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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2:01-09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2 ;  정의를 저버린 자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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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과 백성들을 향하여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을 보호하고 도우라 명합니다. 이 일을 잘 행할 때에 왕조가 보존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파괴될 것이라 선언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은 광야와 주민이 없는 성읍이 되어 여러 민족들에게 조롱을 받게 될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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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하나님은 유다 왕과 백성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유다 왕궁에 가서 예언하라 합니다. 유다 왕과 신하와 백성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하는 자들을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들을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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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미슈파트)와 공의(체다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원리이면서 동시에 그의 백성들이 실행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정의는 약자를 억누르는 구조의 정상화를 말하고, 공의는 인격체 사이의 의로운 관계 회복을 말합니다. 즉 정의는 하나님이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듯 불공평하고 부당한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이고, 공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헤아리시듯 이웃의 사정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공정함으로, 정의는 옳음으로 이해하면 좀더 구체적일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한 실행여부는 주로 사회적 약자 곧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에 대한 처우 여부에 따라 정의와 공의의 실행 여부가 결정됩니다. 본문에서는 탈취 당한 자들을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라는 경제적인 정의와 공의를 먼저 말합니다. 힘있는 이들이 약자들을 착취하는 데에 누군가 돕지 않으면 스스로 보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라는 사회적 정의와 공의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들 또한 힘있는 자들의 압제와 학대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사법적 정의와 공의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약자의 법적 권리가 무시되는 불의한 사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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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토록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들 가난하고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 그리고 병들고 귀신들린 이들을 특별히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는 기준으로 삼으시는 것은 이들의 실존이 인간의 실존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부모 없는 고아요, 남편없는 과부요, 갈바를 알지 못하는 나그네요, 약속의 외인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방인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스스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구원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스스로 이러한 실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유월절 절기를 통해 늘 기억하도록 한 이유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의 우리의 태생이, 우리의 실존이 이와 같은 압제와 억압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하나님 아닌 것들의 종노릇 하는 자였으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을 돕고 사회, 경제, 사법적 정의와 공의를 세워가면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런 은혜를 받은 이로서, 그리고 그렇게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기 위해서 이 일을 중요하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와 공의의 실행 여부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우선 우리가 소속된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정의와 공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지, 그리고 불의한 세상을 향하여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고 또는 행하자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행하도록 애쓰고 있는지 돌아보면 부끄러운 자화상 앞에 심각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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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절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준행 여부를 따라 왕조의 흥망을 결정하십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왕조가 보존되겠지만 실행하지 못한다면 왕조는 황폐하게 되리라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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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의를 사회, 경제, 사법적인 분야 곧 모든 분야에서 실행되는지의 여부가 흥말성쇠를 좌우하는 기준이 되고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정의와 공의는 제의적인 행위들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들 곧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들을 어떻게 그들의 압제와 유린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건지고 돕고 있는지, 그것을 사회적인 자세와 경제적인 도움과 사법적 정의를 구조적으로 잘 세워가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병거와 말을 타고 집 문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왕조의 보존을 말합니다. 만일 정의와 공의가 준행되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는 왕궁곧 왕조는 파괴되고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파괴는 이와 같은 정의와 공의를 왕조도 그리고 신하와 백성들도 모두 준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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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공동체와 사회는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에대한 처우와 복지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서 성숙도의 차이를 판갈음할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갈길이 더 멉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사법적 정의는 진즉에 무너졌고 이를 보완하고자 하는 사법개혁의 시도들도 오랜 기득권을 행사하는 이들의 득세와 협박으로 불의한 일이 백주에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감시하고 바로 세워야 할 정치도 언론도 경제 사법적 폭력과 위협 앞에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차별금지법도 집단의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광기로 변한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이러한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은 혼돈과 외면 속에 있습니다. 정작 보호받아야 할 이들을 위한 법도 사회적 합의도 약해지는데, 그런 중에도 묵묵히 이들을 돕는 이름없는 소시민들의 뜻깊은 희생이 나라의 명맥을 그나마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이 없어 망했는데, 그래도 아직 이 나라에는 이름없는 의인들이 곳곳에 계셔서 그나마 소망이 있는 듯 합니다. 

정작 공식적인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이 강력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우리 사회에 표출되고 드러나는 부분들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정의와 공의는 커녕 가장 불의하고 불공정하고 이기적이고 닫힌 공동체로 보여지고 있고, 그러한 민낯이 다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정능력마저 사라진 형국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물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주님의 가르침을 실현하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에 무릎꿇지 않은 7천의 남은 자들같은 이들이 이 땅 곳곳에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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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1-5(왕[과 백성]에게 주는 경고) - 묵상도움글

‘유다 왕의 집’이 21:11에서는 다윗왕조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왕궁을 의미합니다(1절). 왕궁으로 내려가라는 야훼의 명령은 예언자가 성전에 있음을 전제합니다. 솔로몬의 왕궁은 예루살렘 성전 남쪽 아래에 있습니다. 일차적 청자는 왕과 그 측근들이지만(cf. 21:11-12) 2절은 이를 예루살렘 주민들(‘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로 확대합니다. 3절의 선포 내용은 21:12a절을 표현만 달리하며 반복합니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는 전형적인 사회적-경제적-법적 약자로 자주 강자의 폭력에 노출되지만 거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에게 이들의 법적 권리를 보호해주도록 거듭 요청하십니다(출 22:21; 19:4; 22:17; 신 19:10, 13). 권력자들은 사적 이해관계나 욕심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여 무고한 자가 피를 흘리는 일이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약자의 법적 권리가 무시되는 불의한 사회에서는 죄가 없는 사람이 힘이 없기에 죄인이 되고, 정작 죄를 범한 자는 권력과 금력에 의해 의로운(무죄한) 자가 됩니다.

