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07-18 예레미야의 고백 5 ; 여호와의 함께하심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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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감금이 풀려 난 후에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권유(속임수 또는 꾐)와 강하게 이기심(폭력 또는 더 강하심)에 사용하여 순종했더니 사람들이 오히려 비웃고 조롱하며 위협합니다. 그렇다고 예언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같아 견딜수도 없습니다. 친한 벗들도 자신이 실족하기만을 기다리고 등을 돌리며 자신을 박해 하는 이들에게 어떤 역전의 상황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송사를 의뢰하며 구원을 베푸실 분임을 고백합니다. 또한 자신의 생일 저주하면서까지 절망하면서도 하나님께 토로하며 응답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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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절 여호와께 순종하는 길에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파멸과 멸망을 예언한 결과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권유(속임수)와 강하게 이기게 하심(폭력적)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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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에 예언하도록 해서 순종한 여정은 그 어떤 큰 기적적인 역전도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이나 호응도 없었고 급기야 예레미야를 미친 사람취급하면서 그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물리적인 폭력과 감금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할 때마다 사람들의 조롱과 치욕과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런 사명을 감당하는 시간이 40여년입니다. 그 여정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을 향한 토로가 상한 마음의 회복과 사명의 길을 여전히 갈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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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멋지고 존경받고 유명해지고 화려해지고 커지고 부유해지고 통쾌해지는 것이 기적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상한 사람같고, 모자란 듯 하고, 바보같고, 힘없고 부족하고 무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여정이 부활 전가지 온갖 멸시 천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훨씬 더 오랜 고통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 절망적 상황을 감내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늘의 위로와 소망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말씀 앞에 나아와 주님앞에 우리의 심정을 토로하는 것만이 낙심된 마음에 소망을 회복하고, 포기하고 싶은 사명의 길을 변함없이 순종해 갈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는 길인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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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도움글 - 김기석목사님의 <끙끙앓는 하나님>
‘권유하셨다’와 ‘이기셨다’는 표현은 지나칠 정도로 순화시킨 번역입니다. 권유하셨다고 번역된 ‘파타patah’는 “성경에서 여자에게 결혼 전에 성행위를 승낙하도록 설득, 유도하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기셨다’고 번역된 ‘하자크hazak’는 “여자에게 혼외정사를 강요하는 것으로서 그녀의 의사에 반反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된다”(아브라함 J. 헤젤,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삼인, 196쪽). 헤셀은 이 대목에 주목하면서 예언자의 소명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언자가 되라는 소명은 단순한 초청 이상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유혹받고 승낙하는 혹은 기꺼이 몸을 허락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매력있는 부분은 예언자가 경험한 것의 한쪽일 뿐입니다. 이번에는 폭력에 의하여 강탈을 딩하고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막강한 힘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그런 국면이 있습니다(앞의 책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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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절 여호와의 말씀을 맡는다는 것은 불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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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전하자니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그리고 변하지 않는 현실이 고통스럽고, 소명을 거역하고 전하지 않으려 하면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타 올라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스스로 포기할 수 없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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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사실 이러한 말씀의 능력을 알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그 말씀으로 나를 빚어 달라고 하지만 정작 현실 속에서 말씀에 순종할 때 나오는 결과들이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 직면하면 금새 포기하고 싶어지고, 조금 불편하고 아픈 말씀은 애써 외면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으려 하면 여호와께서 강제하시기에 타오르는 불을 억누르기에 버티기가 힘듭니다. 