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7:1-20 여호와 앞에 그 글을 펴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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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왕이 랍사게의 위협을 전해 듣고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은 채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 선지자 이사야에게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부탁합니다(1-4절). 이사야는 앗수르 왕의 종들이 하나님을 능욕한 말로 두려워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한 영을 그 속에 두어 소문을 듣고 제 나라로 돌아가 칼에 죽게 하시리라는 구원의 신탁을 전합니다(5-7절). 그러나 산헤립은 물러가지 않고, 이번에는 히스기야가 신뢰하는 하나님까지 직접 조롱하는 편지를 다시 보내옵니다(8-13절).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손에 받아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그 글을 하나님 앞에 펴 놓고, 그룹 사이에 계신 천지의 창조주께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14-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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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36-39장은 이사야서 전반부를 마감하는 산문 단락으로, 다른 장들이 대부분 운문 신탁으로 되어 있는 것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네 장을 두고 "36-37장은 히스기야 왕 제십사 년에 있었던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공격(701년)과 여호와의 간섭에 의한 극적인 구출 이야기"라고 정리하면서, 이 이야기 전체의 주인공은 이사야가 아니라 "의로운 왕의 전형적인 인물로 기술되는" 히스기야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이 대목에서 이사야의 역할은 매우 소극적이고, 무대의 중심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리는 왕의 기도가 놓여 있습니다.
# 역사의 자리는 주전 701년입니다. 아버지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산헤립은 초기의 혼란을 수습한 뒤 시리아-팔레스티나로 원정을 내려와, 애굽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유다로 방향을 틀어 예루살렘을 "새장에 갇힌 새처럼" 몰아붙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은 거의 다 함락되었고, 앗수르는 라기스에 진을 친 채 랍사게를 보내 항복을 강권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위협을 전해 들은 왕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서 시작합니다.
# 이 본문을 읽는 열쇠는 히스기야를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 나란히 놓는 데 있습니다. 김필회 교수의 말대로 "히스기야의 반응은 그의 아버지 아하스의 반응에 대조적"입니다. 일찍이 아람과 에브라임이 예루살렘을 침공한다는 소식 앞에서 아하스는 이사야의 신탁을 거절하고 앗수르를 의존했지만(사 7장), 히스기야는 참회하며 여호와를 찾을 뿐 아니라 이사야에게 여호와의 신탁을 구합니다. 흥미롭게도 두 왕이 이사야를 만나는 장소가 겹칩니다. 랍사게가 위협의 연설을 쏟아낸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은, 김필회 교수가 상기시키듯 바로 이사야가 아들 스알야숩과 함께 아하스를 만나 하나님의 신탁을 전했던 그 자리입니다(사 7:3). 같은 자리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아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섭니다. 성경은 이렇게 같은 무대를 두 번 비추어 믿음과 불신의 갈림길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 곧 오늘 본문은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사람이 자기 힘을 내려놓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며, 그 돌이킴이 어떻게 응답되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구조는 세 단락으로 또렷합니다. 위협을 들은 왕이 옷을 찢고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를 부탁하고(1-7절), 물러가지 않는 산헤립이 이번에는 하나님을 직접 겨냥한 편지를 보내오며(8-13절), 왕이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고 기도합니다(14-20절).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이 모두 "성전으로 올라감"으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본문의 심장은 전쟁터가 아니라 성전이며, 승패를 가르는 무기는 병거와 기병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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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절 찢은 옷과 '혹시'의 기도
성부 하나님은 자기 힘의 끝에서 부르짖는 자의 소리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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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왕은 랍사게의 말을 전해 듣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은 채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갑니다(1절). 그는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에게도 베옷을 입혀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내며,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전하게 합니다(2-3절). 이어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간청합니다(4절). 이사야는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는 구원의 신탁을 선포합니다(5-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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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옷을 찢고 베옷을 입은 왕의 몸짓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이 사태의 무게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참회와 애도의 제의적 행위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히스기야가 "예루살렘의 구원이 오직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인식한다"고 지적합니다. 왕은 성벽을 더 높이거나 애굽에 사신을 보내는 대신, 성전으로 올라가 예언자에게 신탁을 구합니다. 중요한 일이 발생했을 때 왕이 예언자에게 신탁을 구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고대 근동에서 낯선 일이 아니었지만(왕상 22:5 이하),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그 방향입니다. 