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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3-25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을 향한 사자후 :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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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회복이란 종교라는 이름의 '익숙한 편리함'을 걷어내고,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가 되도록 삶의 자리를 정화하는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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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심장이자 그들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견고한 성채였습니다. 절기가 되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환전상의 소란함이 성전 뜰을 가득 채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성전은 활기가 넘쳤으나, 그 이면에는 알맹이는 빠지고 형식만 남은 '카리스마의 루틴화(routinization of charisma)'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뜨거운 만남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이권에 밝은 제사장들과 상인들의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의 상을 둘러엎으십니다. 이 가차 없는 거룩한 분노는 단순히 장사꾼을 쫓아내는 행위를 넘어, '가름'과 '금기'를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던 낡은 종교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 2:16). 주님의 이 사자후는 오늘날 섬김과 낮아짐을 버리고 힘에 대한 선망에 빠진 우리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도 신앙을 일종의 거래로 오해하곤 합니다. 정성을 바치면 복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 익숙한 종교적 의례가 주는 안도감 속에 머물며 정작 하나님이 거하셔야 할 우리 마음의 지성소는 어지럽게 방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 2:19).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고난과 부활을 통해 세워질 당신의 몸, 그리고 그분을 모신 우리 각자의 존재가 진정한 성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환호하며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인지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표징'이라는 거죽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시는 주님의 '실체'와 일치하는 일입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나 더 뜨거운 헌신을 갈망하는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성전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도사린 탐욕의 상을 뒤엎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릴 수 있도록 존재의 소음을 잦아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아를 비워낼 때, 비로소 우리 가슴에는 하늘을 받칠 기둥 하나가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성전 삼아 거하시려는 하나님의 가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우리 삶의 마당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치워내고 주님의 평화를 정성껏 가꾸는 '성전 된 삶'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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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3-25 소란스러운 장터를 걷어내고, 우리 몸을 ‘공명(Resonance)’하는 성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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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의 채찍은 분노가 아니라 비틀린 욕망의 고리를 끊어내시려는 ‘아픈 사랑’이며, 우리는 그 사랑에 잇대어 우리 내면을 기도의 집으로 다시 세우는 거룩한 저항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

잿빛 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 어느덧 대지 깊은 곳에서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오늘이라는 기적의 시간을 건너오신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찾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거대한 시장(Marketplace)과 같습니다. 모든 가치가 숫자로 환산되고, “얼마나 유익한가?”가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장의 논리는 교회 문지방을 넘어 우리 신앙의 자리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2장의 성전 척결 사건은, 바로 이 ‘신앙의 상업화’를 향해 내리치시는 주님의 준엄한 죽비소리입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 성전은 제물을 파는 소와 양과 비둘기,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소음으로 가득 찼습니다(요 2:14). 겉으로는 예배를 돕는 편의(便宜)라고 했겠지만, 실상은 종교를 빙자한 탐욕의 카르텔이었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 했지만, 당시 성전 뜰은 최소한의 도덕마저 무너진 채, 힘과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쫓아내시고 상을 엎으시며 외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우리는 흔히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분노’에만 주목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할 거룩한 공간이 흥정의 장소로 전락한 것에 대한 깊은 ‘비탄(Pathos)’이 서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뱉으신 거친 말과 행동은, 결국 당신 자신의 몸을 허물어(십자가) 우리를 위한 참된 성전이 되시겠다는,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귀소 본능을 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성경은 질문으로 가득 찬 책이며,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을 엉뚱한 대답으로 비틀어 ‘새로운 차원’을 여시는 분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답하십니다. 46년이나 걸려 지은 건물을 헐라는 이 파격적인 말씀은, 화려한 건물 중심의 종교를 끝내고, 당신의 ‘몸’을 통해, 그리고 그 몸에 잇대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인격적 성전’의 시대를 여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무엇입니까?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는 시장터의 신앙을 걷어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세상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한 거룩한 ‘저항(Resistance)’”입니다. 또한 묵상은 나의 이익을 계산하는 머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마음에 가 닿는 ‘참여(Participation)’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내 안에 똬리 튼 장사치들의 소음을 잠재우고, 우리 영혼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정결한 성전으로 빚어가게 됩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경각심을 동시에 줍니다. “예수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5).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 변덕스러움, 그리고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욕망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러나 그 앎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앎이 아니라, 우리의 병든 자리를 도려내고 싸매어 고치시기 위한 ‘의사(Physician)’의 앎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늘 “하나님은 우리의 오물 같은 현실 속에 풍덩 뛰어드셔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동고(同苦)의 사랑’을 지닌 분”이라고 역설하셨습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는 왜 여전히 이 모양일까?” 하는 회의가 들고, 반복되는 실패 앞에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성전 뜰의 장사치들을 내쫓으셨지, 기도하러 온 죄인들을 내쫓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뒤엎으신 것은 우리의 ‘위선’과 ‘탐욕’의 상이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우리 존재의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여러분을 맡기십시오. 비록 채찍질이 아프게 느껴질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사랑의 매입니다. 겉모습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있는 건물이 아니라, 비록 투박하더라도 예수의 생명으로 꽉 찬, 그래서 세상의 아픔에 공명(Resonance)할 줄 아는 ‘걸어 다니는 성전’으로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악기를 ‘조율(Tuning)’하는 것과 같습니다. 줄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듯, 세상의 욕망과 소음으로 인해 우리 영혼의 음정이 흐트러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 음감(Standard Pitch)’에 맞추어 우리 마음을 다시 조율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 인생은 소음이 아닌, 이웃과 세상에 깊은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율’을 연주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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