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41-59 내어줌의 신비, 그 살과 피가 만드는 생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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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내면화하여, 그분의 사랑과 희생이 내 삶의 문장이 되고 노래가 되게 하는 거룩한 육화(肉化)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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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 말씀하시는 예수를 향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커져 갑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하여 지금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42). 그들은 익숙함이라는 감옥에 갇혀 예수를 바라봅니다. 어제까지 함께 밥을 먹고 길을 걷던 이웃의 아들이 신적 기원을 말할 때, 인간의 이성은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없을 때, 우리는 우리 곁을 지나는 거룩한 신비를 놓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향한 불신과 회의를 정면으로 돌파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6:54).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이고도 혐오스러운 비유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먹고 마심'의 은유 속에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음식이 우리 몸속에 들어와 소화되어 우리의 살과 피가 되듯, 예수의 정신과 삶이 우리 존재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는 "사람은 그가 먹는 것 그 자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욕망과 경쟁의 논리를 먹고 산다면 우리 존재는 그저 욕망의 화신이 되겠지만, 예수라는 생명의 떡을 먹는다면 우리 삶은 예수를 닮은 사랑의 현장이 됩니다.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신앙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신앙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의 신비'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은, 우리 또한 타인을 위해 쪼개지는 떡이 되고 흘려지는 포도주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적극적인 신앙은 열광적인 찬양이나 화려한 집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자원에서 타인의 허기를 채울 작은 조각을 떼어내는 그 희생의 자리에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의 살과 피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쓴 '몸의 편지'입니다. 연약한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던 삶을 떨치고 영원한 생명의 리듬으로 춤추게 됩니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는 약속은 오늘 우리가 겪는 모든 상처와 결핍을 덮고도 남는 넉넉한 은총입니다.
이제 우리도 세상으로 나아가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떡이 됩시다. 내가 먼저 낮아지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 때, 그 쪼개진 틈 사이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먹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 때, 우리의 일상은 비로소 하늘의 잔치가 되고,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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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41-59 이해를 넘어 ‘섭취’로, 관념을 넘어 ‘사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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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내 이성의 잣대로 예수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당신의 살을 내어주신 주님을 내 존재 안으로 받아들여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하나로 얽혀 들어가는 신비한 ‘연합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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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고단한 짐을 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납득’과 ‘이해’를 강요합니다. “내 상식에 맞느냐?”,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라는 질문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중력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6장의 유대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요 6:41)라고 말씀하시자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명쾌했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42).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그저 가난한 목수의 아들,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비루한 이웃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상식과 경험이라는 견고한 성벽은 하늘에서 온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밀어내 버립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편견에 갇혀, 눈앞에 있는 생명의 실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내가 그려놓은 하나님, 내 욕망을 투사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수군거림을 멈추게 하시며 충격적인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살을 먹고 피를 마시다니요.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식인(Cannibalism)을 연상시키는 혐오스럽고 야만적인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기주 작가는 “말은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겉보기에 거칠고 섬뜩해 보이는 이 말씀의 이면에는, 당신의 전부를 찢어 우리에게 생명으로 건네주시려는 주님의 뜨겁고 ‘아픈 사랑’이 펄펄 끓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우리 삶으로 가져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우리는 묵상을 그저 조용히 앉아 사색하는 것쯤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남을 먹어치워라, 경쟁에서 이겨라”라고 속삭입니다. 묵상은 그 탐욕의 논리에 저항하며, 오히려 나를 위해 먹히신 주님의 살을 받아먹는 거룩한 식사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이 내 안에서 소화되어 나의 피와 살이 되듯,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내 존재 안으로 삼켜 나의 것으로 만드는 치열한 ‘체화(Incarnation)’의 과정입니다. 그때 묵상은 관념이 아니라 내 삶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사건’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나는 자격이 없다”는 자괴감이나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하는 회의가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온 것은 우리의 지적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도덕성이 훌륭해서도 아닙니다.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잡아이끄셨기 때문입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일어서서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하고 납득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즉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됨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이해하려는 노력을 잠시 멈추고, 그저 주님을 ‘먹으십시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분의 성품을 맛보십시오. 밥을 먹어야 육신이 살듯, 예수를 먹어야 영혼이 삽니다. 내 안에 계시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는(요 6:56) 이 신비한 연합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생명력을 회복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도의 삶은 하얀 천이 붉은 물감에 ‘염색’되는 것과 같습니다. 천이 물감 속에 푹 잠기면, 처음에는 본래의 색을 잃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물감의 색이 천의 올 하나하나에 깊이 배어들어 마침내 천과 물감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색깔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물감에 푹 잠길 때, 우리의 비루한 자아는 사라지고 우리 온 존재가 예수의 생명으로 붉게 물들어 세상에 그 사랑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