위기의 화살표가 앗수르나 애굽이 아니라 여호와를 향해 돌아섰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절을 통해 전한 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는 여러 갈래로 읽을 수 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두 해석의 개연성을 저울질하는데, 하나는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위협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징계하실 때가 왔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는 뒤따르는 해산의 비유가 후자를 조금 더 지지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히스기야의 고백이 "체념에서 나온 한탄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라는 말은 인간의 노력이 완전히 소진된 자리를 그린 것이지만, 그 자리에서 왕은 손을 놓아 버린 것이 아니라 손을 든 것입니다. 김필회 교수의 표현대로 "히스기야는 여호와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자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기에 이를 통해 그분의 개입을 호소"합니다. '환난의 날'이라는 표현이 본디 시편에서 여호와께 도움을 부르짖는 기도의 날을 가리킨다는 사실(시 20:1; 50:15; 86:7)은 이 고백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 줍니다. 그것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기도의 언어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깊이 묵상할 대목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4절)의 그 "혹시"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팔을 비틀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혹시"를 두고 "의심(불신앙)의 표출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자의 기대감을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밝히면서, "구원과 축복은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선물이기에 기도로 그분의 결정을 강제할 수는 없다"고 덧붙입니다. 히브리어 '울라이'(혹시)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선지자들의 입에 오르내린 말로(창 43:12; 출 32:30; 암 5:15; 욜 2:14),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믿음의 어법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근거는 왕조의 특권이나 예루살렘의 신성함이 아니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여호와의 정체입니다. 이 표현은 김필회 교수가 짚듯 "역사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의지를 관철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활동성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다윗왕조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영예를 지키시려는 여호와에게서 생존의 소망을" 봅니다. 그리고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은 신약에 이르러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활동성을 최종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여호와의 응답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의 서두에 붙은 "보라"는, 김필회 교수의 말대로 "하나님의 간섭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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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도 "해산할 힘이 없는" 날이 옵니다. 애써 볼 만큼 애써 보았으나 길이 보이지 않고, 더는 쥐어짤 힘조차 남지 않은 자리가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종종 그런 날에 더 큰 프로그램과 더 많은 전략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합니다. 위기 자체를 신속히 제거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다 보면, 정작 위기를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과 깊어지는 그 은혜의 시간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힘의 끝에서 히스기야가 한 일은 옷을 찢고 성전으로 올라간 것뿐이었습니다. 신앙은 위기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위기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올라가는 발걸음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도 자신의 능욕의 날에, 문제를 손에 쥐고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조종하는 주문이 아니라 그분의 주권 앞에 자신을 여는 "혹시"의 기도임을 기억합시다. 응답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이 그분께 매여 있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혹시"의 자리는 결코 믿음이 약한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기도의 결과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에 온전히 맡겨 드리는, 가장 성숙한 신뢰의 자리입니다. 응답의 모양과 때를 정하시는 분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우리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잠잠히 그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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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3절 다시 온 위협의 편지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조롱당하는 자리에 친히 당사자로 들어서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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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거절로 랍사게의 협상은 실패로 끝나고, 그는 산헤립이 라기스를 떠나 립나를 공격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리로 돌아갑니다(8절). 그 무렵 앗수르 왕은 구스 왕 디르하가가 나와서 자기와 싸우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냅니다(9절). 이번에는 편지입니다. "너는 네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10절). 산헤립은 앗수르 왕들이 열방을 어떻게 진멸했는지를 들먹이며,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에덴 자손,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과 헤나와 이와의 신들이 그 백성을 건지지 못했음을 나열합니다(11-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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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번째 위협의 결정적 변화는 조롱의 과녁이 옮겨진 데 있습니다. 