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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1:01-14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1 ;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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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공격해 오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 여호와께 중보를 요청하나,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사용하신 여호와의 손과 팔로 직접 심판하고 남은 자들도 원수의 손에 넘겨져 아무도 측은,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차라리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라 말합니다. 또한 안전을 자신하는 유다 와의 집을 향하여서도 행위대로 벌할 것이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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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21:1-24:10 유다 멸망에 일차적 책임이 있는 왕과 예언자들

  21:1-23:8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21:1-10 예루살렘과 시드기야의 절망적 상황

21:11-12 유다 왕실에 주는 훈계와 위협

21:13-14 안전을 자신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신탁

22:1-5 왕[과 백성]에게 주는 경고

22:6-9 [왕궁과]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22:10-12 살룸(여호아하스)에 대한 신탁

22:13-19 여호야김에 대한 신탁

22:24-30 고니야에 대한 신탁

23:1-4 목자들에 대하여

23:5-6 ‘의로운 가지’

23:7-8 새로운 출애굽

  23:9-40 예언자들에 대한 말씀들

23:9-12 예언자들의 타락과 그 결과

23:13-15 사마리아의 예언자들과 다를 바 없는 예루살렘의 예언자들

23:16-22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23:23-24 가까이 계신 하나님 – 멀리 계신 하나님

23:25-32 거짓 예언자들에 대하여

23:33-40 야훼의 짐

 24:1-10 두 무화과 광주리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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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1-10(예루살렘과 시드기야의 절망적 상황) - 묵상도움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공격 당하고 있을 때 유다 왕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묻는 이야기는 모두 세 번(21:1-10; 37:17-21; 38:14-28) 나옵니다.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르지만 예언자는 동일하게 멸망의 신탁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드기야에게 주는 첫 번째 신탁에서 예레미야는 왕에게 바벨론에 항복해 파멸을 모면하라고 충고합니다. 그의 신탁(4-7절)에는 심판만 선포될 뿐 그의 동기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바벨론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레미야에게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그분께 등을 돌린 유다에게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나타났던 그분의 구속사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주신 두 번째 신탁(8-10절)에 의하면 유다에 남겨진 유일한 가능성은 바벨론에 항복함으로써 최악의 경우를 모면하는 것뿐입니다. 본문은 유다의 미래에 관해 침묵하지만, 전체의 문맥은 유다의 멸망(21:1-10)으로부터 새로운 출발(23:1-8)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연대기적으로 보자면 시드기야 왕에게 주어진 21:1-10의 신탁은 차라리 여호야긴(고니야)에 관한 신탁(22:24-30) 다음에 놓여져야 합니다. 어떤 연유에서 연대기적 순서를 무시하고 왕들에 관한 신탁들을 모아놓은 새로운 단락(21:1-23:8)의 처음에 놓여졌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편집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미래의 회복에 관한 23:1-8의 신탁과 대칭 시켜 읽도록 하기 위해 현재의 자리에 놓여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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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시드기야 왕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언에는 꿈쩍도 안하고 오히려 예레미야를 핍박하다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쳐들어 오니 아들(바스훌)과 제사장의 아들(스바냐)을 보내 중보를 요청합니다. 혹시 기적을 행해 바벨론이 떠날까 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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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홀(漫忽)히 여기다(그리스어로 μυκτηρίζεται-뮉테리제타이, 영어의 to be sneered at), 무심하고 소홀하다. 업신여기다. 여기서 '만'(漫)은 '문득 생각나는 대로 함'이란 뜻입니다. 결국 '만홀'은 그때 그때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하는 버릇 없는 행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없다 하는 어리석음도 있지만,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도 문제고,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자신의 필요에만 하나님을 찾고,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하는 자동판매기 같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을 신앙이라 말하기보다 차라리 우상숭배라 합니다. 이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지금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이 기적이나 행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이 이전에 알고 있는 신학에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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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신앙중 하나는 성장과 성숙이 멈춰 버린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이 더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 가는 분야가 더 온전해 지는 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또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선순위가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  또한 성숙하고 온전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필요할 때만 찾는 신앙, 남는 시간에 찾는 신앙, 왕년에 알고 있던 신앙에 머물러 있는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화석화되고 우상화된 신앙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결국 하나님 아닌 것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상숭배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믿는 신을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변하고 성숙해지기보다 신을 감동시키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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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1-2(도입부: 시드기야 왕이 사절을 보내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물음) - 묵상도움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공격을 당하자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597-587)는 사절을 보내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구합니다. 사절로 파견된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이멜의 아들 바스훌(20:1)하고는 구별되는 인물로 38:1-6에 의하면 예레미야의 처형을 주장하는 왕의 고위 관료들(대신) 가운데 한 명입니다.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 제사장은 시드기야 통치 아래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자로 두 번째 제사장, 아마도 대제사장 스라야의 대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52:24). 스라야와 스바냐는 후에 점령군에 의해 체포되어 림나로 끌려가 처형됩니다(52:24-27). 주전 597년의 제1차 유배 때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느헬람 사람 스마야는 예레미야를 체포하라는 편지를 써서 스바냐 제사장에게 보냅니다(29:24-32).

