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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1-15 빈들에서 피어난 나눔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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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법 같은 양식이 아니라, 자신의 작은 것을 기꺼이 내어놓는 '어린아이의 손'을 통해 시작되는 사랑의 연쇄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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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바다 건너편, 해 저무는 빈들에 허기진 군중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영혼의 갈증에 목마른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보며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계산기는 냉정합니다.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도 부족하다며 수치로 절망을 말하고,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보며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느냐'며 한계를 긋습니다.

우리는 늘 결핍을 셉니다. 부족한 예산, 모자란 시간, 연약한 능력을 탓하며 '할 수 없음'의 이유를 찾기에 분주합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이 '빈들의 막막함' 앞에서 신의 부재를 묻곤 합니다. 하지만 기적은 풍요 속이 아니라 바로 그 결핍의 한복판에서, 한 어린아이가 내민 보잘것없는 도시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신에게 빌려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그 소박한 나눔은 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마중물이었습니다.

예수는 그 떡을 들어 '축사'하셨습니다.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 즉 감사하셨다는 뜻입니다. 부족함을 불평하기보다 이미 있는 것에 감사할 때, 소유의 논리는 존재의 논리로 바뀝니다.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열두 바구니는 물리적 증식이 아니라, 한 사람의 헌신이 모두의 마음을 열어 각자가 숨겨둔 '자신의 떡'을 꺼내 놓게 한 '사랑의 전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은혜는 우리를 로봇처럼 부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선한 의지를 일깨워 우리로 하여금 기적의 통로가 되게 하시는 배려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때로는 적극적인 신앙생활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거창한 헌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찾으시는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같은 여러분의 소소한 일상과 진심 어린 '예'라는 응답입니다. 연약한 우리가 내미는 그 작은 손길 위에 하나님의 손이 포개질 때, 빈들은 더 이상 고립된 장소가 아닌 하늘의 잔칫상이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 삼으려 했습니다. 배부름의 욕망을 채워줄 해결사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홀로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기적의 목적은 권력이 아니라 사랑의 사귐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나누며 서로의 허기를 채워주는 따뜻한 환대입니다. 그 은혜의 신비 속에 머물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마르지 않는 축제가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요한복음 6:1-15 계산된 결핍의 언덕을 넘어, '감사'로 빚어내는 넉넉한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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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손에 쥐어진 것의 초라함을 계산하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나의 일상을 들어 축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잇대어 결핍을 풍요로 바꾸는 ‘참여의 신비’입니다.

*

무채색의 일상 속에서도 간간이 비치는 햇살이 반가운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고단한 짐을 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찾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거대한 계산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나는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았나?"라는 질문이 우리를 끊임없이 채찍질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6장의 빈 들은 바로 그 결핍과 계산이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의 축소판입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올 무렵,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배고픔을 아시고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 송민원 교수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듣고 싶은 대로 읽으려는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정보(Information)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빌립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의 크기를 달아보시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빌립은 재빨리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

빌립의 계산은 정확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에는 '절망'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안 됩니다", "부족합니다",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과 마주할 때 내뱉는 습관적인 언어 아닙니까? 한동일 교수는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데 있다"고 했지만, 비참함에 머물러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없는 것을 세어보며 한숨 짓는 데 익숙합니다.

그때 안드레가 한 아이를 데려옵니다. 그 아이의 손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의 거친 식사였습니다. 안드레조차도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9)라며 회의합니다. 하지만 이기주 작가는 "말은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안드레의 말은 차가운 계산이었지만, 아이가 내민 그 작은 도시락에는 주님을 향한 따뜻한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초라한 도시락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손에 들고 '축사(Eucharist)' 하셨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것입니다. 결핍의 현장이 감사의 제단으로 바뀌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기적의 실체를 우리 삶으로 가져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묵상을 조용히 앉아 있는 정적인 시간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묵상은 역동적으로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저항(Resistance)’이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참여(Participation)’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가져야 나눌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묵상은 그 탐욕의 논리에 "아니요"라고 말하는 거룩한 저항입니다. 그리고 나의 작고 보잘것없는 일상을 떼어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그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내놓은 행위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묵상의 절정이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내 것'을 움켜쥐려는 본능을 거스르고, 나의 부족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5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요 6:15). 빵 문제를 해결해 주는 강력한 경제 대통령, 로마를 물리칠 힘 있는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환호성을 뒤로하고 "혼자 산으로 떠나" 가셨습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큽니다. 주님은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까?", "왜 내 삶은 여전히 팍팍한가?" 하며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왕의 자리에 오르기보다, 고독한 산 위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화려한 성공이나 거창한 업적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한 아이의 손에 들린 보리떡처럼, 투박하고 부끄러운 우리의 일상을 원하십니다.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자각을 가지고, 나의 작음을 주님 손에 맡기십시오.

이제 계산기를 내려놓고, 감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이것밖에 없습니다"라는 탄식이 "이것으로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바뀔 때, 우리의 메마른 광야는 풍성한 잔칫집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결핍을 탓하기보다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나의 작은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기적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도의 삶은 ‘만화경(Kaleidoscope)’과 같습니다. 만화경 속에 들어있는 것은 깨진 유리 조각이나 볼품없는 구슬 몇 개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혼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파편들입니다. 하지만 빛이신 주님을 향해 그 통을 들어 올리고, 은혜의 손길로 돌려주실 때, 그 초라한 조각들은 서로 어우러져 세상 그 어떤 예술가도 흉내 낼 수 없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문양’을 만들어 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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