첫 번째 랍사게의 연설이 히스기야의 항전 의지를 겨냥했다면, 이번 편지는 김필회 교수의 말대로 "히스기야가 의지하는 여호와를 직접 모욕"합니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의 구원에 관한 신탁 자체를 "속지 말라"며 무너뜨리려 하고, 자신의 업적뿐 아니라 선왕들의 행적까지 총동원해 히스기야의 저항이 파국으로 끝나리라 위협합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고 강력합니다. 앗수르 왕들이 다른 모든 나라를 진멸했는데 히스기야만 예외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산헤립이 열거하는 지명들은 허풍이 아니라 실제 역사의 무게를 지닌 이름들입니다. 고산은 김필회 교수가 설명하듯 "사마리아가 멸망한 후에 북 왕국의 주민들이 유배를 당한 지역들 가운데 하나"였고(왕하 17:6; 18:11), 하란과 레셉과 에덴 자손(비트-아디니)은 모두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앗수르의 말발굽 아래 스러진 성읍들입니다. 하맛과 아르밧과 스발와임은 이미 36장에서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산헤립은 이 이름들을 하나씩 꺼내 놓으며 사실상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도 저들의 신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이 본문의 신학적 긴장이 있습니다. 산헤립은 여호와를 열방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셈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들의 세계란 결국 힘의 서열이며, 강한 제국이 약한 민족의 신을 이겨 왔다고 믿습니다. 정경의 맥락에서 볼 때 이 조롱은 이사야서 전체가 다투어 온 우상 논쟁의 정점입니다. 앞선 장들에서 이사야는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의 무력함을 거듭 폭로해 왔는데(사 44장의 우상 조롱을 예비하며), 산헤립은 바로 그 우상의 자리에 여호와를 끌어내리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음의 실마리가 숨어 있습니다. 산헤립이 여호와를 모욕하는 순간, 이 전쟁은 히스기야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 자신의 전쟁이 됩니다. 김필회 교수는 "산헤립에 의한 모독이 여호와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동기가 된다"고 짚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또한 이 위기의 성격을 정확히 규정하는데, "앗수르의 위기는 그분께서 도움을 거절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 도움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재앙"이라고 말합니다. 곧 다윗왕조가 여호와를 예루살렘과 왕조의 보호자로 인정할 때에야 그분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흙바닥에 끌려 내려오는 것을 침묵으로 넘기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힘의 계산표 한 칸에 밀어 넣을 때, 하나님은 그 계산을 뒤엎으시려 친히 무대 위로 걸어 나오십니다. 산헤립은 신들의 세계를 힘의 서열로 이해했고, 강한 제국은 언제나 약한 민족의 신을 꺾어 왔다는 경험칙을 신앙처럼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칙에는 치명적인 빈칸이 있었으니, 그가 여태 이긴 것은 신이 아니라 우상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이 조롱당하는 자리, 곧 십자가의 능욕 한복판으로 몸소 들어오심으로써 이 성품을 극에 이르도록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라"는 조롱을 잠잠히 받으신 그분은, 사흘 뒤 부활로써 그 모든 조롱을 뒤엎으시고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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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이름은 여전히 조롱당합니다. 어떤 이는 신앙을 시대에 뒤처진 미신으로 조롱하고, 어떤 이는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빌미로 하나님까지 싸잡아 비웃습니다. 산헤립이 열국의 신들 이름을 하나씩 늘어놓으며 "네 하나님도 저들과 다르지 않다"고 몰아붙였듯, 오늘의 세상도 무너진 신앙의 사례들을 열거하며 여호와를 그 목록의 한 칸에 밀어 넣으려 합니다. 이런 조롱 앞에서 성도가 붙들 진리는,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결국 우리 몫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변호하느라 오히려 그분을 더 작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논쟁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앞서면,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을 우리가 지켜 드려야 할 연약한 분처럼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스스로 살아 계셔서 자신의 이름을 친히 변호하시는 분입니다. 산헤립의 편지 앞에서 히스기야가 그러했듯, 우리도 그 조롱을 우리 손에 움켜쥐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세상의 비웃음 앞에서 발끈하기보다, 그 비웃음을 조용히 하나님께 올려 드리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친히 응답하시기를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변론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한 삶과 잠잠한 기다림이야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세상에 보이는 가장 강력한 증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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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0절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성자 안에서 하나님은 천하 만국이 오직 그분만이 여호와이신 줄 알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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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는 그 사자들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습니다(14절).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16절). 그는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부르짖으며, 산헤립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말을 들으시라 간구합니다(17절). 앗수르 왕들이 열국의 신들을 불에 던진 것은 그것들이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일 뿐이요 나무와 돌"이기 때문임을 고백하고(18-19절), 마침내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맺습니다(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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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손에 받은 히스기야의 첫 몸짓은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는" 것이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장면을 두고 "그는 기도를 드리기 전에 먼저 산헤립의 서신을, 아마도 여호와께서 읽어보시도록, 그분 앞에 펼쳐 놓는다"고 풀이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인상적인 기도의 자세입니다. 