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21-30 아래에서 위로, 땅의 언어를 넘어 하늘의 숨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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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땅의 인력에 묶인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위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하늘의 자유를 호흡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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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흐르는 대화의 결이 자못 서늘합니다. 주님은 “나는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닿을 수 없는 두 세계 사이의 거대한 심연을 드러내는 탄식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자결’의 의지로 오해하며 땅의 논리로 해석하지만, 주님은 그 근원적 차이를 분명히 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우리는 대개 ‘아래’의 논리에 익숙합니다. 비교하고, 소유하고, 나를 증명하여 타인을 압도하는 것이 이 땅의 질서입니다.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종종 이 땅의 문제가 풀리지 않음에 절망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아래의 인력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을 말했습니다. 중력이 우리를 땅으로 끌어당긴다면, 은총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빛의 세계로 들어 올립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숨결’을 거부한 채 스스로 만든 욕망의 감옥에 갇혀 지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인자를 든 후에야 내가 그인 줄을 알고”(요 8:28)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든다’는 것은 십자가의 높이입니다. 가장 비참하고 낮은 곳이라 여겨졌던 십자가가 역설적이게도 가장 높은 하늘의 사랑을 드러내는 자리가 됩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내가 대단한 고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돋보기를 통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신다는 그 든든한 신뢰가 우리를 아래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삶이 무겁고 존재가 비루하게 느껴질 때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십시오.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땅의 흙먼지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도 단 한 순간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가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심으로 그분과 하나가 되셨듯, 우리도 내 뜻이 아닌 그분의 사랑을 삶으로 번역해낼 때 우리 안의 심연은 메워지고 하늘의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는 존재들입니다. 썩어질 것들에 마음을 다 빼앗기지 마십시오. 주님이 가신 그 길, 낮아짐으로써 높아지고 죽음으로써 살아나는 그 신비로운 하늘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갑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과 함께 걷기 시작할 때, 많은 이들이 주님을 믿었던 그 갈릴리의 언덕처럼 우리 삶의 자리에도 생명의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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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21-30 뻘밭을 기어 마침내 하늘에 닿는 은혜, 그 ‘포월(匍越)’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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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땅의 욕망으로 끌어당기는 무거운 중력에 갇힌 우리가, 뻘밭 같은 현실의 밑바닥을 기어가며 죽음을 넘어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삼켜 내 삶으로 번역해 내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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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으로 새싹들이 피어나는 생명의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과 신앙의 회의 속에서 여전히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깁니다. 더 많이 소유해야 하고, 더 높이 올라가 타인을 지배해야만 안심이 되는 욕망의 중력은 참으로 강고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아 올리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하지만, 그럴수록 영혼은 더 깊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8장의 본문은 바로 그 땅의 인력(引力)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그들을 하늘의 긍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먹먹한 대화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이 선언은 단순한 출신 성분의 구별이 아닙니다. 땅의 논리, 즉 힘과 성취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의 척도로는 생명의 주님을 결코 알아볼 수 없다는 서늘한 일깨움입니다.
그렇다면 ‘아래’로 추락하는 우리가 어떻게 ‘위’로부터 오는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철학자 김진석 선생은 ‘포월(匍越)’이라는 독특한 조어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이는 뻘밭과 같은 냄새나고 질척이는 현실의 밑바닥에서 묵묵히 기다가, 마침내 그것을 훌쩍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저 멀리 높은 하늘에 머물며 우리에게 밧줄을 던져주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친히 종의 형체를 입고, 우리가 뒹구는 그 참혹한 뻘밭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며 기어가신 분입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위대한 가치를 ‘콤파씨오(compassio)’, 즉 타인의 고통을 함께 겪어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땅의 뻘밭을 기어 마침내 십자가에 ‘들리신’ 사건(요 8:28)이야말로, 죄와 상처로 얼룩진 우리를 향한 절대자의 가장 맹렬하고도 완전한 콤파씨오의 성취입니다.
이 압도적인 십자가의 은총을 우리 삶으로 모셔 들이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묵상을 촛불을 켜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요히 앉아 있는 ‘식물적인’ 상태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참된 묵상은 결코 식물적이지 않습니다. 묵상은 마치 사자가 먹이를 앞에 두고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잘게 씹어 넘기듯, 하나님의 말씀을 내 오감으로 철저하게 대면하는 ‘동물적인’ 행위입니다. 말씀의 텍스트를 내 존재 안으로 꿀꺽 삼켜서 나의 피와 살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내 일상의 언어와 행동으로 번역해 내는 치열한 소화 과정이 바로 묵상입니다.
송민원 교수는 신앙이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무게중심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이라고 통찰했습니다. 나 자신을 향해 있던 삶의 무게중심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놓고, 그 말씀에 완전히 항복하여 나를 내어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를 ‘삼킨’ 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의 여정을 걷다 보면 “나는 왜 여전히 이 모양일까?”, “내 안에 정말 예수가 계신 걸까?” 하는 회의와 자책감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속도에 뒤처지는 것 같고, 내세울 만한 헌신의 열매가 없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며 예수님께서 남기신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우리 구원의 근거는 나의 완벽함이나 대단한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뻘밭 같은 우리의 비루한 일상 속으로 기어들어 오셔서, “내가 결코 너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껴안으시는 주님의 포월(匍越)하는 은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단한 영웅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 긍휼의 은혜를 배부르게 삼켜 먹고,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성실하게 살아내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의 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오직 나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들리신 주님의 은혜만을 온전히 의지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아래로 끌어당기는 세상의 중력을 이겨내고, 비로소 자유롭고 넉넉한 하늘의 생명으로 호흡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그 따스한 은총의 볕 아래서 날마다 새롭게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가끔 생태계의 청소부인 ‘지렁이’를 보며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지렁이는 화려한 날개나 매서운 발톱도 없이 그저 캄캄한 흙속을 기어 다닙니다. 하지만 버려진 쓰레기와 썩은 잎사귀들을 제 몸속으로 꿀꺽 삼켜 정화한 뒤, 메마른 땅을 숨 쉬게 하고 뭇 생명이 피어날 수 있는 비옥한 거름으로 내어놓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미움과 폭력이라는 독을 당신의 몸으로 온전히 삼켜내어 기어코 부활의 생명으로 피워낸 거룩한 기적입니다. 우리 역시 묵상을 통해 이 십자가의 은혜를 삼켜 낼 때, 세상의 척박함을 정화하고 누군가를 살려내는 거룩한 생명의 통로로 빚어지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