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03:01-12 참된 경건과 말(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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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에 이어 이제 말의 문제를 정면으로 꺼내 듭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서려는 이들에게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으니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1-2절). 이어 말의 재갈과 배의 키와 숲을 태우는 작은 불을 들어,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온몸과 삶 전체를 좌우하고 사람이 길들일 수 없는 쉬지 않는 악이라고 고발합니다(3-8절). 끝으로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모순을 샘과 나무의 비유로 꾸짖습니다(9-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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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이라는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오늘 야고보는 그 행함의 첫 자리로 혀를 가리킵니다. 1장에서 그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했고,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했습니다(1:19, 26). 2장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이에게 달리 건네는 차별의 말과, 헐벗은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고만 하는 빈말을 다루었습니다. 말은 믿음이 몸 밖으로 나오는 첫 행함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의 권면들을 혀라는 한 지체에 모아 들여다보는 자리입니다.
# 흩어진 열두 지파의 교회는 글보다 말로 살아가는 공동체였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 회당과 가정 교회에서 말씀을 풀어 주는 선생은 존경받는 자리였고 그만큼 많은 이가 그 자리를 탐냈습니다. 말은 그들에게 믿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지키는 거의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가난과 차별과 박해에 시달려 서로 날이 서 있던 공동체에서는 선생들의 논쟁과 비난이 그대로 교회를 갈라놓을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도 그 선생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며 이 경고를 시작합니다.
# 이 단락은 잠언의 오랜 지혜를 품고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고,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 생명을 보전한다고 잠언은 거듭 말합니다(잠 18:21; 13:3). 주님도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셨고,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 12:34-36).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마다 공회에 잡혀가리라는 산상수훈의 경고도 같은 결입니다(마 5:22). 야고보는 그 가르침을 재갈과 키와 불과 샘의 그림으로 다시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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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말에 실수 없는 온전함
성자 예수님은 말과 삶이 하나이신 우리의 참 선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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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부르며 너희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권합니다.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그 선생들 가운데 두고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야말로 온전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혀뿐 아니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르치는 자리의 무게와 말의 무게를 함께 달아 보는 단락입니다(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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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당시 교회에서 말씀을 풀고 전통을 지키는 존경받는 직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격이 있든 없든 그 자리를 얻으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좀 했다 하는 이들이 자꾸만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고, 자기가 아는 지식과 경험으로 이러쿵저러쿵 조언과 충고를 쏟아 내어 말로 권위를 세우려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그 열망 앞에 더 큰 심판을 세웁니다. 이 심판은 가르친 대로 평가받는다는 뜻이지만, 말뿐인 믿음을 경고한 2장의 흐름에서 보면 위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까지 품고 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제자가 가르치기 전에 본문과 전승을 통째로 외우게 하여 혹시라도 잘못 가르칠까 조심했습니다. 가르치는 자리는 그만큼 두려운 자리였습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 자리에 겹칩니다(눅 12:48).
2절은 원어로 보면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실수하다로 옮긴 말은 발이 걸려 넘어진다는 뜻으로, 2장 10절에서 율법 가운데 하나를 범한다고 할 때 쓰인 낱말입니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많이, 몇몇이 아니라 우리가 다 넘어집니다. 야고보는 선생인 자신도 예외로 두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환경과 처지가 다르고, 우리의 앎과 삶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는 것도 부족하고 말한 대로 사는 일은 더 부족합니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하는 자리는 넘어질 자리를 많이 가진 자리이고, 남에게 들려준 말이 고스란히 나를 재는 잣대가 되는 자리입니다.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를 온전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 온전함은 1장 4절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할 때의 그 말로, 흠 하나 없는 완벽이 아니라 무르익은 성숙을 가리킵니다.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것이 진실함이고, 그것이 온전함입니다. 그런 사람의 행실은 어떤 말보다 강력한 가르침이 됩니다. 이 온전함을 끝까지 이루신 분은 우리 주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사셨고 사신 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는 그분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위 있는 자와 같다며 놀랐습니다. 주님의 권위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말과 삶이 하나인 데서 나왔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참 선생이시기에 우리는 다 형제입니다(마 23:8). 1장 26절이 말한 참된 경건도 결국 이 온전함, 곧 말과 삶이 한 몸이 되는 데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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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심사의 일치와 진실함을 소유한 목사로, 가장으로, 동료로, 이웃으로 살고 싶다는 고백을 이 본문 앞에 다시 꺼내 놓습니다. 우리는 가르치는 말에 익숙합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일수록 다른 이의 사정을 다 듣기도 전에 처방부터 내놓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고 우리의 앎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말을 줄이라는 권면이기 전에, 내 말과 내 삶 사이의 거리를 정직하게 재어 보라는 초대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건넨 조언대로 살고 있습니까.
