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2:20-30 유다 왕들에 대한 신탁 4 ; 하나님 아닌 것을 더 사랑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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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이 습관적으로 짓는 죄 곧 여호와의 경고를 무시하고 동맹을 의지하며 평안을 바랐던 죄로 말미암아 수치와 욕을 큰 고통과 더불어 당하리라 합니다. 그렇게 고니야(여호야긴)마저 붙잡혀 감으로 다윗 왕가는 몰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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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우상일 뿐입니다.
유다가 사랑하는 것들이 멸망했습니다. 평안할 때에도 여호와를 청종하지 않았고 아예 처음부터 습관적으로 불순종했습니다. 그런 악행의 결과 지배계층 곧 사랑하는 자들은 모두 유배 당해 수치와 욕을 큰 고통중에 당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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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과 22절의 ‘사랑하는 자들’은 모두 유다가 생각하는 동맹국 즉 하나님 아닌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한 동맹국이나 사람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흥망성쇠도 결국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으며, 그들은 결국 멸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평안할 때 여호와께서 경고하는 것에 대해서도 어려서부터(처음부터) 습관적으로 불순종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끝에서는 행한 모든 악으로 인해서 수치와 욕을 고통중에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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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할 때는 마냥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나와 우리가 모두 무사하다고 아무 일 없다고 안주, 안심해서는 안됩니다. 별고 없다고 생각하는 때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악행하고서도 무사, 무고하다면 이는 하나님의 유기 이전에 회심과 기회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말씀의 거울 앞에 나아가 여호와를 청종하고 우리가 바로 서 있는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삶의 방향과 내용은 신실한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삶의 평화를 누리되 거짓 평안에 놀아나고 악한 권력을 의지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더 사랑하며 습관적으로 여호와를 청종하지 않는 죄도 심각한 일입니다. 이는 자신의 탐욕을 이루려고 이런 저런 세속적 도움을 의지하려는 우리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우리가 의지할 유일한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의지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 아닌 그 어떤 것들도 유한한 존재일 뿐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내게 잘못된 악습이 무엇인지 찾고, 주의 말씀을 청종하는 좋은 습관을 꾸준히 길러가도록 힘쓰며, 언제도 주의 말씀을 잘 분별할 수 있는 민감한 영적 감각을 길러낼 수 있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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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0-23(예루살렘아, 탄식하라!) - 묵상도움글
야훼께서 예루살렘(수신자: 여성 2인칭)에게 전체 팔레스티나가 들을 수 있도록 그 주변 북쪽에 있는 레바논 산지와 북동쪽에 있는 바산의 언덕들과 남동쪽에 있는 아바림 산악지대에서 탄식할 것을 명하십니다(20a절). 탄식의 동기는 애인들, 곧 예루살렘의 모든 동맹국들의 멸망입니다(20b절). 이제 예루살렘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됩니다.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위기가 닥치기 전부터 야훼께서 경고하셨지만 예루살렘은 처음부터(‘어려서부터’) 그분 음성에 순종하길 거절했습니다(21절). 불순종의 결과로 예루살렘의 지배계층은 유배당하고 예루살렘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22절). 자신의 안전을 자랑하지만 예루살렘에게 닥칠 고통은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을 것입니다(23절).
20-23절의 말씀은 ‘목자들’(22절)의 함의성에 근거해서 왕들에 대한 신탁들 가운데 포함됩니다. 그리고 18절의 애가와 관련해서 현재의 위치에 놓여집니다. 편집자는 이 단락을 여호야김(13-19절)과 여호야긴(24-30절)사이에 위치시킴으로써 예루살렘의 탄식을 기술한 단락을 주전 597년 바벨론에 의한 첫 번째 예루살렘의 포위공격과 관련하여 읽도록 합니다.