히스기야는 위협을 요약하거나 각색하지 않고, 그 협박의 문서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펼쳐 놓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문제를 감추지도 부풀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시선 아래 그대로 내어놓는 것, 그것이 기도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부르는 세 겹의 칭호로 열립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김필회 교수의 설명을 따르면 '만군의 여호와'는 예루살렘 제의의 공식 호칭으로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함축하고, '그룹 사이에 계신 분'은 지성소의 법궤 위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삼상 4:4),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곤경에 눈감지 않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주는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성전 지성소의 좁은 공간에 현존하시는 그 하나님이 동시에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대목을 "모든 왕국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자신을 세상의 왕으로 주장하는 산헤립에게 맞서 그는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왕으로 역사를 주관하심을 고백"하는 장면으로 읽습니다. 히스기야는 "신격화된 앗수르 제국의 권위와 능력을 철저하게 여호와의 권위와 능력 아래 예속"시킵니다.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이 기도가 무엇을 먼저 구하는가입니다. 김필회 교수가 정확히 지적하듯 "그는 처음부터 예루살렘을 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는 먼저 산헤립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조롱하였다고 고발하면서 그를 여호와께 맞대면"시킵니다. 그리고 앗수르가 불살라 버린 열국의 신들이 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나무와 돌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정합니다. 곧 히스기야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산헤립이 이긴 것은 신이 아니라 우상들이었고, 여호와는 그 우상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절정에서 그가 구하는 것은 자기 목숨의 안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김필회 교수의 말대로 "예루살렘의 구원은 여호와께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온 세상에 과시하는 사건"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그분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사건이며, 그 절정이 곧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 모든 무릎이 꿇게 되는 사건입니다(빌 2:9-11). 히스기야가 구한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의 고백은 오순절 이후 온 열방으로 퍼져 나가는 복음의 예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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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방향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는 흔히 내 문제의 해결을 첫 자리에 놓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히스기야는 우리에게 더 깊은 순서를 가르쳐 줍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자신의 구원을 그 영광에 잇대어 청합니다. 우리의 위기가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구하는 기도,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높은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 앞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먼저 구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내 필요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는 이 순서가 뒤집힐 때, 기도는 어느새 나를 중심에 둔 독백이 되고 맙니다.
오늘도 협박의 편지 같은 소식이 우리 손에 쥐어질 때, 그것을 감추어 두거나 홀로 곱씹지 말고 하나님 앞에 펴 놓읍시다. 히스기야가 편지를 각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펼쳐 놓았듯, 우리도 두려움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말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시선 아래 내어놓아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각자의 삶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활짝 펼쳐 놓고, "우리를 구원하사 사람들이 주만이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때 우리의 작은 구원 하나하나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세상에 증언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며, 우리의 응답받은 기도는 우리 자신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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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힘이 다한 자리에서 옷을 찢고 주님의 전으로 올라간 히스기야처럼
우리도 우리의 능욕의 날에 주님께로 올라가게 하소서.
문제를 손에 쥐고 조바심 내지 않고
"혹시" 주님께서 보시고 응답하실까 하는 낮은 믿음으로
주님의 주권 앞에 우리 자신을 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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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이 조롱당하는 것을 침묵으로 넘기지 않으시는 하나님,
세상이 주님을 비웃고 신앙을 낡은 것이라 조롱할 때
우리가 발끈하여 주님을 더 작게 만들지 않게 하시고
그 조롱을 조용히 주님께 올려 드려
주님께서 친히 당사자로 들어서시기를 기다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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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를 지으시고 만국을 다스리시는 여호와여,
협박의 편지 같은 소식이 우리 손에 쥐어질 때
그것을 감추거나 홀로 곱씹지 않고 주님 앞에 펴 놓게 하소서.
우리의 작은 구원 하나하나가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이신 줄을 세상에 알리는 이야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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