가정에서 자녀에게 하는 훈계가 내 삶에서 먼저 보이고 있습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말보다 부모가 사는 모습을 먼저 배웁니다. 오늘 한 번은 충고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끝까지 들어 주는 부모와 배우자가 되어 봅시다. 일터에서는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리에 섭니다. 그 자리에서 내 말이 사람을 세우는지 깎아내리는지, 말한 대로 내가 먼저 일하는지 살펴봅시다. 교회 안에도 가르치고 이끄는 자리가 많습니다. 모임을 이끄는 이, 교회학교 교사, 성경공부와 묵상 나눔의 인도자,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특권이 아니라 더 큰 책임의 자리로 받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르치는 이들이 먼저 배우고, 먼저 듣고, 먼저 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본문 앞에 가장 먼저 서야 할 사람이 날마다 말씀을 전하는 저라는 사실도 고백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더 큰 심판이 있다는 경고는 두려움이기 전에 은혜입니다. 그 경고가 있기에 우리는 강단에서 한 말을 강단 아래에서 먼저 살아 내려고 애쓰게 됩니다.
우리가 모두 실수가 많은 사람임을 인정할 때, 서로의 말실수를 덮어 주고 바로잡아 주는 너그러움도 함께 자랄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서기 전에 먼저 배우는 자리에 앉아 봅시다. 이번 주에 누군가에게 조언하고 싶어질 때, 그 말을 내가 먼저 살아 보았는지 한 번 물어보고, 살아 보지 못했다면 조언 대신 함께 기도하자고 손을 내밀어 봅시다. 말보다 삶이 먼저 도착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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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절 혀는 길들일 사람이 없다
성령 하나님은 사람이 길들이지 못하는 혀를 말씀으로 다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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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세 가지 그림을 듭니다. 말의 입에 물린 작은 재갈이 온몸을 이끌고, 광풍에 밀려 가는 큰 배를 지극히 작은 키가 사공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혀도 작은 지체이지만 큰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 혀는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릅니다. 사람은 온갖 짐승과 새와 바다 생물을 길들여 왔으나 혀만은 길들이지 못합니다(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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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갈과 키는 작은 것이 큰 것을 다스린다는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여기 재갈은 2절의 굴레 씌우다, 그리고 1장 26절의 혀를 재갈 물리다와 같은 뿌리의 말입니다. 야고보는 생각이 아니라 혀가 몸의 방향을 정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먼저 생각하고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평소에 품은 마음이 미처 걸러지지 않은 채 입 밖으로 나올 때가 많습니다. 말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몸의 일부입니다. 한번 내뱉은 말은 그 말을 책임지려고 몸 전체를 끌고 갑니다. 광풍에 밀려 가는 배는 1장에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던 두 마음의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깥의 거센 바람보다 배의 방향을 더 크게 정하는 것은 작은 키입니다. 험한 현실 속에서도 혀를 바로 잡으면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다는 뜻이 그 안에 있습니다.
5절 하반절부터 그림이 어두워집니다.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느냐는 말은 원문에서 소리가 맞물리는 운율로 되어 있어 귀에 박힙니다. 팔레스타인의 건기에는 관목과 마른 풀에 붙은 불씨 하나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산 전체를 태웠습니다. 혀는 불의의 세계로 우리 지체 가운데 자리를 잡고, 온몸을 쉬지 않고 더럽히며 삶의 수레바퀴, 곧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인생 전체를 불사릅니다. 그 불의 출처는 지옥, 곧 게헨나입니다. 혀가 악한 자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막아서던 베드로의 말이 그 순간 사탄의 말이 되었던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혀도 예외가 아닙니다.
7-8절은 창조의 질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고, 사람은 실제로 그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맹수를 길들인 사람이 자기 입 안의 작은 혀 하나는 길들이지 못합니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라는 말은 우리에 가두어도 가만있지 않는 짐승을 가리키며, 1장 8절의 정함이 없는 두 마음과 같은 낱말입니다. 혀를 뱀같이 날카롭게 한다는 시편의 탄식도 여기 겹칩니다(시 140:3). 그래서 혀를 다스리는 일은 굳은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다스림을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길들일 사람이 없다는 말은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도움을 구하라는 초대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오순절에 불의 혀처럼 갈라진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의 혀가 하나님의 큰일을 말했습니다. 지옥에서 붙은 불을 끄시는 분은 위로부터 오신 불, 성령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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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고 살기는 정말 힘듭니다. 대신에 말을 절제하고 조절하고 분별하는 일은 훈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의 말씀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주의 말씀으로만 우리의 말을 길들여 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먼저 듣는 사람이 말을 더디 할 줄 압니다. 손가락 끝으로 쓰는 말도 혀입니다. 댓글 한 줄과 단체 대화방의 짧은 한마디가 작은 불씨가 되어 누군가의 삶을 태울 수 있습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읽어 보고, 화가 났을 때는 하룻밤을 묵혀 두는 습관을 들여 봅시다.
