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5-26 가면을 벗고 마주하는 참된 예배 : "내가 그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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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란 종교적 장소나 형식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운 실존을 주님의 빛 앞에 투명하게 내어놓고 영과 진리로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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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숨고 싶은 방'이 있습니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누추한 과거,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허기를 가리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도 그랬습니다. "이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했던 그의 요청은 언뜻 보면 편리함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시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우물에 오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회피'의 몸짓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여인의 아픈 구석을 정면으로 건드리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말씀은 도덕적 정죄가 아닙니다. 다섯 남편을 거쳤으나 지금 살고 있는 이도 남편이 아니라는 그 기구한 삶의 궤적 속에 숨겨진, '진정한 안식처'를 찾지 못한 영혼의 유랑을 주님은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쌓아 올린 방어기제를 허물고, 우리 존재의 '맨얼굴'과 마주하기를 원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신앙의 본질보다 '형식'에 매달릴 때가 있습니다. 여인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물었을 때, 이는 본질적인 갈증을 종교적인 논쟁으로 돌려막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이제 예배는 '어디서(where)'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how)', 그리고 '누구(whom)'의 문제로 전환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여기서 '진리'는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서는 '투명함'입니다. 시인 윤동주가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요/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내 악수를 받지 않는 왼손잡이요"라고 노래했듯,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과도 불화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주님의 빛 앞에 서면 나의 분열된 자아도, 남루한 상처도 그분의 가없는 은혜 안에서 하나로 통합됩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과연 예배자로 자격이 있는지 묻는 분이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 삶의 우물가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스스로를 "내가 그로다"라고 계시하시며, 우리의 모든 방황을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 하루, 거창한 종교적 의무감에 짓눌리기보다 그저 우리 곁에 와 계신 주님께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조용히 읊조려 보십시오. 우리의 굽은 길을 곧게 펴시고, 메마른 가슴에 생수의 강물을 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여러분의 삶을 다시금 축제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그 따스한 현존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예배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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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15-26 감추고 싶은 그늘에 비치는 햇살, ‘알아주심’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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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는 장소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가장 아픈 치부를 드러내 보이시면서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를 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진실한 나’로 응답하는 ‘관계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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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가 물러가고 대지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찾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거대한 연극 무대와 같습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그럴듯한 배역을 맡아 연기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무대 뒤편 대기실에 홀로 남겨졌을 때는 가면을 벗은 내 민낯의 초라함에 몸서리치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는 요청 끝에, 여인에게 아주 당혹스러운 말씀을 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송민원 교수는 성경을 읽을 때 이처럼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과 응답의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 이야기에서 갑자기 남편 이야기로의 전환, 이것은 단순한 화제 전환이 아닙니다. 여인이 그토록 갈망했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는 갈증의 근원, 곧 ‘감추고 싶은 상처’를 직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요 4:17).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온전한 진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과거(다섯 남편)와 현재(남편 아닌 남자와 동거 중임)를 낱낱이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녀를 꾸짖거나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요 4:17).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녀의 아픈 과거를 들추어내어 수치심을 주려는 차가운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래, 네가 의지했던 사람들도, 사랑이라 믿었던 관계들도 너를 채워주지 못했구나. 그 외로움을 내가 안다”라고 공감해 주시는 따뜻한 ‘온도’가 담긴 언어였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데 있다”고 했지만, 동시에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이야말로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과거가 폭로되는 순간, 여인은 도망치는 대신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대화의 주제를 ‘예배’로 옮깁니다(요 4:19-20). 이것은 회피가 아닙니다. 내 아픔을 꿰뚫어 보면서도 나를 매도하지 않는 분 앞에서, 비로소 영혼의 근원적인 질문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요 4:21)라고 하시며 장소의 문제를 넘어설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 4:23)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박대영 목사님은 『묵상의 여정』에서 묵상과 예배를 연결하며 “하나님은 인격이시고, 우리 인격에 반응하신다”고 말합니다. 묵상은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웅장한 건물이나 화려한 형식이 아닙니다. 나의 부끄러움, 실패, 감추고 싶은 욕망까지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라고 반응하는 ‘진실한 대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내 과거와 허물을 아시고도 나를 받아주실까?”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늘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오물 같은 현실 속에 풍덩 뛰어드셔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동고(同苦)의 사랑’을 지닌 분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I am he)”(요 4:26)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세상은 자격 있는 자에게 상을 주지만,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 상처 입은 자, 목마른 자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은혜’입니다.
이제 무거운 종교적 가면을 벗어버리십시오. 그리심 산이냐 예루살렘이냐를 따지는 논쟁을 멈추고, 지금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묵상은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먼 여행”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먼 길을 걸어, 오늘 우리의 우물가, 우리의 예배 자리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가장 아픈 곳을 어루만지시며 “내가 너를 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이 시간, 우리의 영혼은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이 깊은 만남과 사귐이 있는 예배를 통해, 메마른 일상이 영원히 솟아나는 기쁨의 샘물로 변하는 기적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악기를 ‘조율(Tuning)’하는 것과 같습니다.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듯, 세상의 욕망과 두려움으로 인해 음정이 틀어진 우리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어놓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 음감’에 맞추어 다시 조율할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은 불협화음이 아닌, 이웃과 세상에 깊은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율’을 연주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