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30-40 허기를 지우는 빵, 생명을 깨우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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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적의 빵을 구하는 '소유의 갈망'에서 벗어나, 우리 곁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를 온전히 영접하는 '관계의 신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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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늘 허기진 존재입니다. 배를 채워도 돌아서면 다시 고파오는 생리적 허기뿐만 아니라, 채워도 채워도 메워지지 않는 영혼의 깊은 구멍을 안고 살아갑니다. 갈릴리 빈들에서 배불리 떡을 먹었던 군중들이 다시 예수를 찾아와 묻습니다.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요 6:30). 방금 전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도 그들은 또 다른 '확실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조상들의 이야기를 꺼내며, 눈앞의 예수를 '기적 제조기'로 박제하려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우리 욕망의 도구로 전락시키곤 합니까?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왜 내 삶에는 만나가 떨어지지 않는가"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시선을 '하늘에서 내리는 빵'이라는 객체에서,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라는 주체로 옮겨놓으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이것은 물질적인 풍요의 약속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신 분과 연결될 때 비로소 맛보게 되는 근원적인 평안에 대한 선언입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를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소유'하여 자기 확신을 얻으려 했으나, 예수는 당신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며 우리와 '존재적 사귐'을 맺길 원하셨습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열정적인 종교 행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손 내미시는 주님의 자애로운 시선 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세상이 주는 결핍과 불안은 더 이상 우리를 흔들지 못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연약한 우리는 늘 흔들립니다. 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이 얼마나 눈물겨운 환대입니까?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 얼마나 깊은 회의 속에 있든 주님은 우리를 밀쳐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기 위해, 오늘 우리의 비루한 일상 속으로 기꺼이 떡이 되어 들어오셨습니다.
이제 썩을 양식을 위해 전전긍긍하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우리 곁에 이미 와 계신 생명의 빛을 바라봅시다. 신앙은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여정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마다 타인을 향한 환대의 빵을 구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 따뜻한 눈길 하나, 친절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의 떡을 나누는 거룩한 성찬입니다. 그 은총의 길을 우리 함께 뚜벅뚜벅 걸어갑시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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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30-40 결핍의 허기를 채우는 하늘의 식탁, 그 ‘받아먹음’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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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을 구하며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하는 세상의 허기진 욕망을 멈추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당신의 살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먹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포만감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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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계절, 나뭇잎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살이 마치 하나님의 따스한 눈길처럼 느껴지는 날들입니다.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견디며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 속에서 여전히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거대한 ‘허기’의 도가니 같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무엇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구멍이 우리 가슴 한복판에 뚫려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6장의 무리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지만, 여전히 목이 말랐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집요하게 묻습니다.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요 6:30). 그들은 과거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이야기를 꺼내며, 예수님께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보다 더 확실한 물적인 담보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질문이라기보다 거래를 하자는 제안에 가깝습니다. “당신이 내 욕망을 채워준다면, 내가 당신을 믿어주겠소.”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알고 있는 모범답안을 확인하려 하거나,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으려는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만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할 스크린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이만큼 헌신하면 어떤 보상을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시며,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3).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주님은 우리에게 떡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떡이 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결국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찢어 우리에게 내어주시겠다는, 자기 희생적 사랑의 귀소 본능을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생명의 떡을 먹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소비하라, 더 높이 올라가라”고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묵상은 그 욕망의 질주를 멈추고(Stop), “아니요”라고 말하는 거룩한 저항입니다. 그리고 나의 허기를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던 시도를 멈추고, 나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살을 내 영혼의 양식으로 받아먹는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배부름, 곧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가슴 벅찬 약속은 이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는 자격이 없는 것 아닐까?”, “나 같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내가 얼마나 꽉 붙잡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강하게 붙잡고 계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우리를, 그 어떤 경우에도,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러니 이제 표적을 구하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강박도 내려놓으십시오. 그저 빈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주님이 거저 주시는 생명의 떡을 받아 드십시오. 믿음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를 ‘아멘’으로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헛된 양식을 구하느라 분주했던 걸음을 멈추고, 우리 영혼을 영원히 살리시는 말씀의 식탁 앞에 앉아 참된 쉼과 포만감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신앙의 여정은 갓난아기가 엄마의 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는 젖을 얻기 위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노동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저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가 주는 생명의 양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받아먹을 뿐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말씀의 젖을 사모하며 주님의 품에 안길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결핍을 이기는 ‘거룩한 포만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