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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04:01-21 엘리바스의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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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의 탄식에 처음으로 반응합니다. 제일 먼저 이전에 욥이 고난 당하는 사람이나 죄를 지은 이들을 향하여 교훈하고 위로했던 사람이 왜 자신에게 닥친 일은 그렇게 힘들어하느냐고 말합니다. 이어서 지금도 인과응보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하며, 자신이 받은 환상을 해석하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확증편향적인 생각들을 쏟아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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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증편향(確證偏向) : 자신의 견해 내지 주장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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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절 언행심사가 일치된 삶이 온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의 탄식을 들은 엘리바스가 처음으로 입을 엽니다. 이전에 욥은 타인의 고통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엘리바스와 같은 생각으로 행동했다고 말하고, 이제 이 일이 욥 자신에게 이르니 힘들어하고 놀라는 데 대해 과연 욥의 경외와 소망이 온전한 길이었는지 반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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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성질이 급했던지, 가장 욥을 향해 할 말이 많았던지, 가장 욥을 사랑하든지, 가장 많은 것을 알았든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 침묵을 깨고 첫 일성(一聲)을 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일성에서 제기하는 반문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했던 욥의 온전함과 경외에 대한 의심입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두 번이나 욥의 온전, 정직, 경외와 탈악에 대해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것을 지켜본 엘리바스가 자신의 생일마저 저주하고 차라리 죽는게 더 낫지 않겠냐는 욥의 독백에 이렇게 질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기존의 신념에 머물라 하는데, 욥은 지금 기존  신념과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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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욥의 친구 엘리바스처럼 인과응보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신앙과 신념을 확증편향적으로 다 안다 생각하면서 살아온 것 같고, 그런 지식과 신앙이 회의적인 상황을 맞닥뜨린 이들에게 들이대고 위로한다고 그 원인을 고수하는 말들이, 타인에게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옭죄고 얽매고 걸림이 되게 해서 당하지 않아도 될 편협한 고통을 너무도 많이 자신이나 타인에게 앓음을 강요해 온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아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나의 신앙과 신념이 누군가에게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있다면 나는 아직 덜 빚어지고 덜 성숙해지고, 덜 익었기 때문입니다.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말로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힌다는 표현입니다. 이는 책을 읽지 않아 아직 덜 성숙한 이들의 말은 타인에게 상처가 되고 비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일평생 배워가야 함을 그렇게 더 성숙하고 더 익어가기 위해서 부지런히 말씀도 사람도 세상도 더 읽어가야 함을 겸손히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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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1절 인과응보의 확증편향에서 벗어나 예외성과 특수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죄가 없다면 망하지 않는다’. ‘정직한 자는 끊어지지 않는다’. ‘사자처럼 악독을 행한 자들은 뿌린대로 거둔다’. 이런 생각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에 그런 이들은 분명히 멸망하고 사라진다고 하는 규범적 지혜를 말하고 있다고 엘리바스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생각하여 보라’고 하는 엘리바스의 설명, 질문, 권면, 도전은 그대로 욥을 괴롭힙니다. 욥은 사는대로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녀와 이웃들의 삶에 있어서도 생각한대로 그가 가진 온전과 정직과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행동한 것입니다. 그런 사유의 깊이와 판단에 대해서 충분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지금 엘리바스의 말에 대해 욥인들 얼마나 곱씹고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표현이 ‘생각좀 해 봐라’, ‘남들 다 그러더라’, ‘너 죄짓고 잘되는 사람 없다?’등등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런 말들 그간 참 많이 해온듯 합니다. 이제 신앙의 연륜이 쌓여 갈수록, 어른이 되어갈 수록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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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없이 당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불가항력적인 자연 재해나 질병이나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이들이 허다합니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것도 있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에 있어서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더 혼돈스러운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성숙과 앎을 포기하고 되는대로 산다거나 사는대로 생각하는 것은 결국 예외적인 상황이나,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대로만 확증편향적으로 판단하고 그리고 그 기준을 따라 타인을 해석하고 정죄하거나 위로를 준다고 생각하며 언행심사의 기준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예외와 특수한 상황들을 맞닥뜨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인정하면서 앎과 모름 사이의 경계의 사이를 넘나들지 않으면 우리는 생각에서 깨어날 수 없고, 성숙 내지 확장해 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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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1절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들려줍니다. 영적인 존재가 한 말이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중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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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신비한 체험을 통해 들은 이야기들은 일반적으로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상반된 입장의 말씀들이 허다합니다. 그런 부분들을 문맥과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엘리바스는 지금 ‘의인은 없다 그러니 재난을 징벌로 받아 들이라,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보다 깨끗하고 의로울 수 없다. 하나님은 종도 믿지 않고 천사도 미련하다 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그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비할 수 없는 존재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욥을 믿어 주셨고(1:8; 2:3), 그래서 사람을 믿으시는 경우도 있고, 인과 율에 갇힌 하루살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창 1:27)으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흙, 티끌로 지었고, 쉬이 부스러지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십니다’(시 8:4,5). 엘리바스는 이렇듯 하나님도 사람도 자신이 확증편향적으로만 알고 있고,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에 대해 정말 많이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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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신비체험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것입니다. 이를 절대화하거나 일반화 하게 되면 상당히 위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상황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아시고 특별한 일들을 허락하시는데, 그것을 모든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자칫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부족한 지식이 투영된 부족한 진리이해를 갇고 함부로 타인을 향해 기준삼는 일은 또 위로와 권면이 아닌 또 다른 폭력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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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영화와 존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앎의 기쁨과 

풍성한 삶의 경험과 

성숙을 위한 지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앎이 온전을 향해 나아갈 때에

함부로 다 아는 것처럼

다 경험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성급히 결론내리고 교만히 행하지 않게 하옵소서. 

사는대로 생각하지 않고

그 말씀이 그런가 하고 상고하며

인과응보에 갇히지 않은

다양한 삶의 경험들과 예외와 특수한 상황들이

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일들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묵묵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허락해 주옵소서. 

고통의 시간이 길어질 수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연약해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도 굳건하게 지켜주옵소서. 

내가 가진 영적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으며

선악간에 옳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시옵고

우리를 깨끗케 하신 그 은혜 앞에서

새롭게 하시고 허락하신 그 삶을

겸손과 감사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에게 들려 주신 지식을

우리에게 경험되어진 일들을

우리가 행한대로 보응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안주하지 않고 한걸음씩

주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하루 되게 하옵소서. 

날마다 더 넓은 세상과 더 크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 더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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