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07:01-21 욥의 탄식(歎息) 2 사람이 무엇이기에, 전전반측(輾轉反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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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고통의 시간이 너무 오래 되어 점점 희망이 사라짐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죽게 되었다는 괴로움을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며 호소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고, 어찌 이렇게 대단하게 여기고 마음에 두시는지, 권징하고 단련하여 잠시도 놓지 않으시는지, 무엇보다 왜 자신의 허물과 죄를 제거하지 않으시는지 묻고, 이제 곧 죽어서 자신을 찾을 수 없을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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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의 삶도 아프고 고단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일평생 일하다가 마침내 저녁이 되면 삯을 받습니다. 욥은 지금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며 고달픈 밤을 보내면서 마지막 삯을 받을 그런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자리에 드는 것도 힘들고, 잠못 이룰만큼 힘든 고통이 살에 있습니다. 구더기와 흙이 의복처럼 입혀졌고, 피부는 터졌습니다. 그런 날들이 베틀의 북처럼 빠르게 지나니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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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이 지경이 되기까지 친구들은 그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원인을 찾아 지적했고, 욥은 억울하게 이 시간들을 곱씹으며 수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계속 질문하며, 주어진 상황에서의 사유는 더 깊어 집니다. 우리가 행한대로 보응을 받는 일은 누구나 생각하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노동이 가득한 인생은 그 끝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행복하게 살아가는 어떤 이에게는 너무 짧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길게 느껴집니다. 누구보다 욥의 이러한 까닭없는 고통의 시간들이 오래 걸리니 그 끝이 속히 온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은 온통 고통으로 가득하고, 그래서 희망없이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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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살아왔던 욥의 인생이 이토록 아프고 고단하며 절망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욥도 우리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인생과 현실을 아는 일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평가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다 설명되지 않은 복잡 다단한 우리네 삶도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바라기는 그런 모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상황에서 묵묵히 이 길을 완주해 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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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절 우리 삶이 베틀의 북처럼 빠르게 지나가더라도 그 안에 참살이가 존재합니다.
욥은 자신의 생명이 한낱 바람같다 합니다. 이제 다시 행복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타인들과 주님도 이제 자신을 향해 눈을 들어도 볼 수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렇게 자신은 이제 생을 마감하고 이대로 사라질 것 같은 절망을 토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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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지금 소중한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입니다. 그토록 소중했던 친구들도 태도가 돌변해서 자신을 정죄하기 바쁩니다. 그런 욥에게 지금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이든 이해든, 기대를 할 수 있을까요? 실망과 낙심과 허무와 부질없음이 빼곡하게 생각의 전을 채우리라 생각합니다. 허무주의라고 말할 수 없지만, 지금 욥이 느끼는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라는 테마로 우리 스스로도 우리 삶이 주님으로 인해 소중해 졌음을 믿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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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생명을 다한 이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서 살아가는 이들,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설명할 수 없는 처지에서 삶의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이들, 하루만 살든, 오래오래 살든 이 땅에 있는 이들 모두 왜 여태 존재하는지, 왜 그렇게 살다 가는지, 그리고 그런 이들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은 왜 그런 이들의 삶을 허락하시는지 우리는 실상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만으로도 그의 삶은 참살이의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시각과 가치관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참살이의 의미라 믿습니다. 그러니 그런 이들을 함부로 정죄, 배제, 혐오, 비난, 비하, 무시, 경멸하는 등등의 행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가지 말들이 많지만 그래서 세상에서 인권을 신장시키는 행위들은 어쩌면 우리 기독교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우위에 있는 듯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는 일이 훨씬 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일이라 믿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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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1절 하나님은 인생을 감찰하시나 마음에 두시며,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로 여기십니다. (뒤집힌 시편 8편)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입을 얼어서 금하지 않고,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고,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지금 겪는 혼돈으로 마음의 괴로움이 더해져서 주님을 향하여 계속 질문하는 것으로 불평을 질문으로 표현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자기를 지키는지, 주께서 왜 자신을 이렇게 고귀하게 지으시고 마음에 두시는지, 아침마다 권징하고 순간마다 단련하시는지, 왜 잠시도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는지,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자신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왜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용서해 주시지 않는지 묻습니다. 그러다 결국 죽게 되면 주님이 찾으실 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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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여러가지 정의중에 기도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이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욥은 지금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질문 곧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 자체만으로 고통을 인내할 수 있으며,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고 복되게 우릴 여기시고, 우리를 향한 기대를 갖고 계시며, 그 기대가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책임자로 불러 주셔서 함께 세상을 다스리고(마 19:28),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벧후 1:4) 그래서 때로 우리를 당근과 채찍으로 인도하시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단련이 우리를 영적 가장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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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향한 신뢰가 있기에, 감사도, 고백도, 불평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향한 신뢰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징계든 고통이든,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하거나 묵상하거나 함께 더불어 살아 가는 상황에서 주님은 우리를 더 온전한 모습으로 빚으십니다. 그 연단의 과정이 비록 아프고 힘들고 어려울 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위대하여 여기시며, 고귀한 존재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끝까지 인내로 경주해 가야 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 찾아오시고, 마음을 살피시고, 우리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더할 수 없는 부담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든든한 기쁨으로 여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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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인과응보를 따라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주님 앞에서
날마다의 삶에 부담이 있으나
그런 삶의 방향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명을 주님이 지으시고 허락하신 것이니
그 소중함을 따라서
결코 소홀히 여기거나 극단적은 생각들은
추호도, 호리라도 우리 마음에서 멀어지기 빕니다.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라도
주님을 향하여 기도 곧 질문하기를 멈추지 아니하고
인생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귀한 존재로 지으시고
또한 주의 일에 동참하여 동역케 하시는 주님 따라
권징과 단련을 즐거이 감당케 하옵소서.
때로 그 중에서도 비뚤어진 모습은
내 주변에서 사라지길…
주님이 우리를 주의 일에 부르셨으니
왕같은 제사장으로 잘 다스리고
주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보배로운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삶을
온전히 감당해 나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