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3:01-08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6 ; 여호와 우리의 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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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는 양 떼를 기르고 돌보지 아니하고 멸하여 흩어지게 하는 목자를 보응하시겠다 하십니다. 남은 양떼는 친히 다시 우리로 돌아오게해서 생육 번성케 하며, 목자를 세워 다시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겠다고도 하십니다. 때가 되면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지혜로운 왕,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왕, 구원과 평안을 주는 왕, 여호와 우리의 공의로 불릴 왕을 세울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그 일은 출애굽보다 더 놀라운 출바벨론의 구원의 날을 기억하고 맹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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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여호와께서는 양떼를 잘 기르고 돌보지 않는 목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양 떼를 기르고 돌보기 위해 목자를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이에 불충하여 양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고 돌보지 않은 목자에 대해서 악행이라 하고 그에 합당한 보응을 행하실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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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왕정을 허락하며 지도자들(왕, 제사장 등)을 세우실 때에 가장 핵심적으로 기억하고 유의해야 할 것은 백성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목숨을 다해 그들을 섬기는 자여야 하고, 무엇보다 이 백성의 진정한 왕은 오직 여호와 뿐이고, 자신들은 대리 통치자이기에 다만 청지기로서 섬기는 자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자세로 맡겨준 양 떼를 잘 양육하고 돌보는 것이 핵심 사명이고 목자로 세워진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양육과 돌봄에 불충하다면 더이상 목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할 뿐 아니라 엄중한 보응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유다 왕들과 지도자들은 백성을 흩어서 도리어 주변의 먹잇감이 되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거짓 평강을 외치고, 거짓 안전을 주장했으며, 거짓 신을 신뢰하면서 자신들도, 백성들도 탐욕의 종노릇하게 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백성의 관계에서 지금은 왕(지도자)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지만 세 부류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왕은 대리통치자로서의 사명을 기억하며 군림이 아니라 섬기는 자여야 했고, 제사장은 왕과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그것을 살아내는 거룩한 길에 대해 가르치고 점검해야 했고, 백성은 그런 가르침을 따라 이방인의 길이 아니라 거룩한 길로 행하길 힘써야 했고, 이를 분별하는 일에 대해서도 소홀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탐욕이 주어진 책무를 왜곡하게 해서 왕은 군림하고, 제사장은 젯밥에만 관심이 있고 제대로 먹고 살지 못하여 직무를 소헐히 하며, 백성은 그런 환경에서 차차 거룩에서 멀어지고, 약자들은 돌보는 이 없이 죽음에 내몰리고 뿔뿔히 흩어지는 상황에서 아무런 힘도 없이 스러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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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 공동체에도 이와 같은 지도자와 성도와 어린 자녀들이 있습니다. 모든 위치에서 자신들의 신분과 주어진 역할들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가 있고, 주어진 책무(사명)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관심이 없게 되면 탐욕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함께 망하는 길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악행에 대해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내어서 사람으로서는 제대로 할 수 없지만 목숨을 바쳐 선한 목자로 양떼를 살릴 목자를 세우신다는 소망의 말씀을 이어서 약속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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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절 여호와께서는 흩어진 양떼를 다시 모아 생육하고 번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흩어진 양떼 곧 남은 자들을 온 열방에서 다시 우리로 돌아오게 하여 생육하게 번성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르시는 목자를 세워서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않게 하실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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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 하고, 친애굽과 친바벨론으로 갈려 싸우면서 끝까지 바벨론에 저항했던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그 중에서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남은 자’(remnant 렘넌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하여 생육하게 번성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참 목자들을 세워서 돌보게 하여 다시는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겠다고 다짐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가깝게는 새 출애굽 곧 출바벨론에 대한 약속이면서, 궁극적으로는 메시아를 통해 새로운 백성을 부르고 하나님나라를 도래하게 하시겠다는 새 창조에 대한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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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유다가 망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약속의 말씀은 허무맹랑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시온 불패의 거짓된 신학을 따라 바벨론에 저항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역사와 같은 일이 다시 재현된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들은 이제 이 약속의 말씀은 그들이 살아야 할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 그래서 가장 큰 두려움 그리고 놀람과 상실의 절망에서 회복과 치유와 재건의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이 역사적으로 실현되고 마침내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흩어진 양떼를 온 열방에서 불러 모아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 되어 주의 나라의 거룩한 새백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 놓고 살리느니라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그것을 성취하신 분께서 이제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지금도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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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절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행할 새 왕을 세워 구원과 평강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회복과 목자를 세우신다는 여호와의 약속이 더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때가 이르게 되면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지혜로 다스리며, 땅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구원과 평안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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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 유다는 모든 것이 끝나고 다윗왕가는 실패하고 하나님께서도 무능하게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시 회복하실 때가 있을 것이라 선언하시고,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시 세우실 왕 곧 메시아는 인간 왕(지도자)과 같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그 뜻을 따라 지혜롭게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의와 공의를 제대로 실현하는 왕이 될 것입니다. 