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60-71 떠나가는 등 뒤에서 부르시는 생명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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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기대가 무너지는 자리에 멈춰 서서, 영생의 말씀이신 주님의 곁을 끝내 지켜내는 사랑의 인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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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의 빈들을 가득 채웠던 환호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열광하며 예수를 임금 삼으려던 군중도,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는 주님의 난해한 설교에 고개를 젓던 제자들도 하나둘 등을 돌립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그들에게 예수는 더 이상 매혹적인 해결사가 아니었습니다. 기대를 배반당한 이들의 뒷모습은 차갑고 단호합니다. 인생의 밤이 깊어질 때, 혹은 신앙의 신비가 내 이성의 문턱을 넘지 못할 때 우리도 종종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주님은 떠나가는 이들을 붙잡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남겨진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이 질문은 쓸쓸한 체념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던지는 거룩한 초대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 활동"이라 했습니다. 신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때 곁에 있는 것은 쉽지만, 오해와 고독의 시간이 닥칠 때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지극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답'이 보이지 않을 때 길을 떠나지만, 베드로는 답 대신 '분'(존재)을 붙들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적극적인 신앙이란 뜨거운 감정의 고조가 아닙니다. 그것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요 6:63)는 말씀을 붙들고,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응시하는 인내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육적인 유익, 즉 내 삶의 편익을 신앙의 척도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살과 피, 즉 그분의 고난과 희생까지도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심오한 일치'를 원하십니다. 연약한 우리가 끝내 주님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택하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신앙이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주님은 그런 우리의 흔들림조차 다 알고 계십니다. 열두 제자 중 하나는 '마귀'라 하실 만큼 우리 안의 어둠도 꿰뚫어 보시지만,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곁에 두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어리석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니면 안 되기에 끝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가치들이 우리를 유혹하며 떠나라고 손짓할 때,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의 호흡으로 삼읍시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영생의 말씀이신 주님 곁에 머무는 것, 비록 그 길이 좁고 협착할지라도 그분과 함께 걷는 것 자체가 이미 승리입니다. 우리의 남루한 일상이 주님의 말씀으로 번역될 때, 떠나갔던 이들이 다시 돌아와 쉴 수 있는 생명의 숲이 우리 삶에 우거지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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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60-71 떠나가는 뒷모습을 품는 사랑, 영생의 말씀에 닻을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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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이성과 욕망에 맞지 않는 말씀 앞에서 돌아서려는 유혹을 이겨내고,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는 고백과 함께, 우리의 연약함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십자가 은총에 나를 온전히 내어맡기는 ‘참여의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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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마다 물이 오르는 계절입니다. 동장군도 슬슬 봄처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고, 꽃샘 추위만 간간히 바람과 함께 여기저기 나대고 있는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고단한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납득’과 ‘이해’를 강요합니다. 내 상식에 맞는지,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끊임없이 따져 묻는 이 피로한 일상 속에서,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6장의 끝자락은 우리 영혼의 뼈대를 뒤흔드는 서늘한 풍경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시자, 무리 사이에 큰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그들은 수군거렸고, 결국 많은 제자가 떠나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요 6:66).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 환호했던 무리들이, 왕이 되어달라고 떼를 쓰던 그들이, 예수님이 떡이 아닌 ‘십자가’와 ‘자기 비움’을 말씀하시자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입니다.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알고 있는 모범답안을 확인하려 하거나,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으려는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세속적 욕망과 기대를 투사할 대상을 찾았던 것뿐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거스르는 진리를 선포하시자, 그들은 주저 없이 돌아섰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쉽게 회의에 빠지고, 기독교의 본질이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등을 돌리려 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인지도 모릅니다.
떠나가는 수많은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시던 예수님은 곁에 남은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이 질문에는 어떤 강요도, 붙잡으려는 애원도 없습니다. 오직 진리 앞에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시는 숭고함만 있을 뿐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베드로라고 해서 예수님의 그 심오한 말씀을 다 이해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그는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이 머무름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묵상’의 자세입니다. 박영호 목사님은 묵상을 가리켜 “방황과 귀환”이자, 하나님의 역사에 즐거이 동참하는 ‘참여(Participation)’라고 정의했습니다. 또한 권연경 교수는 묵상을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합니다.
묵상은 텍스트를 머리로 완벽하게 분석해 내는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때로는 말씀이 내 폐부를 찌르고 내 욕망을 거스르더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그 곁을 서성이는 끈질긴 모험입니다. 이해할 수 없어서 방황하다가도, 다시금 나를 부르시는 영생의 말씀 앞으로 돌아오는(귀환) 그 치열한 대화와 참여의 과정이 바로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이기주 작가는 “말은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듯한 예수님의 거칠고 어려운 말씀의 이면에는, 우리를 썩어질 욕망의 늪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려는 가장 뜨겁고 절절한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의 길이 버겁게 느껴지고, “나 같은 사람이 과연 끝까지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까?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위축될 때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 뒤에, 가룟 유다의 배신(요 6:70-71)을 암시하며 끝을 맺습니다. 베드로 역시 훗날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 부인하고 떠나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초월적인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오물 같은 현실 속에 풍덩 뛰어드셔서 우리를 위해 끙끙 앓으시는 사랑을 지닌 분입니다. 우리가 남아서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배신할 것까지 다 아시면서도 끝까지 우리를 품어 안으시는 주님의 그 지독한 사랑 때문입니다. 한동일 변호사가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고 자각했던 것처럼, 우리의 나약함보다 그분의 은총이 훨씬 더 크고 강합니다.
신앙은 우리가 완벽하게 무언가를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 벼랑 끝 같은 삶에서도 나를 단단히 붙들고 계신 그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무엇을 더 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십시오. 이해되지 않는 삶의 모호함 앞에서도, “그래도 주님 외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품에 기대십시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달콤한 소리에 이끌려 흩어지려던 우리의 마음을 다잡고, 우리를 참된 자유와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음성에 온전히 닻을 내리는 은혜가 여러분의 일상에 가득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앙의 여정은 캄캄한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등대(Lighthouse)’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거센 파도와 어둠이 우리를 집어삼킬 듯 몰아치고 이성이 길을 잃었다고 아우성칠 때, 우리가 살길은 바다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저 멀리서 주기적으로 반짝이며 "이곳에 길이 있다"고 묵묵히 알려주는 영생의 말씀, 그 등대의 불빛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우리 존재의 닻을 그곳에 내리는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