물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해 가면서 매일 이런 현상이 있다면 아마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다고 불을 품는 것 같은 날들을 마냥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애써 그런 말씀을 피하고 외면하고 싶어한다면 우리가 정작 빚어지고 도려내어야 하는 부분들은 암처럼 단단해져서 어느날엔가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 그런 사정을 아시는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허락하시고 세워가심을 신뢰하면서 우리가 선택하고 조절할 수 없기에 잠잠히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그런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고 이 하루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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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3절 여호와께 사정을 아뢰는 것이 절망적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길입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의 결과로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워함을 듣고 고소 고발을 당합니다. 심지어 친한 벗도 자신이 실족하기를 기다리고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의인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사정을 아뢰고 신원하실 것을 의뢰하고, 여호와께서 분명 구원을 베푸실 것을 미리 확신하며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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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의 비방에 이어 바스훌에게 명명했던 마골밋사빕(사방으로 두려움)이라는 이름을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조롱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는 예언들이 결국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한 벗들도 자신이 실족하기를 기다려 예레미야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같이 예레미야와 함께하시기에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이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고,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은 결국 큰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여호와는 의임을 시험하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정을 아뢰며 주께서 신원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그리고 13절 말씀은 아직 그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미리 여호와의 신원하심의 역사와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 소망을 바라보며 예언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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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우리 편이 되시고 함께하시면 누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힘쎈 용사가 되셔서 적들을 물리쳐 주실 것이기에 우리는 더욱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꾐(권유)에 넘어간 예레미야가 사람들의 꾐(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긴 예레미야를 사람이 이길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는 힘쎈 용사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무장하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을 살펴 보시는 분으로 그분의 판결을 공의로우십니다. 그래서 비록 박해를 당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정의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확신을 경험하고 찬양으로 초대합니다(13절). 지금 여전히 고난 중이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구원하실 것을 미리 경험하고 확신합니다. 세상의 통념과 힘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신실한, 하나님 때문에 행악자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는 가난한 자들의 생명을 구원하실 주님을 믿기에 오늘도 이 묵상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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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7-13(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 - 묵상도움글
7-13절 또는 7-18절은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에 속합니다. 예언자의 탄식은 가까운 문맥에서 보면 바스훌에 의한 구금과 체형에서 기인하지만, 넓은 문맥에서 보면 거듭된 박해와 내적 고뇌의 산물입니다. 7-13절은 비웃음거리가 된 자신의 처지를 야훼께 격렬하게 항의하는 7-9절과 신뢰를 고백하며 찬양하는 10-13절의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7절 야훼여, 당신께서 저를 꾀셨기에 저는 꾐에 넘어갔나이다. 당신께서 저보다 강하셨기에 [저를] 이기셨습니다. 저는 온종일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를 조롱합니다.
예레미야는 야훼께서 잘 모르는 자신을 속였다고 항의합니다(→ 15:18). 야훼께서 권유하시므로 그 권유에 넘어갔다고 말합니다. ‘권유하다’로 옮긴 히브리어 pathah는 잘못된 길로 꼬드기는 부정적인 어감을 갖는 동사입니다. 예언자는 야훼의 꾐에 넘어갔다고 야훼의 책임을 주장합니다. 야훼께서 너무 강하셨기 때문에 힘겨루기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고 야훼의 강압적 처사에 항변합니다. 무엇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이처럼 신성모독적인 말을 입에 올리게 만들었을까? 후반절은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온종일 놀림감이 되어 조롱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롱뿐인 현실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고 그의 심판선포를 조롱하며 거절하였습니다.