참고로 20절 사랑하는 자 : 유다 동맹관계국에 대한 표현 – 멸망한다. - 완료시제 <> 22절 사랑하는 자 : 네 목자들(예루살렘이 사랑하는 자들) - 미완료시제 - 20, 22절이 동일한 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은 여러 번 선지자 통해 예언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청종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본성이 되어 치료 불가능한 불순종. 하나님의 유다 심판은 마지막 단계에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엄중하게 심판하십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여호야김과 여호야긴 사이에 위치한 이 본문은 왜 삽입되어 있는가? 597년의 사건은 심판이면서 구원으로 착각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597년은 유다가 멸망했기에 심판이지만 597년은 먼저 유다가 멸망시키지 않고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포위한 바벨론이 예루살렘이 항복하자 통치자와 기술자들 일만여명을 포로로 잡아가고 전리품과 배상금을 가져가지만, 예루살렘에 들어가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멸망 직전에 극적으로 구원을 받은 사건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바벨론 제2차 침공). 잡혀간 자들과 달리 남은 자들은 다시한번 구원을 경험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 아니다. 아직 더 큰 심판이 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해석의 문제는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역사는 해석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에 대해 해석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세상에 사실은 없습니다. 현상과 사건이 생기면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을 해석의 안경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 객관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카메라 앵글 따라 사건이 비극으로 또는 징벌을 요하는 사건으로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건이 벌어졌으나 그 것을 통해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해석이 잘못되면 아무리 징벌해도 무조건 구원으로 해석하게 되기에 문제가 됩니다. 사건에 대한 바른 해석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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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30절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됩니다.
고니야는 결국 모친과 더불어 바벨론의 왕과 갈대아인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아들(대상 3:17)도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를 통한 여호와의 경고를 듣지 않던 고니야는 이제 깨진 질그릇처럼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천한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형통 곧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없게 되고 다윗의 위가 영원할 것이라던 약속(삼하 7:16)은 ‘디윗의 위에 앉을자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저주로 바뀌었습니다. 계명을 지켜야 한다’(신 17:20)는 축복의 조건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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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를 통한 정세와 경고를 끝까지 듣지 않은 것은 결국 멸망을 자초하고 심지어 다윗 왕가의 몰락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다윗의 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을 이어 가시지만(23:5),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이뤄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아무리 세우려고 해도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 127:1-2). 인장반지(유배)와 깨진 그릇은 모두 유다의 운명을 상징하는 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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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낀 인장반지처럼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받은 그릇이기에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가 깨진 그릇처럼 쓸모없는 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불순종과 교만이 극에 달해 생기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나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고,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외면했고, 하나님은 우리를 쓰시길 원하시지만 우리가 귀히쓰든 천히 쓰든 그 자체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다만 교만하고 착각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평안도 구원도 삶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하면서 끝까지 고집하다 멸망의 길로 치달을 뿐입니다. 여호와의 허락이 아니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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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4-30(고니야에 대한 신탁) - 묵상도움글
고니야(여호야긴)의 비극적 운명을 선포하는 이 단락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산문으로 된 24-27절에서는 야훼께서 고니야에게 멸망의 심판이 임할 것을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시며, 운문으로 된 28-30절에서는 고니야의 비참한 운명을 예언자가 탄식합니다. 인장반지의 비유를 통해 야훼께서는 여호야긴(고니야)의 유배가 필연임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야긴이 당신 오른 손에 낀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그를 손가락에서 빼내어(24절)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내어주실 것입니다(25절). 여호야긴과 그의 어머니는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죽을 것입니다(26-27절). 26-27절은 유배당한 여호야긴을 여전히 유다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하며 그가 다시 돌아와서 유다를 재건해주기를 기대하는 자들에게 헛된 소망을 버리라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28절에서 예언자는 여호야긴에게 소망을 두며 그를 기다리는 자들의 탄식을 인용합니다. 이들은 여호야긴이 깨어져 조각난 항아리,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그릇(28절)처럼 이방 땅에 내버려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다윗의 보좌에 앉혀진 시드기야를 인정하지 않고 유배당한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의 적법한 후계자로 간주하며 그의 귀환을 소망했습니다. 예언자는 여호야긴을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30a절; cf. 대상 3:17-18)로 규정함으로써 그에게 유다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는 자들에게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길 충고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 가운데서도 다윗의 보좌에 앉아 유다를 통치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30b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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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
주야로 곧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좋은 습관을 따라 민감한 영적 감각을 갖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어려서부터 주의 말씀과 훈계를
청종하는 일을 잘 훈련받고
날마다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자로
자녀들도 양육하고 우리도 그런 자로 살게 하소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만 의뢰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며
주님께 쓰임받는 그릇이라 자만하지 말고
겸손히 주앞에 깨끗한 그릇으로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신실하심 앞에
우리도 그런 신실함을 닮기 원합니다.
시대를 옳게 분별하는 지혜도 허락해 주옵소서.
오늘의 평안이 주께로 말미암지 않으면
헛되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님이 주신 기회들을 악용치 않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