2절은 왕이 사절은 보낸 목적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가 눈 앞에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왕은 그에게 야훼의 신탁을 묻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해 야훼께 물어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야훼께서 [예전에 행하셨던] 그분의 모든 이적들에서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행하시어 그가 우리에게서 물러가리라.” 왕은 아마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실 때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놀라운 이적들, 또는 주전 701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해 새장에 갇힌 새처럼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구출 받은 예루살렘의 구원(왕하 19장; 사 37장)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왕은 예레미야가 파산(破産)을 선포한 예루살렘의 구원사적 전통에 의지하여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애씁니다. 야훼의 의지를 들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기대를 야훼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항상 구원의 하나님이신 것은 아닙니다. 심판의 하나님 앞에서 전통적 신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드기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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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절 하나님은 출애굽에 사용한 손과 팔을 유다를 심판하시는데 사용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에게 온 자들에게 중재와 기적이 아닌 이스라엘과 시드기야에 대한 신탁을 전합니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고 여호와의 손과 팔이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유다를 치되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다 치고 큰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 합니다. 이후에 시드기야 왕과 그의 신하들과 백성중에서 혹 살아 남은 자들도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겨져서 죽게 될 터인데 아무도 그들을 측은, 긍휼,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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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오랜 기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무시하며 만홀히 여긴 끝에 결국 유다는 이스라엘과 같이 이방 민족의 칼로 심판을 당합니다. 지금 그런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심판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온 바벨론을 향해 저항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지만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해 있고, 이는 병거와 말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허락하에 흥망성쇠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전쟁은 여호와께서 ‘내가’(4-8절까지 계속 하나님이 하신다고) 무기를 무용지물이 되도록, 그리고 출애굽에 사용한 손과 팔을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이스라엘을 칠 것이고, 짐승이나 사람이나 모두다 큰 전염병(흑사병)에 죽게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혹여 여기서 살아남은 자들은 역시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 왕과 원수의 손에 넘겨서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하게 처절하게 심판 당하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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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조금만 눈을 뜨고 살피면 교회를 향한 경고가 넘쳐납니다. 내 외부적인 사건과 사고들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메시지들이 교회를 향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메시지 앞에 정작 나와 우리는 아니라고하고, 변명하고 외면합니다. 또한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고 바른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부화뇌동하는 형국입니다. 일부에서는 이미 가진 기득권과 자원과 부를 주체할 수 없어 탐욕스럽게 살아가고, 한편에서는 한끼 양식이 없어 주리며 매일 매일을 자학과 비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런 빈부격차는 세상보다 더 심합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데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에 게으르지 아니하고 때로 불편한 말씀에 대해서도 경청하고 날마다 우리가 선 자리가 우리의 삶의 방향이 바른지 그른지 점검하고 살피고 돌아보면서 영적 긴장을 늦추지 않는 민감한 영적 감각을 세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 입맛에 맞게 변질시키면 그 구원의 능력은 어느새 우리를 심판하는 능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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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3-7(예레미야의 답변) - 묵상도움글

야훼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의 파국적 멸망에 관한 신탁을 줍니다. 시드기야 왕이 막연히 기대하였던 구원에의 소망이 단호하게 거절됩니다. 4절의 구체적 내용은 얼마간 모호하지만, 5절은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셨던 야훼께서 유다의 대적이 되셨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다”(5절). ‘강한 손과 편 팔’(신 4:34; 5:15; 7:19)로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던 야훼께서 ‘강한 팔’로 예루살렘을 공격하십니다. [‘진노와 분노와 대노’는 이스라엘의 심판과 관련하여 신 29:27과 렘 32:37에도 나온다.] 격노하신 야훼께서 사람이든 짐승이든(cf. 출 9:25; 11:5; 렘 7:20)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칼로 치시고 흑사병으로 죽이십니다(6절). 예루살렘의 파멸을 선고한 후에 야훼는 시선을 당신의 의지를 알려고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물었던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의 운명에로 돌립니다(7절).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예루살렘 성에 남은 자들은 느부갓네살의 손에 떨어져 잔혹하게 죽임을 당합니다(cf. 왕하 25:1-7, 18-21; 렘 39:4-10; 52:1-16). 이들의 처참한 운명은 야훼의 심판 행위의 결과가 됩니다.