8절 말할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폭력과 파괴다!’ 하고 외쳐야만 합니다. 야훼의 말씀이 저에게 온종일 치욕과 조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메시지를 요약한 ‘파멸과 멸망’은 ‘폭력과 멸망(파괴)’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예언자는 야훼의 명령에 따라 유다 사회에서 벌어지고 ‘폭력’을 고발하며 ‘멸망’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구원신학에 길들인 귀를 갖고 있던 유다의 청중들에게 ‘폭력과 멸망’을 선포하는 예언자는 이질적 존재였습니다. ‘폭력과 멸망’을 선포한 예언자는 청자들에 의해 부당하게 ‘폭력과 멸망’에 넘겨집니다(cf. 6:7; 합 1:2-3; 욥 19:7). 그의 심각한 메시지는 차라리 추문(scandal) 취급을 당했습니다. 예언자는 야훼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기에 사람들에게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당하는 치욕과 모욕의 궁극적 원인자가 바로 야훼라고 [간접적으로] 비난합니다. 야훼의 말씀이 치욕과 모욕의 대상이 되기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독 당하신 야훼의 긴급한 개입을 간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9절 “그것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하고 제가 말하면, 그것이(= 그분의 말씀이) 제 뼛속에 가두어져 있어, 제 심장 속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됩니다. 제가 [그것을] 감당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예언자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청자들의 완강한 거절과 조롱에 직면한 예레미야는 예언자적 사명을 포기하려고 하지만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야훼께서 주신 말씀을 잊어버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그 무엇이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예언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어 보지만 헛수고일 뿐입니다. 예언자의 뼛속에 가두어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심장 속에서 불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고 선포하지 않으려 하자 가슴 속에 있는 그분의 말씀이 그 안에서 타오르는 불이 되어 예언자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예언자적 사명을 포기해버리고 싶지만 야훼께서 강제하시기에 달리 어쩔 수가 없습니다. 타오르는 불을 억누르기에 너무 지쳐 버틸 수가 없습니다. 야훼와 싸워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기에는 그분이 너무 우세하셨습니다(→ 7절).
10절 (역경의 묘사) 저는 군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방으로부터의 공포(마골-밋사빕)!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저와 친하던 자들도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꾐에 넘어가면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니 그에게 복수하자.”
예언자는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에게로 돌립니다. ‘폭력과 멸망’을 선포한 예언자에게 사람들이 ‘폭력과 멸망’으로 응수합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를 보고 ‘마골밋사빕’(사방으로부터의 공포)이라고 부릅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성전의 총감독 바스훌에게 붙여주었던 이름(20:3)을 예언자에게 사용하며 놀립니다.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아니라 바벨론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한(20:4-6) 예레미야가 바로 ‘사방으로부터의 공포’라며 그의 심판예언을 조롱합니다. 대적들은 예레미야를 고발하자고 서로를 격려하며 음모를 꾸밉니다. 이들은 예언자를 사법기관에 공적으로 고발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의 친구들이 그의 적이 되어 그를 쓰러뜨리려 합니다(cf. 11:20-23; 12:6). 이들은 예언자가 잘못하기를 기다립니다. 후반절에 사용된 ‘유혹하다’와 ‘이기다’는 7a절에서도 사용된 동사들입니다. 야훼께서 꾀어 당신의 예언자로 삼은 예레미야를 그의 대적들이 꾀어 넘어지게 하려 합니다. 그분께서 이기셨던 예언자를 대적들이 이기려 합니다. 대적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날 것을 보여줍니다. 야훼께서 꾀고 이긴 자를 사람이 꾀어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꾐에 넘어간 예레미야는 사람의 꾐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긴 예레미야를 사람이 이길 수 없습니다.
11절 그러나 야훼께서 힘쎈 용사처럼 저와 함께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며 [저보다] 우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고 크게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잊혀지지 않을 영원한 수치.
가장 가까운 자들마저 대적이 되어 박해하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이지만 예언자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확신합니다. 예언자보다 ‘강하사 이기신’(7절) 야훼께서 그의 편이 되셔서 함께 하시는데 누가 그를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 저들은 예언자를 박해하며 실족시키려 하지만([l;c,[10절]) 저들의 의도대로 넘어지지(lvk) 않습니다. 저들은 예레미야가 혼자라고 생각하며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지만(10절)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온종일 그를 조롱했던 자들이 ‘길이 잊지 못할’ 치욕을 당할 것입니다. ‘두려운 용사’는 적들을 두려움에 빠뜨리는 용맹스런 전사(戰士)를 가리킵니다. 야훼께서 당신 예언자를 위해 힘쎈 용사가 되셔서 적들을 물리쳐주실 것입니다.
