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1-21 웃음소리 뒤편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시며 ; 버려진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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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선택받은 자의 웃음소리에 취해 버려진 자의 울음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광야의 끝자락까지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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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더디게 오지만, 반드시 옵니다. 백 세가 된 아브라함과 구십 세의 사라 품에 마침내 '웃음'이라는 뜻을 가진 아들 이삭이 안겼습니다. 굳어버린 태를 열어 생명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사라의 씁쓸했던 비웃음은 환희의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일까요? 장막 안이 이삭의 젖 떼는 잔치로 떠들썩할 때, 장막 밖에는 그 웃음에 끼지 못하는 또 하나의 시선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입니다.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그동안 눌러왔던 불안과 배타성을 폭발시킵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창 21:10). 송민원 목사는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이 장면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타자를 혐오하고 축출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성으로 읽어냅니다. '내 아들'의 안전을 위해 '너의 아들'을 지워버리는 것, 이것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상의 비정한 문법입니다. 아브라함은 깊이 근심하지만, 하나님은 뜻밖에도 사라의 말을 들으라 하십니다. 이것은 사라의 도덕적 승리가 아닙니다. 약속의 줄기는 이삭을 통해 이어가되, 버려지는 이스마엘의 생명은 하나님이 친히 책임지시겠다는 역설적인 섭리의 선포입니다.
물 한 가죽부대를 메고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브엘세바 광야에서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 앉아 방성대곡합니다. 인간의 생존 수단(물)이 바닥난 자리, 어미의 사랑으로도 자식을 살릴 수 없는 절망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만이 아니셨습니다. 언약의 계보에서 밀려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광야의 모자(母子)에게도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십니다. 샘물은 본래 거기 있었으나, 절망의 눈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쫓겨난 자들의 신음조차 기도로 들으시고, 메마른 광야에 생명의 우물을 숨겨두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세상의 냉대 속에 홀로 광야에 던져진 것 같아 외로워하는 벗님들.
우리는 때로 사라처럼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하갈처럼 가진 것 없이 내몰려 막막한 현실 앞에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선 안에서만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절망하며 주저앉은 그 광야의 한복판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살릴 샘물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신앙은 나의 웃음 뒤에 가려진 이웃의 눈물을 헤아리는 마음이자, 내 물통이 비어버린 순간에도 나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겨진 우물을 발견하는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을 괴롭히는 결핍의 광야가 오히려 '들으시는 하나님(이스마엘)'을 만나는 기적의 성소가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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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1-21 엇갈린 웃음과 통곡 사이, 그 틈새에서 솟아나는 ‘브엘세바’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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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환희와 비탄이 교차하는 모순투성이의 여정이지만, 하나님은 약속의 성취 속에서 웃는 자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버림받아 울부짖는 자의 신음조차 외면하지 않으시고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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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순환은 어김없어, 우리네 팍팍한 일상에도 어느덧 훈훈한 바람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무게에 눌려 신앙의 길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 보입니다. 한쪽에서는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샴페인이 터지는데, 바로 그 담장 너머에서는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의 절규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창세기 21장의 풍경이 바로 그러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약속이 성취되어 이삭(웃음)이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6). 이것은 노년의 부부가 맛본 생애 최고의 기쁨이자, 인간의 한계를 돌파해 들어오신 하나님의 신비였습니다. 그러나 이 웃음소리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가정 안에는 불화의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놀리는 장면을 목격한 사라는 격분하여 그들을 내쫓으라 요구합니다.
말은 나름의 귀소 본능을 지닙니다. 사라가 내뱉은 “내쫓으라”는 매몰찬 말은 단순히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경쟁자를 배제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망의 언어였습니다. 송민원 교수는 창세기를 ‘수평적 읽기’로 제안하며, 성경 속 인물들의 갈등이 오늘날 우리가 겪는 관계의 문제와 다르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사라는 약속의 자녀를 얻었지만, 그 기쁨을 타자(하갈과 이스마엘)와 나누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기업을 함께 얻지 못할 존재’로 규정하며 배제의 논리를 작동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서글픈 자화상 아닙니까? 나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는 밀려나야만 하는, 승자독식의 냉혹한 현실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깊은 근심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밖에도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사라의 배타적 태도를 옹호하신 것이 아니라, 약속의 줄기를 이어가기 위한 섭리적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의 운명 또한 당신의 손안에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3).
물 한 가죽부대를 메고 광야로 내몰린 하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물이 떨어지고, 자식이 목말라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 앉아 방성대곡하는 어미의 마음은 찢어질 듯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십니다(창 21:17). 하갈의 통곡 소리 이전에, 고통받는 어린 생명의 신음 소리에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십니다. 한동일 선생이 말했듯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데 있다”면, 하나님의 위대함은 인간의 비참함 한복판으로 찾아오셔서 그 눈물을 닦아주시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본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때로 인생의 광야에서 길을 잃고, 가진 것이 바닥나 절망할 때에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하나님, 저를 보고 계십니까? 제 기도를 듣고 계십니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성경이 나를 읽게 하는 시간”입니다. 묵상은 내가 성경을 분석하여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사라처럼 타자를 배제하려는 내 안의 욕망을 직시하고, 하갈처럼 광야에 버려진 듯한 내 영혼의 실존을 하나님께 내어맡기는 과정입니다. 또한 묵상은 “생각을 생각하는 일”이며, 내 인생의 해석 주권을 하나님께 이양하는 ‘관계의 혁명’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나의 통곡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이삭을 얻은 기쁨을 누리는 분도 계시겠지만, 하갈처럼 막막한 광야에서 물이 떨어져가는 고갈을 경험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혹은 신앙생활을 오래 했지만, 여전히 내 안의 미움과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회의감에 젖은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쫓겨난 여인 하갈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 이삭을 돌보시지만, 광야의 소년 이스마엘도 “함께 있어” 자라게 하십니다(창 21:20).
김기석 목사님은 하나님을 “인간의 탐욕과 폭력의 강물에 풍덩 뛰어드신 분”, 즉 “동고(同苦)의 사랑”을 지닌 분이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비루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을 뿐, 하나님이 예비하신 샘물은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텅 빈 가죽부대를 주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히시면, 척박한 광야 브엘세바(맹세의 우물)가 생명의 샘터로 변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는 이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는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메마른 사막 지하를 흐르는 ‘암반수’와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갈라진 땅이고 절망의 모래바람만 부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는 생명의 물줄기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시추관을 그 깊은 곳까지 내려보내, 마침내 그 감추어진 생수를 길어 올려 내 삶을 적시는 거룩한 노동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