5절의 하나님, 출애굽의 하나님이 바로를 치신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너희를 치신다느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애굽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의 언약관계 안에 머물러 있을 때 구별 되는 것이지 언약관계를 떠나서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애굽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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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0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패역하고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읍에 사는 자는 칼(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겠지만 차라리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전리품 같은 취급을 당하게 될 것지만 목숨은 부지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의 얼굴이 예루살렘을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화를 내리기 위함이고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고 성은 불사르리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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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철회된 심판의 상황이 유다를 멸망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모든 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살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이제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왕과 신하 그리고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사망의 길로 가겠지만, 예레미야를 통해 주시는 경고에 갈대아인에게 차라리 항복하는 자들은 목숨은 부지하게 될 것이라 합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사는게 아니겠지만, 이러한 치욕을 감수하면서도 살아남아야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거짓 예언자들은 예루살렘 불패의 신학을 전하면서 끝까지 저항하며 사망의 길로 행합니다. 그런 속에서 예레미야가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그나마 살 길이라 말하는 것은 정치적 당파적으로 보는 이들에게 친바벨론 당파에 속해서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배반자로 보일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백성과 운명을 같이하는 진정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훗날 그가 바벨론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폐허가 된 유다에 남는 그의 행동이 이를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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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이 세상이 아닌 교회를 향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은 생명의 길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상관없이 살아가는 삶은 살아 있으나 죽은 목숨과도 같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고 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 하는 것은 역시 하나님을 기만하고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직면한 하나님의 얼굴은 무엇이며, 나는 생명과 사망의 길 중 어디를 바라보며 정작 가고 있는 길은 어딘지 살펴 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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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8-10(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는 신탁) - 묵상도움글

당신의 의지를 묻는 시드기야에게 멸망의 신탁을 내리신 야훼는 다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어 백성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4-7절과 함께 8-9절을 읽으면, 구원신학으로 무장한 정치적 단위로서의 예루살렘과 다윗왕조로부터 사회적 단위인 그 구성원들을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다윗왕조의 멸망은 결정된 사항으로 이제 돌이킬 수 없지만, 그 주민들에게는 선택의 가능성이 아직 남겨져 있습니다. 야훼께서 이들에게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8b절; cf. 신 30:15, 19).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에게 넘겨주려는 야훼의 의지에 맞서 성 안에 머물기로 결정한 자들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흑사병)’으로 다 죽임을 당하겠지만, 그분의 경고에 따라 성을 떠나 포위하고 있는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는 자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다(9절). 구원자로 믿어왔던 야훼께서 적이 되셔서 예루살렘 성에 맞서 싸우시기에 성의 멸망은 피할 수 없습니다(10a절). 바벨론 왕의 수중에 떨어져 불길에 휩싸여 파괴됩니다(10b절).

예레미야에게 있어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결정에 속하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분 심판의 도구인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은 그분의 심판의지에 자신을 내맡기는 순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심판(예루살렘의 함락과 다윗왕조의 멸망)을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하여 개별적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새로운 출발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23:1-8).

적들에 의해 포위당한 성읍에서 적들에게 항복하라고 외치는 예레미야는 적어도 유다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민족의 반역자’였음에 분명합니다(cf. 38:17-21). 예언자는 유다가 야훼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과 바벨론이 야훼의 심판 도구임을 분명히 인식하였기에 멸망과 항복을 외치지만, 정치적-당파적으로 보는 자들에게는 친바벨론 당파에 속해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배반자일 뿐입니다. 예레미야가 정치적 인물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 운명을 같이하는 진정한 민족주의자였음을 우리는 바벨론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폐허가 된 유다에 남는 그의 행동으로부터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701년 산헤립의 위협에도 구원했듯이 지금도 구원해 줄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과, 항복하는 것이 살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신탁중 어느것이 더 따르기 쉽겠는가? - 신학적 전통이 어느정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자주 신학과 전통 안에 서게 되면서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를 도그마(이데올로기)로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통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자신의 신학적 경향을 가지고 이해하려 한다. 그럼 색안경을 끼게 되고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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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절 하나님은 공정한 재판과 약자의 보호 여부로 책임자를 평가하십니다. 

