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06:01-30 욥의 탄식(歎息)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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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고통이 죄의 결과이기에, 알고 지은죄 모르고 지은죄를 회개하라는 엘리바스의 말에 욥은 한없이 억울해합니다. 그 무엇보다 괴로움과 파멸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거기에 덧붙이는 말들이 비수처럼 꽂힙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자신을 끊어 버리시면 혹 고통 가운데서 기뻐할 것인데… 욥은 친구들마저 자신을 비난하니 참 억울합니다. 자신은 친구들에게 아쉬운 소리도 한적이 없었는데도 그러니 더 속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모르고 있는 죄가 있어 가르쳐 준다면 잠잠하겠다고 말하며, 친구들이 말이 고통스러웠다는 것도 토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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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절 고통당하는 자에게는 비판에 앞서 공감과 이해가 먼저입니다.
욥의 괴로움과 파멸의 무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습니다. 고통 중에 자신이 한 이야기가 경솔했다는 것을 금새 깨닫습니다. 전능자의 화살이 자신을 향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두려움이 자신을 엄습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들나귀의 풀, 소의 꼴만 있다면 울지 않고, 싱거운 것의 소금이면먹고, 달걀의 흰자위등이 맛이 있다 할지라도 지금은 이것들을 만지기도 싫을 정도로 식음을 전페할 만큼 괴롭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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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처럼 기록된 욥의 탄식에는 지금 욥이 당한 고통에 대한 무게와 두려움과 괴로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의 무게와 두려움과 괴로움이 감당하기 힘들어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에 대한 서운함이 묻어 있습니다. 왜 지금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설명해야 하는지, 그 원인이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야 하는지 괴로운데도 욥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통 중에서 한 말들만 갖고 문제를 삼고, 정작 자신의 상황에 대해 비판하고 판단하며 자신이 죄를 찾으려고만 하는 친구들을 향한 서운한 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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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아픔을 당하는 이들의 그것이 얼마나 크고 아프고 힘든지 당해 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그런 이들의 반응이나 말과 여러 처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자신의 관점으로 비판하는 일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직 성숙하지 못하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함부로 비판하게 됩니다. 나보다 더 약하거나 부족하거나 모자라 보이면 우리는 금새 내가 그들보다 더 우위에 있어서 충분히 그 상황에 대해 비판 조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냥 함부로 비판합니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아주 작은 공감과 한가지만이라도 이해해 주는 것일진대, 왜 그런 맘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지… 지금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이 오랜 이에게 가시같은 말과 판단은 끝까지 삼가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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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3절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중에도 무너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너무 심하니, 하나님이 자신의 간구나 소원을 외면하고 멸하시기를 기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맘까지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것을 위로와 기쁨과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능력으로 더 참고 기다리는데 한계에 달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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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도 어렵고, 그런 것에 대해서 거역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들이 잠깐도 아니고 오래도록, 그리고 사소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만큼 무겁게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한 자신의 간구와 소원에 대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은 것이 욥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버텨낼 기력이 쇠하여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이러한 부분들을 지켜가고 있는 욥의 모습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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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해도, 소원을 말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고, 그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서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나를 외면하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다리다가 결국엔 자포자기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은 응답은 커녕 마치 자신을 끊어버리고 멸하실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었던 요인은 적어도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나 믿음이 하나님의 오랜 부재와 같은 시간에도 인내로 경주해 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실재로 지금 욥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외면하며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멸하시길 기뻐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보다 욥을 믿어주고, 바라보며 기대하는 하나님을 우리는 앞서 보고 있었기에, 우리도 지금 욥과 같은 상황 속에서 동일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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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3절 고통당하는 자에게 주는 동정은 목마른 이에게 생수와 같은 것입니다.
