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13-24 내 안의 우주를 마주하는 시간
우리가 스스로를 보잘것없게 여길 때조차 우리는 하나님의 정성으로 빚어진 ‘신비’이며, 그 신비를 회복하기 위해 내면의 어두움을 주님의 빛 아래 비추어 보게 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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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낯선 타인을 마주하듯 어색함을 느낍니다.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디지 못해 늘어난 주름과, 남들과 비교하며 위축된 초라한 자아가 거기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이 되어라’, ‘무엇을 가져라’고 부추기며, 그렇지 못한 삶은 마치 불량품인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혐오감, 이것이야말로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가장 깊은 질병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는 우리의 존재가 결코 우연의 산물이나 대량 생산된 공산품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13절). 여기서 ‘지으셨다’는 표현은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수를 놓거나 도자기를 빚는 행위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뱃속이라는 비밀스러운 작업실에서 우리라는 존재를 빚으실 때, 온 우주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며 “신묘막측(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하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두려울 정도로 놀랍고 신비롭다’는 뜻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Masterpiece)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손끝으로 빚은 우리를 보며 경탄하십니다.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우리의 날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16절의 말씀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만큼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시며, 우리 삶에 고유한 뜻을 품고 계시다는 사랑의 확증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살다 보면 이 고귀한 자의식은 흙탕물처럼 흐려지곤 합니다. 세상의 소음과 악인들의 득세, 그리고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욕망과 불안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19절부터 22절에 걸쳐 악인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길’이 생명의 신비를 훼손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의 기도는 무언가를 달라는 떼쓰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23절).
여기서 ‘살피다’라는 단어는 광석을 제련하여 불순물을 걸러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께 자신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듯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내 안에 생명을 거스르는 ‘무슨 악한 행위’가 있는지 보아주십시오. 내 힘으로는 내 어둠을 몰아낼 수 없으니, 주님의 빛으로 나를 비추어 주십시오.”
신앙은 내가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고집이 아니라, 나를 빚으신 분께 나를 온전히 개방하는 용기입니다. 내 안의 불안, 시기, 분노, 열등감이라는 불순물을 주님 앞에 투명하게 드러낼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길(24절)”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성공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며, 하나님과 깊이 잇대어 사는 평화의 길입니다.
자신이 초라해 보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각이 머무는 곳이며, 그분의 정성이 깃든 신비입니다. 오늘 하루, 내 안의 소란함을 잠재우고 조용히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주님, 제가 지금 영원한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 물음 속에 깃드는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을 참된 자유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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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9:13-24 모태에서 맺어진 오묘한 언약,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
우리가 모태에서부터 신묘막측하게 지음 받은 창조의 기적(시 139:14) 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 속에 잠재된 어둠까지도 남김없이 살피시고 정화하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긍휼(헤세드)(시 139:23-24)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순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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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9편 13절부터 24절까지의 고백은, 한 인간 존재가 세상의 모든 관념적 지식과 사회적 평가를 뛰어넘어 창조주와 맺은 지극히 내밀한 관계에 대한 경이로운 선언입니다. 시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앎이 우리의 존재가 어머니의 태 속에 형성되기도 전에 시작되었음을 노래합니다.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장부(帳簿)에 기록된(시 139:16)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의 기준에 맞춰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끊임없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 애씁니다. 소비 사회는 우리에게 '더 많이', '더 빨리'를 외치며 우리를 '복사본(copy)' 으로 살도록 유혹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유일무이한 존재(original) 임을 선포합니다. 우리의 있음 자체가 우주적 기적이며 경이로운 선물이라는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마땅히 감탄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본질은 재산이나 지위에 있지 않고, 우리를 빚으신 분과의 이 깊은 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존은 이 놀라운 창조의 기쁨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는 선(善)을 행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때때로 미움과 욕망, 질투와 원망이 들끓고, 우리는 그 어두운 부분을 숨기려 애씁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여,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문제는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하는 인간적인 완벽주의의 강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自我) 라는 울타리에 갇혀 자기 속에 있는 어둠을 정직하게 직면할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이 괴로움 앞에서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를 샅샅이 살피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시 139:23)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기도는 심판을 위한 고발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긍휼, 곧 헤세드에 대한 전적인 의탁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심판하고 정죄하려 들 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랑으로 끌어안으시고, 우리를 정화의 불 속에 통과시키시어 우리를 당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시 139:24).
참된 믿음은 우리의 완벽한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질 때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굳게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적 집요함을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 속에 완전히 포섭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우리를 사랑으로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정화하시는 그 은총의 손길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그 "영원한 길"(시 139:24)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순례자가 되는 것뿐입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상처 난 몸으로 고독을 견디던 욥이 마침내 폭풍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하고 고통을 통해 참된 지혜를 얻어 새로운 삶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과의 더 깊은 만남으로 나아가는 문지방이 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