유다 왕가를 향해 예언합니다. 아치마다 정의롭게 판결하고 약자를 건지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불패 신화를 신봉하는 이들을 향하여 그들의 자만에 대해서 야훼께서 친히 대적이 될 것이기에 그들의 자만을 꺾고 행한대로 불의 심판으로 응답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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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들의 책임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백성들을 잘 돌보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정한 재판과 약자들을 보호하는 일은 사회 경제적인 상황들을 공정하고 정의롭게 통치해서 갈등과 분쟁의 소지들을 잘 중재하며 가야 합니다. 이러한 의무를 등한시 할 경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의 남용으로 인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살고 있는지에 대한 리트머스 지는 우리 주위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남유다의 심판의 예언에 지금 통치자들을 향한 경고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이고 대적이 되리라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 있고, 난공불락의 요새에 위치해 있기에 누가 자신들을 칠 수 있겠는가 하는 자만에 빠져 있습니다. 이를 향해 하나님은 친히 대적이 되어 행위대로 벌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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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에는 한편 책임과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소외된 이들과 약자들을 향한 돌봄의 의무입니다. 선교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이요, 구제로 표현하면 약자들을 보호하는 일이요, 정치적으로는 힘없는 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는 일이요,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을 살피는 일이요, 문화적으로는 패역한 문화에 휩쓸리지 않는 일이요, 사회적으로는 빈부격차를 무론하고 공평하게 대하는 일아요, 법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공정하게 대하는 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그런 하나님나라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직분을 가졌다고, 그리고 신앙생활 한지 오래 되었다고, 왕년에 이랬다고 오늘 그리고 내일의 우리의 신앙과 삶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딸,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생사화복의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확신하면서 주님의 통치에 세밀한 부분까지 통치가 임하고 순종하게 하는지가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자만과 기만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내 삶을 비춰보고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그 뜻에 나를 쳐 복종시켜 가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21:11-12(유다 왕실에 주는 훈계와 위협) - 묵상도움글

11-12절은 심판선포가 첨부된 경고의 말씀이다. 청자로 제시된 ‘유다 왕의 집’(11절)/‘다윗의 집’(12절)은 이 신탁이 왕 개인보다는 그의 측근에 속하는 왕권에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정치와 사회를 책임진 예루살렘 왕실의 고위관료들은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구해주어야 합니다. 공정한 재판과 약자의 보호는 왕(권)의 의무에 속한다(시 72:1-4, 12-14; cf. 사 9:6-7; 11:3-5). 권력과 부와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판결은 공동체를 갈등과 분열로부터 보호해주는 의로운 통치의 전제조건에 속합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밝아오는 ‘아침/새벽’은 시편에서 자주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는 시간으로 언급됩니다(cf. 시 46:5; 90:14; 143:8). 사무엘하 15:1-6에 의하면 송사가 있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옵니다. 왕과 그 측근들이 기본적인 의무를 등한시할 경우 이들은 아무도 끌 수 없게 타오르는 야훼의 진노의 불에 떨어집니다.

공정한 재판과 약자의 보호에 관한 말씀을 왕들에 관한 신탁을 모아 놓은 단락의 처음에 위치시킨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왕실을 판단하는 규범으로 주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법을 보호하시는 최고의 재판관이신 야훼께서 ‘공정한 재판과 약자의 보호’를 척도로 삼아 법과 통치의 최종 책임자인 왕을 평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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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13-14(안전을 자신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신탁) - 묵상도움글

자신의 지정학적 위치를 과신하는 예루살렘(‘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에게 야훼께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예루살렘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산지에 자리잡고 있는 천연의 요새로 적들이 침략하기가 매우 어려운 도성임은 분명합니다. 이런 물리적 조건과 앗수르 왕 산헤립으로부터 구출 받은 주전 701년의 역사적 경험은 왕조신학의 뒷받침을 받아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예루살렘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는 허영과 교만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며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13절) 하며 자만에 빠집다. 독수리나 매가 노략물에 덤벼들 듯이 그렇게 예루살렘을 침략할 자들은 없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산에는 하나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기대와 달리 바로 다윗왕조와 예루살렘을 택하신 야훼께서 이들의 대적이 되셔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시기에 그 지정학적 장점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자기기만과 교만에 야훼께서 불의 심판으로 응답하신다. 야훼께서 이들 ‘행위의 열매’에 따라 이들을 징벌하십니다(14a절). [‘너희 행위’는 ‘너희 행위의 열매’로 옮겨야 한다.] 야훼께서 아무도 끌 수 없게 타오르는(12절) 불(전쟁)로 예루살렘과 그 주변지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드십니다(14b절). 예루살렘의 멸망이 교만에 빠진 예루살렘 주민들의 악한 행실을 징계하시는 야훼의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13절 하 나는 네 대적이다. :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대적이 되리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칠 것임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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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를 만홀히 여긴 죄악을 회개합니다. 

주께 생사화복의 모든 여탈권이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의 능력을 우습게 여기고

눈에 보이는 헛된 우상들에 부화뇌동한 

어리석은 일들도 회개합니다. 

우리가 가진 알량한 지식과 힘으로

생사화복을 좌우할 것 같은 자만에 있었음도 회개합니다. 

주께서 주신 생명과 사망의 길을 바로 보지 못하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고

알량한 지식으로 함부로 주님 뜻을 예단했던

교만한 죄악도 회개합니다. 

공평과 정의를 이뤄가는 책임과 의무에도

소홀했던 일도 회개합니다. 

다시 주어진 기회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생명의 길로 행하는

지혜로운 믿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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