낙심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저버릴 지라도 친구들로부터 동정을 받을 수 있는데, 지금 욥의 친구들은 개울 같이 변덕스럽고 개울의 물살같이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대상들과 데마의 떼들과 스바의 행인들이 광야의 와디에 와서 말라버린 개울을 보면 정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친구들은 욥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겁을 내고 있습니다. 욥이 그들에게 무엇을 달라하거나, 재물을 요청하거나, 원수의 손에서 구해 달라고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지레 겁을 먹고 경계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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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친구들이 무엇보다 가까이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경우도 있는데, 지금 욥의 친구들은 개울같이 변덕스러워 그러기는 커녕 욥의 말에 금새 태도가 바뀝니다. 지금 엘리바스로 부터 시작해서 친구들이 욥에게 위로하기 위해 말하는 비판과 훈계와 판단들이 물이 말라버린 와디와도 같습니다. 본인들의 의도와 기대와 달리 그런 언행은 고통당하는 이들을 오히려 곁길로 빠지게 하고, 간절히 위로를 구하고 사모하는 이들에게 정작 무엇하나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해서 낙심과 절망만 줄 뿐입니다. 심지어 욥의 고통을 보고 혹시나 자신들에게도 그 고통이 미칠까 두려워하며 겁내고 있습니다. 욥이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와서 좋은 맘으로 시작했지만 지혜가 부족하기에 그들의 언행은 결과적으로 욥의 상처를 더 후벼파는 효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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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우리 주위에 붙여 준 친구들은 내가 사랑하거나 사랑을 받아야 할 이들입니다. 그런 사랑과 위로를 주기 위한 우리의 언행들이 주고 받는 이들이 오해하거나 왜곡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비록 이렇게까지 함께한 이들의 모습만으로는 고마웠지만 어느 순간 자신들의 지혜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을 나름 설명하고 이해하고 그것을 주장하다가 결국엔 고통당하는 이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아픔을 주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도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래 참아야 하고, 무례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하지도 말아야 하고, 주장하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고전 13장). 그렇게 행한 사랑이라야 사막의 생수와 같은 위로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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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30절 고통당하는 자에게는 급히 전하는 옳은 말과 책망은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까지 합니다. 아무리 돌이켜도 무엇때문에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서 이 고통이 자신에게 온 것인지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엘리바스의 말은 결국 욥의 잘못이 있어서라고 얘기하니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그런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엘리바스의 말이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런 옳은 말이 그래서 자신을 책망하는 말이 이해는 되지만 지금 자신은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엘리바스가 자신을 정죄하며 책망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그런 언행이 지금 절망하고 실망한 이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고 인정되지 않고 바람에 날아갈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고아와 같은 친구들을 가벼이 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보고 말해 주면 자신이 그 면전에서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지혜가 부족하여 행악하지 말라고 되려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가진 의에 대해서 돌이켜 봐도 불의한 부분이 없고, 그런 분별력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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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징계를 받는 것이라 하면서 정작 욥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 말도 헛되고, 그렇게 욥에게 전하는 말고 욥에게 제대로 납득되지도 않습니다. 좀더 인격적으로, 자신을 향하여 친구로서 대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전히 분별력을 가지고 의롭고 정직하게 말하겠다고 합니다. 아픈 이들, 고통당하는 이들, 그래서 나보다 더 못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은연중에 무시하며 무례하게 훈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악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비인격적으로 무정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행악이라고 욥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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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맞는 말은 금보다 더 귀합니다. 적시적소, 적시적절한 언행이 위로와 깨달음을 줍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을 경우 그것은 위로보다는 고통과 오해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잠잠히 바라봐야 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고, 적절한 언행으로 하되 이를 전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진심을 담아야 합니다. 그런 의도도, 맘에 품은 생각도, 그리고 표현도 모두 진심을 담을 때라다 제대로 전달 됩니다. 그러면서도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 상대를 좀더 인격적으로 대하면서 진실한 언행으로 참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고통 없는 친구들보다 고통 가운데 있는 욥이 훨씬 더 상황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보고 언행심사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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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라도
주님을 향해 범죄치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원망할 만큼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
부디 우리에게 없길 빕니다.
그런 상황에서 경솔히 행하지 않을
절제와 인내도 갖고 싶습니다.
우리의 간구와 소원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그 시와 방식을 온전히 주님이 주관하시고
가장 적절한 때와 방법과 양으로 주시는 줄 믿고
인내로 경주할 수 있는 믿음도 주옵소서.
끝까지 주의 도움과 능력을 바라며
인내할 수 있는 기력도 주옵소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동정을 전하는
좋은 친구가 되게 하옵시며
도움의 사람들과 좋은 친구들 또한
제게도 붙여 주옵소서.
그래서 가장 필요로 할 때 서로 도움이 되는
주님의 사람들이게 하옵소서.
절망의 벼랑 끝에 있는 이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한여름 얼음냉수와 같은 사람이게 하옵소서.
사랑을 받을 줄도 알고 줄 줄도 아는이 되게 하옵시며
누군가에게 훈계와 가르침보다
배움의 자세를 늘 갖고 다가가며
모든 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며
사람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이가 되게 하옵소서.
나의 언행심사에 진심을 담고 전하는
진정한 친구, 사람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