12절 의로운 자를 시험하시고 콩팥과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야훼여, 당신이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제가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야훼께 호소합니다. 사람의 ‘폐부(콩팥)와 심장’을 살펴 보시는 야훼의 판결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폐부’(콩팥)는 양심의 자리였으며, ‘심장’은 판단과 결단의 자리였습니다. ‘시험하다’(bahan)는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조사해보다’를, ‘사정’(rib)은 ‘법적 다툼’을 의미합니다. 박해를 당하는 자가 하나님께 호소하는 ‘보복’은 억눌린 한(恨)을 풀어달라는 감정의 표출이 아닙니다. 현실 세계의 ‘왜곡된 법질서를 바로잡아달라는, 악한 자들이 뻔뻔스럽게 무시하는 야훼의 정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자는 자신이 아무 잘못도 없음을 하나님께서 입증해달라는 의미에서 그분께서 적들에게 복수해주시길 간구했습니다.
13절 너희는 야훼께 노래하여라. 야훼를 찬양하여라. 그분이 억압받는 자를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지셨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자신의 경험에 참여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야훼를 찬양하라고 외치는 이유는 야훼께서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는 여전히 고난 중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운명에 개입하여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을 ‘미리’ 경험합니다. ‘행악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보다는 야훼 앞에서 가난한 자를 가리킵니다. 사회적 통념과 힘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신실한, 하나님 때문에 행악자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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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8절 여호와께 고민을 토로할 때 마침내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출생을 저주할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심경을 여과 없이 하나님께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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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먼저 읽고 13절의 결론으로 나아간다면 본 단락 역시 여호와께 자신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절의 원인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태에서 죽기고, 어머니를 자신의 무덤이 되게 하고, 임신한 채로 항상 있게 했다면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여호와께서 태어나게 하셔서 지금 고생과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보내고 있다고 말합니다(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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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태에서 예레미야를 부르셨습니다(1:5). 그래서 지금 고생과 슬픔 속에서 그 날을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심을 믿기에 가능한 고백과 토로입니다. 그래서 지금 마음이 너무도 힘들고, 현실은 고통스럽고 이해할 수 없어도 이를 방치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환부를 하나님께 내보이고 치료받을 때 온전한 회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14-18절 역설적 읽기 - “나의 생일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에 복이 있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세우시고 기뻐하신 성읍입니다.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전쟁의 함성)를 듣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를 태에서 살리시고, 어머니께서 출산케 하셨기에 이 땅에서 소생과 슬픔을 부끄러움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이 힘듭니다. 그러나 지금 살아 있음이 복입니다.
현실은 암담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믿음으로 삽니다.
곤고합니다. 그러나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의 곧 자비와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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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8(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예레미야) - 묵상도움글
앞에 나오는 다섯 번째 고백에서 예언자는 마음의 안정과 새로운 신뢰를 경험합니다(→ 20:13).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14-17절에서 예언자는 이전의 고백에서 표출하였던 다른 모든 고뇌와 절망을 압도하는 처절한 절망감과 비참함을 토로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 어느 곳에서도 최소한의 소망이나 위로를 찾지 못한다. 그에게는 거듭되는 좌절과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지나치게 과도한] 영적 무게에 완전히 짓눌립니다. 아마도 그는 더해만 가는 자신의 ‘고생과 슬픔’(18절)에서 하나님의 침묵 또는 방관/거절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cf. 시 22:1-2). 어쩌면 그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에 회의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 번째 고백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15:18) 고통을 호소하는 예언자를 책망하는 말씀(15:19)이 나오지 않기에 하나님께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21장 이하에서 예언자는 더 이상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에 좌절하거나 회의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문맥에서 볼 때 11-13절의 신뢰의 고백과 찬양은 이 단락과도 연결된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14절 예언자는 먼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생일은 한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축복받은 날이지만, 예언자에게는 자신의 ‘고생과 슬픔’이 시작한 날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나온 날을 저주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실존을 저주받은 인생의 삶으로 절망합니다. 그는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회의합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합니다. 그는 기쁜 날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인생입니다. 예언자의 극단적 탄식은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곳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절망은 예언자적 실존과 예언자적 사명의 극단적 충돌에서 발생합니다.
