해 주님이 드러나기를 소망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내가 작아지는 그 자리에서 주님이 커지실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오케스트라의 악기를 ‘조율(Tuning)’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의 악기가 제멋대로 소리를 내려고 하면 불협화음만 날 뿐입니다. 훌륭한 연주자는 지휘자의 손끝과 기준음(A)에 자신의 소리를 맞춥니다. 때로는 내가 돋보이고 싶어도 전체의 조화를 위해 소리를 줄이거나 멈춰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소리가 잦아들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웅장한 교향곡이 울려 퍼질 때, 비로소 내 인생은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율’로 완성되는 법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