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댜 1:10-21 구원받은 자들은 선한 이웃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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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고난과 환난을 방관하고 방치하는 것은 결국 악을 행하는 이에게 동조하는 포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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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6절 여호와께서는 형제의 고난을 방관하는 것이 포학한 죄라 하십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소극적인 데 머무르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데 나아가는 것이 사랑의 사도요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교회된 우리가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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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재앙을 방관하지 말았어야 하며
형제의 패망을 기뻐하지 말았었어야 하며
형제의 고난을 떠벌리지 말았어야 하며
형제의 환난에 구경하러 가지 말았어야 하며
형제의 고난을 방관하지 말았어야 하며
형제의 환난에 그의 것을 탐하지 말았어야 하며
형제의 피신을 막지 말았어야 하며
형제의 고난에 그를 원수에게 넘기지 말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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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진상규명이 되지 않아 고통당하는 우리 시대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있는 세월호, 이태원 유가족들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수많은 불의에 희생된 이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들의 아픔을 방관하지 말아야 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불법을 저지르는 후안무치, 안하무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며 정적 제거에 혈안이 된 정부의 행태를 방관하지 말아야 하며,
오늘 주변 교계 지도자들의 그릇된 행동을 방관하지 말아야 하며
이들의 전횡으로 말미앞아 피해를 당하고 고통당하며 아파하고 방황하는 성도들 또한 방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가장 가까이에서 실질적인 가난과 폭력과 결핍과 갈등과 외로움으로 말미암아 고난당하는 형제와 자매들을 실질적으로 돌아 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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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향하여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방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방치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그들을 향한 포학이며 폭력입니다. 그러고도 우리의 신앙을 지켰다고 말한다면 그 신앙의 대상과 내용과 결과는 무엇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대가없는 사랑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의 소외된 약자들을 향한 우리의 섬김과 사랑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내리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계산하고 따지고 이러쿵저러쿵하고 합리화하고 온갖 핑계로 미루거나 회피하면서 적선하듯 던지며 그로 말미암아 대가를 바라면 곧 떡을 줄 터이니 교회로 오라든지 헌신을 하라든지 하는 등의 행태는 종교장사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이는 사랑도 섬김도 헌신도 아닌 종교로 포장한 이기적 기만적 행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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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방관하지 않고 돌아봐야 할 형제와 이웃은 누구이며 누구의 선한 이웃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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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1절 여호와께서는 신원의 날에 온 세상을 여호와의 것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만국을 벌하실 날에 여호와께서는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어 거룩한 백성은 자기 기업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야곱과 요셉족속은 불과 불꽃이 되어서 지푸라기같은 에서 족속을 불살라 남은 자가 없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사로잡혀 갔던 곳에서 돌아오고, 이전에 빼앗겼던 땅은 되찾게 되고, 더 나아가 열방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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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예루살렘이 유린되고 난 뒤에 그들을 팔아넘긴 에돔을 향한 심판을 선언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을 지키사 이방인에게 유린된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그의 백성의 거처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에돔은 심판의 불꽃으로 살라 멸절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날이 오면 흩어진 이스라엘은 옛 영토를 되찾게 되고, 에서 시온에서 올라와 에서를 끌어내리고 온 세상을 여호와의 것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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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 팔레스타인을 점유한 이스라엘국가의 행태와 진행중인 전쟁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일부 지명에 대해서는 그 장소를 연결할 수 있으나 스바랏 같은 곳은 장소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되찾은 땅은 동서남북 모두를 말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째 아울러 이러한 땅을 되찾고 열방을 정복하는 일을 하게 되는 이스라엘은 혈통적 유대인도 아니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이스라엘은 더더욱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대변되는 새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차지하는 땅인 특정 장소로서의 땅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던 열방 곳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으로 해석함이 바람직합니다. 셋째, 회복과 정복과 심판이 전쟁이라는 폭력으로 쟁취되는 평화가 아닙니다. 이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2천년이 지난 시점에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가 원주민을 몰아내고 땅을 되찾았다고 하면서 시작된 폭력과 전쟁은 그 어떤 성경과 역사와 종교적인 이유를 들이대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태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백성된 교회를 핍박하는 수많은 대적들과 통치자와 악의 무리에 대한 요한계시록에서 인, 나팔, 대접 재앙을 통해 그리고 바벨론으로 대표되는 모든 악의 무리에 대해서는 16-20장에서 철저하게 심판으로 멸망당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오바댜 전체 구조와 메시지는 요한계시록의 축소판과도 같습니다.) 그러한 신원 가운데서 택한 백성은 하나님께서 인을 맞아 끝까지 보호하고 지키고 인도하시며 구원하실 것을 수차례 반복해서 예언하고 약속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온에서 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속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결론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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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포학한 세상 가운데서도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며 세상의 폭력에 동조하지 않고, 팔복의 삶을 살아가면서, 신원하는 날, 허락하시는 그 날까지 정의와 평화의 샬롬을 고수하고 실현해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날과 그 일을 이루실 것이기에 우리는 올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믿음의 분량을 따른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까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지혜로 겸손히 행하며 나아가는 삶을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살아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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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에게 사랑할 까닭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웃의 아픔과 고통과 절망을 외면치 않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있는 믿음과 섬김의 능력과
분별의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공감과 섬김과 위로를
실질적으로 희생을 감수하며 행하는
참사랑의 사람이게 하옵소서.
이 모든 일은 오로지
우리 주님께 받은 대가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사랑을 행하고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사랑할 힘을 주옵소서.
작은자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치 않는
소극적인 자세를 떠나
더 적극적으로 그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를 전하고 마침내 안내하기까지 행하는
참사랑의 사람이게 하옵소서.
악인의 득세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길로 행하기 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길로 행하여
세상에 빼앗겨 손실된 모든 것들은
다시 주님께서 복구 시키고 더 풍성하게 부으실 것을 믿고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여전히 신뢰함으로 나아가는
그런 믿음 주옵소서.
세상 곳곳에서 자행되는 폭력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할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