왕과 그의 신하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며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면 다윗왕조가 보존되겠지만(4절; cf. 17:25), 이들이 예언자의 경고를 무시한다면 예루살렘 왕궁은 파괴될 것입니다(5절). [양자 택일적 설교에 관해서는 7:1-15; 17:29-27; 18:7-10을 참조하라.] 4-5절에서 ‘집’은 일차적으로는 왕궁을 가리키지만, 부차적으로는 다윗왕조를 함축합니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cf. 렘 44:26; 49:13; 51:14; 창 22:16; 사 45:23; 62:8; 암 4:2; 6:8)는 유다의 불순종을 징계하시려는 야훼의 단호한 심판의지를 보여줍니다. 주전 587년에 폐허로 변한 예루살렘 왕궁은 포로기의 사람들에게는 조상들의 불순종에 대한 물적 증거가 됩니다.

세상 통치자에 대한 비판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12절 중반의 구체적인 내용,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향한 보호 등이 그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치권력만을 대상이 아니라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고아 과부 나그네가 삶이 착취되고 유린당하는 일은 없는가? 이런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정의와 공의를 기준으로 하나님은 왕들을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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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절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은 성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거룩한 나라로 길르앗같고 레바논 같길 바라셨지만 결국 불순종한 유다는 광야와 주민이 없는 성읍으로 심판을 받아 파멸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민족들이 황폐하게 된 이 성읍을 보면서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전하고 섬긴 까닭에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고 조롱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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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성전과 왕궁이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지어졌고, 지배 계층의 화려한 저택들이 예루살렘에 있다해도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이 곳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언약) 곧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고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 곧 우상을 숭배한 이들은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궁전과 부와 명예와 권력을 취한다 하더라도 불의한 나라의 운명은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유다는 제사장 나라로서  열방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통치를 보여줄 소명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 소명에 충성하면, 열방은 정의와 공의가 구현된 세상을 보고 부러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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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졌다 해도 그는 이미 사망의 종노릇하는 인생일 뿐이고, 그 끝은 심판이 있을 분인데, 어리석게도 패역한 세대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지금의 쾌락에 도취되어 내일 죽어도 오늘은 불의한 일에 취해도 된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그 소명이 충성하지 않아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처럼, 지금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교회도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증거할 소명이 있음에도 그런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모습은 너무 희미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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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6-9(왕궁과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 묵상도움글

야훼께 예루살렘은 ‘길르앗’이나 ‘레바논의 머리’(정상)와 같이 소중했습니다(6a절). 요르단 동편 길르앗은 유향으로도 유명하지만(cf. 8:22), 여기서는 무성한 산림 때문에 언급된 것 같습니다(cf. 삼하 18:8). 레바논의 산(‘레바논의 머리’)을 덮고 있는 백향목은 근동 전역에서 탐을 내는 최상품의 목재였습니다. 솔로몬은 두로 왕 히람의 도움을 받아 성전과 왕궁을 레바논 백향목으로 건축했습니다. [‘길르앗’과 ‘레바논의 머리’는 아마도 이곳에서 생산된 나무로 예루살렘의 왕궁과 성전뿐만 아니라 지배계층의 화려한 저택들이 건축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멸망 선포에 등장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이 야훼께 그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이 심판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야훼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맹세코 광야로, 아무도 살지 않는 성읍들로 만드십니다(6b절). 야훼께서 예루살렘을 징계하기 위해 파괴하는 자들을 구별하십니다. [7a절의 “내가 너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는 “내가 네게 맞서 파괴하는 자들을 성별할 것이니”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이들은 저마다 손에 무기를 들고 가장 좋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전의 기둥들]을 잘라 불에 내던질 것입니다(7b절). ‘각기 손에 무기를 가지고’와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는 전쟁의 모습을 암시하기에 파괴하는 자들은 초자연적인 존재보다는(cf. 출 12:23; 삼하 24:16) 땅의 적대적 군대(바벨론)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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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공평과 정의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또한 이전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하나님 아닌 것들의 종노릇하며

유린과 착취 속에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고

일평생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보배로운 소유로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로 부름받아

공평과 정의 하나님의 증인으로

그리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사명을 받았는데

잠시 세상의 쾌락에 취해 있어

영원한 심판을 애써 외면하는 패역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회, 경제, 사법적인 정의가 세워지도록

또한 우리를 부르셨는데

주어진 힘을 공정하고 옳은 일에

아낌없이 잘 사용하는 지혜도 주옵소서. 

주님이 주신 힘을 오, 남용하는 

어리석음에 취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이 허락지 않은

우리의 야망과 탐욕의 허망함을 깨닫고

주님 앞에 설 날을 기억하며

오늘 선 자리에서 정의와 공의를

온전히 행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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