이 왕은 이제 유다 뿐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의 왕이 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주시는 것은 바로 구원과 평안으로 샬롬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공의로우시다’는 이름을 가진 시드기야는 이름 뿐이었지만 새로운 왕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불리며 실제 지혜로운 통치로 샬롬을 성취하실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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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구원주로, 지혜의 왕으로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왕으로 오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하시고 새 백성 삼으시고, 주의 말씀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돌보시고 인도하고 계신 우리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의 나라의 거룩한 새백성으로 살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이 거룩한 나라에 영원토록 거하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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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5-6(‘의로운 가지’) - 묵상도움글
바벨론에 의한 다윗왕조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유다가 끝장난 것은 아닙니다. 야훼께서 다윗 가문에서 ‘한 의로운 가지(싹)’을 돋게 하신다(5a절). 앞으로 올 이 메시아적 왕은 왕의 직분을 온전하게 실행합니다. 그는 지혜롭게 처신하며 ‘정의와 공의’로 통치할 것입니다(5b절; cf. 22:3). 그 때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사람들은 의로운 왕의 통치 아래서 안전하게 살 것입니다(6a절). 이 미래의 메시야적 왕의 이름을 사람들은 ‘”야훼[가] 우리의 정의[이다]”(야훼 치드케누) 라고 부를 것입니다(6b절).
시드기야와 치드케누로 언어유희 - 시드기야(여호와가 나의 공의이다)는 이름만 공의이고, 하나님이 세우실 왕은 하나님의 공의를 유다에(온 민족에게) 베풀게 될 것입니다.
5b의 ‘세상에서’는 ‘땅으로(에서)’ 로 번역함이 옳습니다(가나안 땅).
슥3:8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 특정한 인물을 염두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5절의 싹은 특정한 인물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에게 나오기에 다윗왕조의 회복의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그루터기와 비슷합니다. 유다가 위기에 처해 나무가 밑둥만 남지만 그 뿌리에서 새로운 싹과 가지를 내게 하리라는 차원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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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절 하나님은 출애굽과 새출애굽을 약속하시고 성취하기고 적용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엑 백성들은 이제 때가 되면 이전에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들의 역사에서 영원토록 기억하며 맹세하던 출애굽보다 더 놀라운 구원의 날 곧 출바벨론의 역사를 경험하고 다시금 자기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 약속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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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존재의 근거요 이유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지금 이 땅에 살게 된 것이 출애굽때문이라는 것을 절기를 통해서 교육을 토해서 삶의 모든 요소들을 통해 기억하고 고백하고 살아가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그보다 더 놀라운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출바벨론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에게 출바벨론은 이 말씀에 대한 1차적 성취였지만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새로운 영적 출애굽은 궁극적인 성취의 말씀입니다. 출애굽이 노역과 착취와 학살에서 건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던 사건이었고, 출바벨론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사건입니다. 이제 새 출애굽의 완성은 죄악의 종노릇 하던 우리들을 다시금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서 영생을 억데 된 선한 목자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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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날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양들을 위한 선한 목자로 사시면서 우리를 기르시고 인도하시며 새롭게하사 살게 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새백성됨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기억과 우리 삶의 이유와 우리 삶의 방향은 이제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새롭게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에 대한 신뢰, 주님이 허락하신 평화와 안식, 구원과 평강을 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그 길로 행하길 원합니다. 지금 의의 왕이신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에서 우리도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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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7-8(새로운 출애굽; ← 16:14-15) - 묵상도움글
16:14-15에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이 단락은 새로운 출애굽을 선포합니다(cf. 사 43:16-20; 48:20-21; 51:9-11). 야훼께서 이전에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던 것처럼 앞으로 쫓겨났던 북쪽 나라들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을 내쫓으셨던 하나님께서 이들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이 새로운 출애굽은 과거 출애굽의 반복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됩니다. 회복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맹세하지 않고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킨 하나님으로 맹세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원초적 신앙고백의 핵심에 속했던 출애굽 사건이 가까운 미래에 있을 새로운 출애굽 사건에 의해 대체됩니다. 바벨론에 유배당한 이스라엘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시는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야훼신앙의 근본토대가 됩니다. 출애굽보다 더 큰 출애굽으로 사람들이 출애굽보다 이를 더 기억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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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참목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새 백성 삼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다시 불러 주셔서
두려움과 놀람과 상실에서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도 허락해 주시고
정의와 공의의 삶을 살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구원과 평강 가운데 거하며
공의로우신 주님을 따라 살게 하심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 출애굽 곧
구원의 놀라운 역사들을 기억하며
주님의 목장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뜻을 따라서
우리도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사랑으로 행하고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