15절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예언자는 시선을 출생의 기쁜 소식을 전한 자에게로 돌려 아들의 태어남을 아버지에게 전한 자를 저주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야훼의 축복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출생의 기쁜 소식을 완전히 전도(顚倒)시킵니다. 태어난 날이 불행의 시작이기에 차라리 그 소식을 전하는 자가 없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기쁜 소식인 줄 알고 아들의 출생소식을 애 아버지에게 전했겠지만, 그 아이는 처음부터 저주 아래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저주받은 소식을 전한 자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라는 것은 깊은 탄식의 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6절 예언자는 출생의 소식을 아이 아버지에게 전한 자에게 멸망을 선언합니다. ‘무너뜨리다’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 hapac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기술하는데 사용된 단어입니다(cf. 창 19:25, 29). ‘떠드는 소리’는 ‘전쟁의 함성’으로 옮기는 것이 더 좋습니다(cf. 4:19). 예언자는 아들의 출생에 관한 기쁜 소식을 애 아버지에게 전한 자의 운명을 야훼의 심판에 떨어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그리고 전쟁에 넘겨져 두려움 속에 울부짖는 자들의 운명에 비유합니다. 그는 소식의 전달자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히 멸망하고, 전쟁의 참혹한 피해를 겪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17절 연결이 매끄럽지 않게 관계사 ‘아쉬르’(who, which)로 시작하는 17절 이해의 어려움은 다음에 나오는 동사 ‘죽이다’(polel)의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데서 기인합니다. 17절의 위치는 동사의 주어로 16절의 ‘그 사람’을 지지하지만, 17절의 내용은 출생 소식을 전하는 자의 역할하고는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14절에서 저주가 선언된 ‘날’을 주어로 간주하는 것이 내용에 일치합니다. 예언자는 ‘생일’을 의인화시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합니다. 출생일이 되어도 세상에 태어나지 말고 언제까지나 자궁에 머물러 있었어야 하는데,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로만 있었어야 하는데 예정된 날이 되어 불행하게도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서는 안 될 존재였음에도 때가 되어 태어났기에 세상에 나오게 한 날은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18절 예언자가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는 동기를 보여줍니다. 그의 삶이 ‘고생과 슬픔’으로 가득 차고, ‘부끄러움’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합니다. 애써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어떤 결실도 얻지 못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조롱과 수치뿐입니다. 아무런 성과없이 멸시나 당하며 인생을 이처럼 마감해야 하는가! 절망적인 예언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고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해주시지 않는다고 절망합니다. 예언자는 스스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삶(생명)을 저주하는 것 이외에 달리 자신의 깊은 고뇌와 절망감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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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를 강권하사 주의 백성 삼으시고
우리에게 말씀 맡은 자의 사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 여정이 순탄치 않음을 경험하고
때로 조롱과 비방과 모욕을 당할 때가 있음을
주님께서도 아시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그렇게 살아서라기 보다
우선 우리의 죄악이 더 원인인 것도 압니다.
그래도 주님의 통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역류하는 것같은 삶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우리의 죄악이 더해져 주님이 조롱당하는 것에 대해
깊은 책임을 통감합니다.
지금 많이 힘듭니다.
그러나 지금 살아 있음이 복인줄 믿습니다.
현실은 암담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소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불의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곤고합니다.
그러나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의 곧 자비와 사랑이 있기에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오늘도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변함없이 묵상의 여정에 있게 하심을 감사드리며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골수를 쪼개고
우리를 온전함으로 빚어 주시옵기를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할 믿음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