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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31-41 진리라는 이름의 자유, 혈통의 집을 넘어 사랑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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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자유는 혈통이나 관습의 기득권 속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거함으로써 내면의 우상을 비워내고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평생을 걸고 매달려야 할 화두 하나를 던지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이 눈부신 선언 앞에 유대인들은 즉각 항변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그들은 혈통이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자신들을 가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내면의 쇠사슬을 꿰뚫어 보십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준엄한 실존적 진실 말입니다.


인간은 무언가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돈의 종, 평판의 종, 혹은 ‘나’라는 견고한 자아의 종이 되어 스스로를 옥죄곤 합니다.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종교적 형식이 주는 부자유함에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유는 내 마음대로 행하는 방종이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무는 평화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이 자유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란 나를 얽매는 어둠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궤도 안으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처하며 특권 의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요 8:39) 신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어떤 신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삶으로 번역해내는 과정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하면서도 진리를 말하는 예수를 죽이려 하는 그들의 분열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초상을 봅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과거의 화려한 신앙 경력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종의 멍에를 메고 헐떡이며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어떤 죄의 사슬에 묶여 있든, 아들의 권세로 그 매듭을 풀고 우리를 집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종은 집에 영원히 거하지 못하나 아들은 영원히 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환대받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할 때, 세상이 주는 불안과 결핍은 더 이상 우리를 구속하지 못합니다.


참된 자유인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혈통과 관습의 낡은 집을 나와, 진리의 빛이 인도하는 드넓은 사랑의 대지로 나아갑시다. 주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 눈부신 자유의 노래를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함께 불러 가기를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요한복음 8:31-41 낡은 자아의 감옥을 허무는 진리, 그 찬란한 ‘비움’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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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자유는 종교적 훈장이나 핏줄을 내세우는 오만을 버리고, 내 안의 꽉 찬 자아를 비워내는 ‘머무름의 묵상’을 통해 우리를 위해 끙끙 앓으시는 주님의 진리를 모셔 들일 때 비로소 주어지는 거룩한 은총입니다.

*

매섭던 겨울의 칼바람이 마침내 잦아들고,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기어코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는 경이로운 봄입니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당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을 수도 있었던 봄이 무사히 당도하는 이 기적 같은 계절에, 저마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신앙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저마다 자신이 얼마나 자유롭고 주체적인 존재인지 증명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화려한 타이틀과 소유를 내세우며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라 자부하지만, 실상 우리는 불안과 욕망, 남들의 시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꽁꽁 묶인 채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8장의 유대인들 역시 바로 그런 ‘거짓된 자유’의 환상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참으로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그러나 이 은혜로운 초대 앞에서 그들은 발끈하며 날을 세웁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 8:33).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항변입니까? 그들은 역사적으로 애굽과 바벨론의 노예였고, 당장 그 순간에도 로마 제국의 식민 치하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내면은 시기심과 죄악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낡은 훈장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자신들은 무조건 옳고 안전하다는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을 대할 때 이미 스스로 정해놓은 모범답안을 확인하려 하거나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으려는 얄팍한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자부심이라는 편견에 갇혀, 눈앞에 서 계신 참된 해방자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질병을 정확히 진단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7).


김기석 목사님은 일찍이 이 구절을 묵상하며 텅 빈 공간과 분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빈 공간에 분자가 적을 때는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그 숫자가 빽빽하게 늘어나면 결국 고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편견, 이기심, 종교적 허영이라는 자기 자신(Ego)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져 다른 이를 받아들일 틈이 없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단 한 뼘의 빈 공간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 바로 그것이 죽음이며 가장 끔찍한 구속(拘束)입니다.


이 단단한 자아의 감옥을 깨뜨리고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묵상을 어떤 지식을 채워 넣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참된 묵상은 내 안의 굳어진 자아를 허물고 말씀이 머물 수 있는 ‘빈방(Space)’을 마련하는 거룩한 비움의 작업입니다. 예수님은 “내 말에 거하면(Abide)”(요 8:31)이라고 하셨습니다. 묵상은 그분의 말씀이 내 존재의 중심에 들어와 안착하여 주인이 되시도록, 나의 알량한 권리와 고집을 내려놓고 철저히 주님의 뜻 아래 나를 항복시키는 ‘내어드림’입니다.


이기주 작가는 “말은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논리로 상대를 밀어내는 차가운 얼음장 같은 말을 쏟아냈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진리의 말씀은 얽매인 영혼의 결박을 풀어내고 굳은 마음을 녹여내는 펄펄 끓는 생명의 온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세상의 유혹에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데, 나 같은 사람도 정말 제자가 될 수 있을까?” 하며 회의에 빠져 계신 분이 있습니까? 번듯한 종교적 열심을 내지 못해 웅크려 계십니까?


예수님의 이 따뜻한 온기가 담긴 선언을 기억하십시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우리의 자유와 구원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처럼 혈통이 좋아서, 혹은 대단한 도덕적 업적을 쌓아서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친히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우리의 오물 같은 현실 속에 풍덩 뛰어드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우리를 얽어맨 죄의 사슬을 끊어내신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끙끙 앓으시는 사랑’ 덕분입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일어서서 거룩해질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참된 자유인은 내 의를 증명하려 애쓰는 자가 아니라, 내 안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오직 십자가의 은총에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사람입니다.


이제 “나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발뺌하는 교만을 거두고, 나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의 빈 공간에 찾아오신 주님의 진리를 온전히 환대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끙끙 앓으시는 사랑에 우리 존재를 푹 담글 때, 세상의 헛된 시선과 강박에서 풀려나 비로소 새를 날게 하고 바람을 흐르게 하는 넉넉한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 진리의 빛 안에서 자유인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아름다운 ‘동양화의 여백(Negative Space)’과 같아야 합니다. 화폭 전체가 물감으로 빽빽하게 칠해져 있다면, 그 그림은 보는 이에게 숨 막히는 답답함만을 줄 뿐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하얀 여백이 존재할 때, 비로소 그 공간은 새가 날아오르고 맑은 바람이 통과하며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무한한 생명의 우주로 변모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알량한 지식과 자존심으로 꽉 차 있을 때 말씀은 질식하고 맙니다. 묵상을 통해 내 자아를 비워내고 영혼의 넉넉한 여백을 마련할 때, 진리이신 성령의 바람이 우리 삶을 관통하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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