가정에서는 피곤한 저녁 시간이 가장 위험합니다. 지친 몸에서 나온 날 선 말 한마디가 식탁을 얼어붙게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말보다 먼저 숨을 고르고, 이미 뱉은 말이 있다면 그날이 가기 전에 미안하다고 말합시다. 일터에서는 누군가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 이야기가 시작될 때 맞장구를 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불을 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소문이 번지는 마른 덤불이 아니라 소문이 멈추는 물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들은 말을 옮기기 전에 그 사람을 위해 먼저 기도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이야기는 내 안에서 멈추게 하고, 필요하다면 당사자에게 직접 사랑으로 묻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길입니다. 종에게도 말하기를 더디 하고, 생각하고 말하며, 배려와 위로와 칭찬과 살리는 말로 하루를 채우게 해 달라고 함께 구합시다. 성령께서 우리의 혀를 다스리실 때 그 작은 지체가 숲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언 마음을 녹이는 불씨가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 말씀 한 구절을 마음에 담고 하루를 시작합시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머무는 동안에는 혀끝에 맺힌 날 선 말이 한 번 더 걸러집니다. 저녁에는 오늘 한 말 가운데 불씨가 된 말은 없었는지 돌아보고, 있었다면 내일 아침 그 사람에게 먼저 건넬 따뜻한 한마디를 준비해 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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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2절 한 입의 찬송과 저주
성부 하나님은 자기 형상으로 지은 사람을 축복하는 입을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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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혀의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같은 혀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그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합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을 그는 마땅하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그러고는 자연의 이치를 듭니다.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듯, 짠 물은 단 물을 내지 못한다고 꾸짖습니다(9-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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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아버지를 찬송하는 것은 회당과 교회 예배의 중심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에도 여러 번 찬송받으실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야고보가 그리는 장면은 예배의 찬양과 예배 밖의 험담이 한 입에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주받는 그 사람을 야고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의 말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새겨 두신 하나님의 형상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과 사람을 저주하는 일은 함께 설 수 없습니다. 형상을 깎아내리면서 그 형상의 주인을 높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주를 믿는 사람이 사람을 외모로 차별할 수 없다던 2장의 말씀이 여기서 다시 울립니다.
10절 중간에 갑자기 내 형제들아 부르는 소리가 끼어듭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힘주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는 표현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강한 거절입니다. 이어지는 샘의 비유는 물이 귀한 땅의 현실에서 나왔습니다. 바위틈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번갈아 나오는 샘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를,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습니다. 한 사람에게서는 한 종류의 말이 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도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고 하시며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말은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야고보는 해법을 따로 늘어놓지 않고 그림으로 남겨 둡니다. 샘물을 바꾸려면 물줄기 끝이 아니라 근원을 고쳐야 합니다. 1장에서 그는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심으셨다고 했습니다(1:18, 21). 하나님은 우리 안에 새 샘을 파시는 분입니다. 코람데오, 곧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늘 기억할 때, 사람들 앞에서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습니다. 언제고 그 안에 담긴 것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고,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축복하셨습니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신 그 입이 우리 안에 솟을 새 샘의 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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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기 원합니다. 이 기도는 혀를 고치는 일이 마음의 샘을 고치는 일임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주일에 찬송을 부르고 그 주간에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을 쉽게 합니다. 찬송이 예배당 안에만 머물면 그것은 반쪽짜리 찬송입니다. 오늘 하루 내 입에서 나온 말을 저녁에 돌아보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을 깎아내린 말은 없었는지 물어봅시다. 가정에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거친 말을 하기 쉽습니다. 배우자와 자녀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식탁에서 가족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고맙다고, 네가 있어 좋다고 말해 봅시다. 그 짧은 한마디가 가정이라는 샘의 물맛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일터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와 동료가 있습니다. 그를 위해 축복하는 기도 한 줄을 먼저 드리면 입에서 나오는 말의 결이 달라집니다.
우리교회가 예배 시간에 드린 찬송이 예배 후 주차장과 친교실과 단체 대화방에서도 이어지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 생각이 다른 사람,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말할 때에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말을 고르는 공동체가 됩시다. 마음에 말씀을 심고 감사를 담아 두면, 언젠가 불쑥 튀어나오는 말도 단 물이 될 것입니다.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한다는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입니다. 쓴 물이 나오는 날에는 혀를 탓하기 전에 샘을 들여다봅시다. 그 안에 쌓인 서운함과 억울함과 시기를 주님께 그대로 내어놓을 때, 주님은 그 자리에 감사와 긍휼을 새로 채우십니다. 우리 입에서 나온 축복 한마디가 형상을 지닌 이웃의 하루를 살리는 단 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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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나를 지으신 주님,
작은 혀 하나 다스리지 못해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저를
오늘 말씀 앞에 다시 세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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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려 서두르는 입을 닫고
먼저 듣고 먼저 사는 사람이 되게 하시며
말과 행실의 일치와 진실함으로
온전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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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길들이지 못하는 이 혀를
성령께서 다스려 주옵소서.
숲을 태우는 불씨가 아니라
언 마음을 녹이는 불이 되게 하시고
배려와 위로와 칭찬과
살리는 말로 하루를 채우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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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찬송한 이 입으로
주님의 형상을 지닌 이웃을
저주하지 않게 하옵소서.
내 안에 계셔서 마음의 샘을 새롭게 하시고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묵상이
주께 열납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