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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21 심판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 빛으로 걸어 나오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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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정죄의 공포 앞에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신뢰하며 어둠 속에서 빛으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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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가장 익숙한 구절을 꼽으라면 단연 요한복음 3장 16절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너무 자주 들어서 때로는 그 의미가 마모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우주적인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감상적인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떼어내어 깨어진 세상의 틈새를 메우려는 하나님의 처절한 의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준엄한 심판자의 모습으로 그려놓고 그 앞에서 벌벌 떨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신앙이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자가 이미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의를 행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연약하고 흠결 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받는 자'라고 불러주십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안락합니다. 나의 부끄러움과 탐욕을 숨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 머무는 한 우리 영혼은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괴테는 임종 직전 "더 많은 빛을(Mehr Licht)!"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영적으로 침체된 분들이 있다면 기억하십시오. 빛은 우리를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 비춥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옵니다. 그 빛 앞에 서면 나의 누추함이 드러나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누추함조차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품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의 역설'입니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이란 대단한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나의 어둠을 주님의 빛 앞에 정직하게 내어놓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고 썼습니다. 우리의 고집스러운 자아, 정죄와 두려움이라는 낡은 세계를 깨고 빛의 세계로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정죄할 근거를 찾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생명의 빛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오늘 하루, 그 빛의 초대에 응답하여 어둠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투명한 존재로 살아가시길 빕니다. 우리가 빛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이 차가운 세상을 덥히는 온기가 될 것입니다. 그 따스한 은혜가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까지 닿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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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21 어둠을 밀어내는 빛의 애가(愛歌), 그 아픈 사랑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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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고백은, 어둠 속에 숨고 싶은 우리의 비루한 실존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닫힌 방에 친히 들어와 그 어둠을 걷어내시는 ‘동고(同苦)의 사랑’을 믿고 빛으로 나아오라는 거룩한 초대입니다.

*

겨우내 웅크렸던 대지가 기지개를 켜고, 마른 가지 끝에 물이 오르는 생명의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사연과 무게를 안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찾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과연 이 길 끝에 희망은 있는지 묻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3장 16절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암송하는,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그 충격적인 의미가 무뎌진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는 이 구절을 마치 천국행 티켓을 보장하는 보증수표처럼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 안에는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시간을, 아니 당신의 전부인 아들을 우리에게 건네주셨습니다. 이것은 거래가 아닙니다. 자격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일방적이고도 파격적인 ‘낭비’에 가까운 사랑입니다.

본문 17절은 이 사랑의 목적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두려운 심판자로 오해합니다. 나의 허물을 들춰내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여 어둠 속으로 숨으려 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는 말씀은(요 3:19), 바로 우리의 이런 회피 본능을 꿰뚫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면의 초라함과 욕망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럴듯한 가면(Persona)을 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김기석 목사님은 함석헌 선생님의 시 <님이 오신다>를 빌려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하곤 했습니다. 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방을 치우려 했으나, 깜빡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화들짝 깨어 보니 님이 이미 와 계신데, 방안에는 온갖 허섭스레기가 널려 있습니다. 그때 님은 "왜 이렇게 더럽냐"고 꾸짖는 대신,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닦으면 된다"시며 오히려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빛’의 성격입니다. 빛이신 주님은 우리의 더러움을 폭로하여 망신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혼돈과 공허 속에 친히 들어오셔서 그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를 ‘살리러’ 오셨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이야말로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깨끗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비루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그 ‘끙끙 앓으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압도적인 사랑을 우리 삶의 결로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단순히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묵상은 하늘의 언어를 나의 일상 언어로 바꾸는 치열한 ‘번역(Translation)’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른다는 것(요 3:21)은, 완벽한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묵상을 통해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빛이신 주님 앞에 내어놓고 그분과 사귀는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는 왜 여전히 이 모양일까?” 하는 회의가 들고, 반복되는 실패 앞에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심판이 아닌 구원을 위해 오셨습니다. 송민원 교수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문과 응답의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이제 무거운 종교적 강박이나 완벽주의의 가면을 벗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나를 찾아내어 안아주시는 주님의 빛 앞으로 한 걸음 나아오십시오. 우리가 빛 가운데로 나아갈 때,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요 3:21).

여러분의 삶이 비록 상처 입고 깨어진 조각들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 조각들을 모아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안고, 비틀거리는 걸음일지라도 주님과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와 같습니다. 유리는 그 자체로 깨지기 쉽고 투박한 조각들에 불과하며, 밖에서 보면 그저 거무튀튀하고 볼품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빛이신 하나님이 그 뒤에서 비추실 때, 우리의 상처와 얼룩조차도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황홀한 색채로 공간을 채우는 ‘거룩한 예술’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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