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6:1-16 나를 살게 하는 시선, 엘 로이(El R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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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내 존재가 지워진 듯한 광야의 한복판에서도 나를 지켜보시며 이름을 불러주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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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영혼을 갉아먹는 녹과 같습니다. 약속을 붙들고 가나안에 들어온 지 십 년, 아브람과 사래의 가정에 흐르는 침묵은 견디기 힘든 형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사래의 태는 닫혀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초조함은 결국 믿음을 집어삼킵니다. 사래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여종 하갈을 통해 대를 잇겠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이자 합리적인 해결책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송민원 목사는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이 사건을 인간이 인간을 수단화할 때 벌어지는 비극으로 읽어냅니다. 사래에게 하갈은 인격을 가진 '너'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 줄 '도구(It)'에 불과했습니다. 칸트(Kant)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했지만, 욕망에 눈이 먼 곳에서 타자는 언제나 삭제됩니다. 아이를 잉태하자 하갈은 주인을 멸시하고, 사래는 학대로 응수합니다. 결국 하갈은 살기 위해 광야로 도망칩니다.
정처 없는 도망자의 길, 작열하는 태양 아래 홀로 선 하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세상, 그저 '종'이나 '씨받이'로만 규정되던 서러운 운명 앞에서 그녀는 철저히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의 샘 곁에서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창 16:8).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도, 사래도 불러주지 않았던 그 이름 '하갈'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 질문은 그녀에게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자, 너는 결코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랑의 확인이었습니다. 하갈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엘 로이(El Roi)', 즉 '나를 감찰하시는(보시는)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인생의 광야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벗님들.
때로 우리의 삶이 하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효용 가치로 나를 평가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내칩니다. 아무도 내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억울하고 분해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다 나를 외면해도, 하나님만은 여러분을 보고 계시고 눈동자처럼 여러분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신음'을 들으시는 분입니다. 하갈의 아들 이름 '이스마엘(하나님이 들으심)'은 그 증거입니다. 우리의 실수, 우리의 비참함, 우리의 도망침조차 하나님의 시선 밖으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오늘, 그 따스한 시선이 여러분의 지친 어깨 위에 머물러 있음을 믿으십시오. 나를 지켜보는 그 사랑의 눈빛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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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1-16 광야의 샘 곁에서 마주한 시선,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El R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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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섣부른 선택이 빚어낸 갈등과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도망치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살피시는 눈길’로 다시 살아갈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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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파고를 넘어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때때로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과 같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돌아보면 엉킨 실타래처럼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곤 합니다. 한동일 선생은 “삶이란 내가 원하지 않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물려받은 것들을 원만하게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창세기 16장의 이야기는 바로 그 원치 않는 문제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지만, 아브람의 가정에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래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여종 하갈을 통해 대를 잇겠다는 ‘합리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이기주 작가가 말했듯 “언어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습니다”. 사래의 제안은 논리적이었을지 모르나, 그 안에는 타자(하갈)를 인격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차가움이 서려 있었습니다. 결국 이 선택은 가정 안에 멸시와 학대라는 비극을 불러왔고, 임신한 몸으로 광야로 내몰린 하갈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게 됩니다.
송민원 교수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창세기 16장의 비극은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한 불신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수단화하고 억압했을 때 벌어지는 관계의 파괴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아브람은 갈등 앞에서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행하라”며 비겁하게 뒷짐을 집니다. 책임져야 할 가장이 방관자가 될 때, 공동체는 아귀다툼의 현장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절정은 광야의 샘물 곁에서 일어납니다. 주인에게 버림받고 정처 없이 헤매던 하갈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창 16:8). 하나님은 그녀를 ‘누구의 소유물’이 아닌, 이름을 가진 고유한 존재로 호명하십니다. 하갈은 이 놀라운 만남 끝에 하나님을 ‘엘 로이(El Roi)’, 즉 “나를 보시는 하나님(The God who sees me)”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전율을 느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높은 보좌에 앉아 명령만 내리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비루한 실패의 현장, 남들에게 차마 말 못 할 고통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우리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당장 고통이 없는 꽃길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인에게 돌아가라”는, 어쩌면 가혹하게 들리는 현실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지만 그 명령은 이전과 다릅니다. 이제 하갈에게는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내 아픔을 공감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깊은 위로를 우리 영혼에 새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텍스트를 읽는 것을 넘어, 그 말씀이 나의 삶을 읽어내도록 허락하는 용기입니다,. 우리가 하갈의 이야기를 이드거니 씹어 묵상할 때, 비로소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도 나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은 과연 내 기도를 듣고 계신가?”라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위축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깨어진 틈새, 그 상처 입은 자리에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무거운 종교적 의무감이나 완벽주의의 강박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서십시오. 곡진기정(曲盡其情;사정을 간곡하게 다 말함)하신 마음으로 우리를 살피시는 그 눈길을 의지하여,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 견디어 낼 용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하갈이 만난 그 샘물 곁의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의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와 같습니다. 그 자체로는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들에 불과하고 때로는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빛이신 하나님이 그 뒤에서 비추실 때 비로소 우리의 상처와 얼룩조차도 황홀하고 아름다운 빛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법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